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PD의 고백 ②] ‘자괴감’, 연약함 그리고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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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PD의 고백 ②] MBC 모 PD의 고백

1. ‘자괴감’

이제 겨울인 듯싶다.

2012년의 큰 파업이 끝난 후 벌써 다섯 번째 겨울이다. 그리고 이제 곧 다시 봄이 올 것이다.

얼마 전 백만 명이 모였다는 그 광화문 광장에 나도 있었다. 그날은 방송사에서 프로그램 만드는 PD가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서다. 아무도 내가 그들이 ‘엠빙신’이라고 비난하는 그 회사 밥을 먹는 PD인 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혹시 MBC 중계차가 어디에 와 있는지 광장 이곳저곳을 계속 살펴보았다. 그러나 없었다. 어쩌면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진다. 우리 회사 보도국 어느 기자는 아예 마이크에서 MBC 로고를 뗀 상태로 촛불시위 리포트를 진행했다고 하니 그 현장에 MBC 중계차가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2012년 1월, 그 큰 파업이 시작된 것은 집회 현장에서 ‘MBC 기자들은 필요 없다’며 시민들이 MBC 기자들을 쫓아낸 것이 시발점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당시 MBC기자들은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싶었다. PD를 포함한 다른 직종의 MBC 대다수 구성원들 역시 ‘자괴감’에 사로잡혔고 이 ‘자괴감’은 한국 언론사에 기록될 큰 파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16년 지금, MBC의 내 동료들은 황폐해진 마음에 감히 다시 파업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 지난 2012년 총파업 당시, 5일차의 모습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백만 명이 모인 그날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 나는 광장 뒤켠 골목의 술집에서 소주 섞은 쓴 맥주를 연거푸 들이키고 있었다. 술집 한 구석에 틀어놓은 한 종편의 뉴스특보에서는 몇 십만 명이 모였느니, 1987년 6월 이후의 최대 시위대 규모라느니, 그날의 집회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채널을 MBC로 돌려보았다. 그러나 그 곳에서 보여주는 세상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그것이 지금의 MBC 경영진이 말하는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방송태도인가 보다. ‘자괴감’을 피할 도리가 없다.

2. 연약함

영화 <밀정>을 보는 내내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저건 내 얘기다, 우리 회사 얘기다. 아마도 MBC 구성원 중 많은 수는 이와 비슷한 심정에 가슴 한켠이 무거웠으리라.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정출(송강호)은 한 때 친구였던 독립운동가 김장옥(박희순)에게 말한다. “넌 이 나라가 독립이 될 거 같냐? 어차피 기울어진 배야.”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번의 <밀정> 만큼은 인간 세상의 복잡다단한 이치들을 조금이나마 드러내는 데 성공한, 그의 영화들 중에서는 가장 윗자리에 놓일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실존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영화 속 이정출은 복잡한 인물이다. 아니 복잡해서 차라리 현실적인 인물이다. 우리 주변에 영웅은 흔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영화 <밀정>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이야기였으리라.

최근 박근혜와 그 주변에 관한 추잡한 이야기를 일일이 여기서 다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이 사태의 핵심은 공적인 권력을 위임받은 자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그 권력을 이용한 것일 터다. 그 죄명이 뇌물수수이든 뭐든 간에 마찬가지다. MBC나 KBS 같은 공적 자산인 방송사를 ‘사적인 출세도구 내지는 비즈니스의 수단’으로 삼아온 저 몇 년간의 지질한 인간 군상들의 행태와, 박근혜의 모습은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지 않은가? 영웅은 드물며, 그보다 훨씬 많은 정의롭지 못한 인간들의 지질한 행태는 역시 인간의 연약함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 26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제5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뉴시스

3. 다짐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대답은 명확하다. 공적인 도구로서의 방송사를 사적인 출세도구 혹은 비즈니스 추구의 수단으로 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재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청와대 홍보수석이 공영방송 보도국장에게 전화 걸어서 “한 번만 봐주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공영방송 대주주인 방문진 이사장이 야당 인사를 향해 “그 사람은 공산주의자야”라는 발언을 하고도, 또 그 발언의 죄값으로 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 받고도 최종심까지 가보자고 우기면서 이사장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현재의 시스템을 갈아엎어야 한다.

국가정보원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리포트한 기자가 비제작부서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지는 이 요지경 같은 제도를 박살내야 한다. <PD수첩>이라는 훌륭한 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아이템은 안 될 거야’라고 스스로 자조하는 PD들을 탓할 수만은 없으되, 도무지 이래서야 시청자의 신뢰와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를 바꾸어 내는 이 찬란한 일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87년 6월 항쟁이라는, 피로 물든 희생 위에 지금만큼의 ‘제도’라도 어렵게 얻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광장의 저 수많은 촛불들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새 판을 짜라고. 좀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내라고.

나부터 분발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겨울밤이다. 봄은 다시 올 것이다.

※이 기고는 필자의 요청에 의해 익명으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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