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PD의 고백 ③] 우리의 무기력은 침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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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PD의 고백 ③] 우리의 무기력은 침묵으로 이어졌다
[어느 PD의 고백 ③] 문지혜 KBS PD의 고백
  • 문지혜 KBS PD
  • 승인 2016.11.30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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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늘 조용했다. 2011년 입사 후 한 차례의 파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랬다. 바깥에서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KBS PD 사회만큼은 세상과 동떨어진 견고한 성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듯 했다. “위기다”, “비상경영체제다” 하는 지긋지긋한 말들 속에서 PD들은 누가 보든 안 보든 정해진 프로그램을 만들어냈고, 제작비만 계속해서 줄여대는 환경 아래 누군가는 그만큼 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그 공백을 열정 페이로 꾸역꾸역 채워 넣었다. 그러면 위기가 극복되기라도 하는 것 마냥 다들 그렇게 조용히 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잊지 않은 단어 하나가 있었다. ‘일상투쟁.’ 아이템 선정부터, 큰 틀의 구성, 컷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내외부의 압력에 맞서며, 시사·교양 PD가 해야 할 일을 하자며 각자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거대 담론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그런 프로대로, 일상의 문제들에 천착해 사소한 것 하나라도 사회에 의미 있는 울림을 주는 프로그램은 또 그런 프로대로 시사·교양 PD로 존재의미를 실현하자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가끔 이런 의문이 꿈틀거렸다. KBS PD 사회에 애초 생각했던 일상투쟁이 가능한 프로그램이 있기는 한 걸까. 세월호 사태, 故 백남기 농민 사건 같은 한국사회에 뼈아픈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달려들어 프로그램으로 잘못된 것들과 싸우지 못하는 시간들을 겪으면서 월급쟁이 이외에 시사·교양 PD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지워왔는지도 모르겠다.

▲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공정방송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을 담은 KBS <파노라마 -‘고개숙인 언론’ >의 한 장면. ⓒKBS

한국 사회를 뒤흔들 굵직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걸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얘기하면, “어머, 우리는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야“라며 손사래 치는 장면을 꽤나 목격해왔다. 프로그램 정체성으로도 설득이 안 되는 상황에서 간부들은 “아이템이 안 돼”라는 게이트 키핑 매뉴얼로 간단히 대응했다. 이것이 그나마 남아있는 KBS 시사프로그램이란 곳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상이었다. 어느덧 ‘불허(不許)한다’는 말은 PD사회에서 매우 친숙한 문장이 되어 있었다.

‘그런 프로그램’들은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얘기해야 하고, 누가 만들어야 하는 걸까. 사내 PD들이 정말 능력이 부족해 안 되는 아이템만 주야장천 들이밀고 있는 걸까 자괴감도 들었다. 타 방송사 PD들은 잘만 만드는 ‘그런 프로’들을 말이다. 자그마한 권력의 입김에도 바람보다 더 빨리, 더 먼저 누워 ‘불허(不許)한다’만 반복하는 간부들 틈에서, ‘일상투쟁’이란 결국 큰 기둥은 건드리지 못한 채 늘 소소한 가지치기만 하는 너무나 공허하고 무력한 다짐이었다.

지진이나 태풍 같은 천재지변이 날 때마다 회사는 국가 재난 방송사라며 호들갑스럽게 각종 정규·특집 프로그램들을 집중 편성했다. 기상청 중계방송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쏟아지는 편성에 멀미가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세상은 어느 자연재해 발생 못지않게 떠들썩거리고 있다. ‘하야’라는 군사정권 시절에나 들었을 법한 단어가 각종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1위 자리에 오르고, 걸음마도 못하는 아가들이 유모차에 앉아 대통령 퇴진 촛불 행렬에 동참하는 게 리얼한, 레알 세상이다.

그럼에도 회사는 여전히 조용하다. KBS PD 사회의 침묵이 아직까지 시민들에겐 분노라는 생각에 집회현장에서 시민들이 회사 취재 차량에 손수 새겨준 ‘니들도 공범’이란 그래피티가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미움도 일말의 기대와 애정이 있을 때나 가능한 거니까. 최순실 국정논단, 헌정 유린 사태를 계기로 KBS PD협회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지금껏 스스로 가둬놨던 의문과 분노를 공유할 장들이 마련되는 것은 오히려 곪아가는 KBS PD사회에 하나의 희망이다. 우리의 침묵이 시민들의 냉정한 무관심으로 돌아오기 전에 혼자서 매 순간 싸워야 하는 무력한 일상투쟁에서 벗어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좀 더 다른 대안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좀 더 떠들썩하게 말이다.

▲ 우리의 침묵이 시민들의 냉정한 무관심으로 돌아오기 전에 혼자서 매 순간 싸워야 하는 무력한 일상투쟁에서 벗어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좀 더 다른 대안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사진은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4차 촛불집회' 모습.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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