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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PD의 들여다보기]

*글쓴이 주 : 아래 글 중 일부엔 불철주야 자신의 자리에서 성심을 다해 정론직필, 고군분투하는 대부분의 성실한 언론인들에게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리 사과드립니다. 다만 개별 언론사나 언론인에 대한 공격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며 우리의 소명에 대해 한 번 되짚어보고자 함이 목적이었음을 미리 밝히는 바입니다.

단골 네일샵 언니도, 물리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의 치료사도 모두 ‘안녕하세요’ 혹은 ‘요즘 날씨 참 좋죠’라는 예의상 하는 인사말 대신 ‘어제 뉴스 보셨어요?’를 건넨다. 그 뒤엔 또 이런 말도 덧붙는다. ‘요즘 뉴스가 드라마보다 더 재밌어서 치맥 시켜놓고 기다린다니까요.’

그날, JTBC에 의해 한 아줌마가 대통령의 연설문을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치고 대통령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조종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진 그 다음날, 당최 사과라고는 할 줄 모르던 대통령이 (녹화로) 사과를 했다. 자신의 순수성과 청와대 보좌진 구성의 어려움이 주요 내용이었지만 그 핵심 없는 문장들보다 더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대통령이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통령은 (이 때 속으로는 열 번도 더 울고 싶었겠지만 절대 울지 않았다) 적어 온 내용을 그저 읽고 있는 것일 뿐이었는데도 아마 자기가 사과를 하고 있음이 자존심이 상했던 건지 아니면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그 아줌마에게 미안해서였는지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청와대에서 '비선실세' 논란에 휩싸인 최순실씨에게 연설문 원고가 사전 유출된 것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청와대 제공/뉴스1

그 낯선 대통령의 인간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손바닥 뒤집듯 바뀐 언론들의 태도였다. 최순실이 대통령의 측근이긴 한 거냐며 되물었다는 한 언론사는 두 여성의 아주 오래된 인연을 입증하는 영상까지 발굴하고 나섰고, 종편들은 거국내각 구성과 책임총리제가 갖는 차이점을 세세하게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또 지상파와 종편 뉴스들에서 광화문 주말 집회에 대해 그렇게 ‘객관적인’ 보도를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긴 경찰마저 집회 참가자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고 했을 정도니. (왜 이제야 그게 이해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10년 (물론 최순실을 포함해 어떤 사람들에겐 천국이었겠지만) 세상은 암흑이었다. 조금은 나아지겠지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겠지 하며 매번 걸었던 기대는 언제나 잔인한 희망고문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불만을 털어 놓았다. 슬픔과 분노가 흘러 넘쳐 웃을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각자 암흑의 원인을 여러 가지 추측했다. ‘내가 잘못한 걸거야’, ‘우리 집이 가난해서이기 때문일 거야’, ‘그저 운이 나빴던 것 뿐이야’, ‘그 개인이 문제였네’ 하는 식으로.

우리는 잘못한 것도 없이 항상 잘못의 대가를 치르거나 혹은 거대한 암흑의 문고리만 더듬으며 그런 암흑이 무엇 때문인지 '소설‘만 쓸 뿐이었다. 그 암흑의 배후에 이렇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3류 게이트가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사람들이 그 암흑 속을 넘어지며 부딪치며 걷고 있을 때, 적어도 언론만은 바늘로 그 암막에 구멍을 뚫어 아주 가느다란 빛을 계속해서 쫓았어야 했다. 이 사회에 그토록 많은 언론사들과 언론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암흑 속에서 빛을 추구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KBS를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은 아주 가느다란 바늘도 되지 못했다. 이 암흑 같은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리분별을 못하게 만드는 가스등일 뿐이었다. 물론 몇몇 독립 언론과 양심 때문에 직장을 잃은 동료 언론인들이 암흑을 비추려 부단히 애써왔긴 하지만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번 게이트를 전후로 하루아침에 권력과 의절한 채 하고 시민들 속으로 몸을 숨기려 하는 대부분의 언론들은 바늘 대신 가스등을 쳐들고 암흑 세계의 파수꾼 노릇을 해 왔다.

▲ 10월 29일 KBS <뉴스9> ⓒKBS 화면캡처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 ‘가스등’을 보면 아내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남편이 멀쩡한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고 가는 과정이 나온다. 가스등의 불빛을 조절하고 아내의 말은 무엇 하나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아내는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를 의심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빛뿐인 세상에서 가스등은 쓸모가 없다. 어둠 속에서라야, 빛을 찾는 이들을 기만하는 가스등은 그 효과를 드러낼 수 있다. 바로 언론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지난 10년, 생존권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의 의사 표현은 대부분 불법행위로 매도됐다. 무고하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단식투쟁은 보상금을 더 타내려는 얄팍한 계산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재벌들의 탈법 행위는 문제가 아주 확실하게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저 우리들의 메모장에만 남았다. 낮은 곳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귀 기울임은 순진함으로 치부되기 일쑤였고 상처 받은 이들을 안으려는 움직임은 기계적 중립이란 ‘언론 공학적’ 수사 앞에 물 타기 되곤 했다.

무엇을 위해 가스등을 쳐들었던 걸까. 권력자의 입 속에 든 혀처럼 굴면서 얻은 건 도대체 뭘까. 정말이지 그 손익계산서를 한번 따져보고 싶다.

다시 광장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저 암막 속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믿지도 않는다. 그들은 바늘구멍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기다리는 것에 지쳐 스스로 암막을 찢어 밖으로 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거기에 없다. 그들은 작은 빛마저 가리는 뿌연 가스등 따위 깨버리고 암막 밖의 태양을 좇고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암막 밖의 태양 역시 언론이라는 사실일까. 아주 아주 뒤늦었지만 그간 힘들게 받들고 있던 가스등을 버리려고 하는 많은 언론들의 이 ‘정상적인’ 변심 뒤에 어떤 저의가 있을지 모르겠다. 각자 계산도 있을 것이고 각자 저마다의 논리와 비전도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다. 이건 우리들의 생존의 문제다. 이제 더 이상 가스등에 현혹될 사람들은 없다.

▲ '비선 실세 국정 농단' 의혹의 중심에 있는 최순실(60ㆍ최서원으로 개명)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3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출석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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