“음악은 거들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윤범 PD 일본의 온갖온가쿠]

‘The grass is greener on the other side.’ 이 문장을 정확히 중학교 1학년 영어 수업 시간에 배웠다. Sweetbox의 ‘Life is cool’ 2절 부분이다. 모든 악기 편곡이 갑자기 빠지고 오롯이 목소리로만 가사에 밑줄 쫙쫙 그으며 호소하는 그 부분! 영어 선생님이 알려주었다. 이 문장은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의 영어식 속담이라고. 맞다. 그런 것 같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쪽보다는 조금은 가려져 있는 미지의 저 쪽이 좋아 보인다. 이쪽의 단점과 저쪽의 장점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여기서 이쪽은 한국의 음악 문화 그리고 저쪽은 일본의 음악 문화가 되겠다.

‘그래, 저쪽의 잔디가 얼마나 푸른지 한 번 보자’는 마음에서 올 여름에 일본의 후지 락 페스티벌로 향했다. 아니 그 속담의 영향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억울한 마음이 쌓여있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공연을 하면서, 한국에는 오지 않는 해외 뮤지션들. 참 많다. 여기 구체적인 수치다. ‘롤링 스톤즈’ 일본 18회 vs 한국 0회. ‘U2’ 일본 9회 vs 한국 0회. ‘너바나’ 일본 4회 vs 한국 0회. ‘그린데이’ 일본 15회 vs 한국 1회. ‘라디오 헤드’ 일본 33회 vs 한국 1회. 너무하다. 아무리 일본 음악 시장이 세계 2위라고는 하지만….

이런 마음에서 시작한 나의 후지 락 페스티벌 기행 시작이다.

▲ 제20회 후지 락 페스티벌 애프터무비 화면캡처

2016년 20주년을 맞이하는 후지 락 페스티벌은 아시아 최대 규모다. 도쿄역에서 신칸센으로 1시간 30분 쯤 떨어져있는 나에바 리조트 지역에서 펼쳐진다. 에치고 유자와 역에 도착하면, 모든 게 후지 락페로 덮여져 있다. 깃발과 포스터 그리고 거대한 등산 가방을 맨 관객들까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운영의 묘미, 넓은 대자연의 공연 부지, 아기자기한 이벤트, 적절한 가격과 맛있는 음식들,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라인업, 관객을 배려한 타임 테이블 등등. 아아, 역시 후지 락페다!

…나는 바로 위의 문단과 같이, 다분히 기억이 미화된 여행 에세이를 적진 않을 거다.

앞서 말했듯 원래 남의 잔디가 더 푸른 것 같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해외 설렘 효과’라고 할까나.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해외에서 겪으면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심리. (한국에서 스마트폰 데이터가 늦게 터지면 투덜거리는 사람이, 해외에서 같은 상황에 놓일 때, 갑자기 아날로그의 삶을 예찬한다. 한국에서는 남의 패션에 깐깐한 사람이, 갑자기 해외에서는 외국인들의 편안한 옷차림을 보고는 히피스러움과 스포티함에 감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외 설렘 효과’들을 다 빼보고 난 다음에, 후지 락페에서 느낀 꽤나 괜찮은 일본의 음악 문화는 딱 하나다.

‘음악은 거들 뿐.’ 우리나라의 페스티벌 문화와 일본 페스티벌 문화가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사람들이 결코 주도권을 무대에 있는 뮤지션들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후지 락페에서의 일본 사람들은 주도권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잠 오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좀 보다가 재미없으면 다른 무대로 가고…’ 이 사람들에게는 무대 위의 공연이 페스티벌의 목적이 아닌 것 같았다. 공연은 페스티벌의 일부일 뿐. 음악은 나의 ‘기분 좋음’을 거드는 수단일 뿐.

▲ 제20회 후지 락 페스티벌 애프터무비 화면캡처

물론 처음에 이 광경을 목격했을 때는 이해가 안 갔다. 아니 이 사람들이 페스티벌에 와서, 그것도 43000엔(한화 46만원)이나 주고 와서, 잠을 잔다거나 계곡 물놀이를 하고 있으니… ‘따라해 볼까? 아니야. 그래도 일본까지 왔는데 알짜배기 라인업 다 봐야지.’ 고민하다가 사람들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나도 기분 좋음에 몸을 맡기는 걸로 결정했다! 제임스 블레이크를 보다가 잠을 잤다. 트로이 시반을 제쳐두고 드래곤 곤돌라를 탔다. 베이비메탈을 보다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으러 갔다. 레드핫 칠리 페퍼스를 보다가 별로라서 다른 무대로 갔다. 후회는 없다. 그 순간의 선택이 내 기분을 좋게 했으니까.

나의 ‘기분 좋음’을 음악은 거들 뿐이다. 이 문장이 일본 음악 문화 전반에 깔려있는 중요한 전제다. 음악이 먼저라는 접근보다 오히려 음악은 부수적인 수단이라는 접근이, 음악 문화 전체에 큰 도움이 된다. 미디어에서 홍보해주는, 평론계에서 극찬하는 음악들 보다는 우선 자신들이 듣기에 좋은 음악을 들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온전히 자신의 느낌에 집중함으로써 음악에 대한 장벽이 낮아진다. 그 다음으로 다양한 음악들이 생겨나고, 기괴한 시도도 이뤄지며, 활발한 피드백도 오간다. 이 모든 과정을 가능케 하는 건, 나의 ‘기분 좋음’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솔직함’이다.

메탈리카 티셔츠를 입고 하이네켄 맥주를 마시고 계셨던 할머니. 2005년 후지 락페 옷을 입고 아들을 목마태운 채 신나있던 아저씨. 구석 자리 잔디밭에 둘러 앉아 기타를 치며 자기 음악을 하던 소년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그 모습들을 보고 ‘The grass is greener on my side’라고 외쳐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 제20회 후지 락 페스티벌 애프터무비 화면캡처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