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자리에서 불편을 느낀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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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캐스트] 방영찬 EBS PD- 영화 ‘자백’을 보고

지루하지 않을까 했던 걱정은 영화가 시작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하지만 30분 후부턴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결말에 대한 나의 예측이 틀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예측이란 ‘과연 국정원이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이 있겠지만 결국 결정적인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지’라는 것이었다. 조금의 의혹도 없다면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 리 없겠지만 모든 의혹을 완전히 밝힌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불안은 서서히 공포로 변했다.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의 재미없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의혹이 희미한 그림자를 남기는 수준이 아니라 햇볕 쨍쨍한 날, 시퍼런 바다 한가운데 새카맣고 거대한 고래가 떠오르는 것처럼 무시무시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재일동포 승효 씨의 마지막 진술을 듣는 순간, 내 눈앞에 완전한 형체를 드러낸 고래가 커다란 입을 벌려 내 의식을 집어삼켰다. 제작진을 배웅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멈추자 내 머리도 생각하기를 멈추고 아득한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목적’과 그 ‘수단’에 대한, 원색적 두려움이 사위를 깜깜하게 만들었다.

고백하건데 절망이나 광기의 맨얼굴을 보는 일만은 가능하면 피하려고 애썼다. ‘맨얼굴’이란 표현이 적확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절망이나 광기는 어떤 상황이나 사상이 아니라 결국 그 사상을 믿고 그 상황을 만드는 사람들이라 믿기 때문이다.

▲ 영화 <자백> 예고편

딸 같은 모습의 그녀를 겁박하고 때리다가 다시 껴안아주며 거짓 자백을 세뇌시킨 조사관이 그렇고, 수많은 죄 없는 사람을 고문하고 가두고 결국 살해하고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하는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그렇고, ‘미안하지 않느냐’는 한 서린 외침에 가소롭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국정원장이 그렇고, 어떤 질문에도 자동응답기처럼 굴며 진실을 외면하던 검사가 그렇듯 절망과 광기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얼굴을 자주보다 보면 내 심장마저 돌이 되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비겁하게도 직면하길 꺼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무서운 진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주한 감독의 얼굴은 너무나 담담했다. 아직 위협적인 일은 별로 겪지 않았다고도 했고 지금 우리의 상황도 막연히 나아질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뉴스 화면을 통해 늘 진지한 모습만 봐와서일까. 허허실실 하는 모습은 약간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 독립영화 최고의 개봉 스코어라는 상찬에는 개봉 규모가 다르다고 정확히 사실을 짚었다. 전화기 너머 소녀에게 끝내 아버지의 자살을 말해준 그의 신조를 짧은 인터뷰를 통해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무력하게 느껴지는 개인이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만 세상의 불편함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분명히 바뀔 것’이라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관객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거기에 시대의 절망을 견디며 살아가는 희망의 맨얼굴들이 있었다. 이런 글을 쓰며 다시금 뜨거워지는 내 얼굴도 있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십시일반으로 도운 1만 7000여 명의 얼굴이 있었고, 이제 이 영화를 본 7만 명이 넘는 관객들의 얼굴이 있다. 과연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불편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PD저널>을 주로 읽는 사람들이 속한 그 자리에서 말이다. 그제 극장서 봤던 그 얼굴들을 더 많이 마주 보며 돌이 된 심장이 다시 뜨겁게 뛰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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