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 무죄 판결,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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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책] 데즈카 오사무 ‘플루토’를 읽고

지난 18일 광주지법 항소부에서 3명의 병역거부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동안 판사 한 명이 혼자 결정을 내리는 1심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세 명의 판사가 합의해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항소심에서 병역거부 무죄 판결이 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BS와 SBS가 이 소식을 메인 뉴스로 보도하고, tvN의 예능 프로그램 <SNL>에서까지 무죄 판결을 소재로 삼을 정도로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도가 다시 한 번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뜨거운 이슈가 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병역거부에 대한 의견을 쏟아낸다. 하지만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은 병역거부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 처음 알려지고 병역거부운동이 막 시작되던 15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군대 다녀온 사람은 비양심이냐. 누구 호구라서 군대 갔다 온 줄 아냐”,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누가 군대 가겠냐. 나라는 그럼 누가 지키냐?” 등등. 15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점이 퍽 안타깝고, 우리가 활동을 제대로 못한 게 아닌가 싶은 자괴감마저 든다.

스스로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반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편에 속하는 법조인들은 의외로 병역거부권 인정과 대체복무제도 도입의 필요성에 찬성하는 경향이 강하다. 상급심의 판결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임에도 무죄 판결이 계속 이어지는 것, 이번 무죄 판결 직후에 실시한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여론조사(대체복무제 도입 80.5% 찬성) 등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 데즈카 오사무, 우라사와 나오키 ‘플루토’ ⓒ서울문화사

이러한 경향성을 나타나는 원인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결국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를 도입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의 다툼이라기보다는 헌법적 가치를 상식선에서 지키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적인 사람들도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심사숙고 한다면 대체복무제 정도는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체복무제도는 유럽 쪽에서는 진보진영의 의제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보수파들이 대체복무제를 이야기하며, 평화운동가들은 대체복무제도를 평화운동의 과제로 삼지 않는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책 ‘플루토’는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테즈카 오사무의 ‘철완아톰’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지상 최대의 로봇’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등장인물들과 이야기의 얼개는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세세한 연출과 구성, 드로잉에 자기만의 해석을 덧붙인 수작이다. 이 만화는 사실 여러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가 많다. 인간과 로봇의 경계와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지, 누가 전쟁을 왜 일으키고 어떻게 일으키는지 전쟁은 각각의 삶에 어떤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전쟁을 겪은 이들은 어떤 트라우마를 갖게 되는지 등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인간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인공지능 로봇이 개발된 시대, 많은 로봇이 인간과 함께 살아간다. 최강대국 트라키아 합중국은 평화유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왕국에 쳐들어간다. 대량 살상 로봇을 숨기고 있다는 이유였다. 이 전쟁에는 세계의 힘의 균형을 위해 대륙별로 분배 배치된 최강의 로봇들도 징집된다. 전쟁으로 페르시아 왕국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했던 대량살상 로봇은 찾지 못한다. 이러한 설정에서 아마도 이라크 전쟁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작가도 그런 의도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트라키아 합중국의 대통령 알렉산더는 조지 부시를 닮았고, 페르시아 왕국의 군주 다리우스 14세는 사담 후세인을 닮았다.

‘플루토’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게지히트도 아니고 원작의 주인공 아톰도 아니다. 내 관심을 끈 캐릭터는 앱실론이었다. 앱실론은 빛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로봇으로 태양이 떠 있으면 무한대의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기 때문에 최강의 로봇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로봇이다. 하지만, 그녀는 페르시아 왕국을 침략한 39차 중앙아시아 분쟁 때 징집을 거부한다.

그녀는 병역거부자였다. 그녀가 전쟁 참여를 거부하고 택한 일은 전쟁 고아를 돌보는 일이었다. 그녀는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쓰는 것을 주저한다. 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플루토가 세계 최강의 로봇들을 파괴하고 다니는 동안에도, 힘을 과시하며 플로토와 맞서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지키는 데 자신의 능력을 쓴다. 이 만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중앙아시아 분쟁에 참전한 어느 구식 로봇이 전투가 끝난 뒤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 장면이다. 로봇은 감정이 없는데도, 마치 자기 손에 묻은 피를 죄책감과 함께 씻어내고 싶어 하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이처럼 ‘플루토’는 최초의 병역거부 항소심 무죄 판결을 맞이한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전쟁과 평화, 공화국의 의무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논쟁에 시사점을 주는 내용이 가득하다. 우리도 더 이상 영양가 없는 논쟁들, “군대 갔다 온 사람은 비양심이냐”와 같은 이야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전쟁은 누가 왜 일으키며, 우리는 전쟁을 어떤 철학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우리 사회는 그리고 개개인은 전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한다. 병역거부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의 입장은 다양한 철학과 대응방식 그 다양한 철학과 대응방식 가운데 하나다.

이용석: 병역거부자. 출판사 다닐 때는 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현재는 평화단체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다. 효과적인 사회운동 방법을 배우기 위해, 그러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긴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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