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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짝이 내게로 온 날 22]

▲ 국악뮤지컬 <한네의 승천> 포스터 ⓒ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내 친구 박순천은 지리산 가까이 전라북도 남원에서 사는 소리꾼이다. 학창시절에는 여성 정치인 박순천 여사와 이름이 같아서 이름 부를 때마다 과목 선생님으로부터 과한(?) 이름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박순천을 기억하게 되었다. 순천과 내가 동창에서 친구가 된 것은 83학번으로 같은 대학에 입학해, 탈춤반 동아리에서 다시 만나면서 부터다. 줄곧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대학생활의 많은 시간을 대학신문사에서 보낸 나는, 학생회관 건물의 5층 동아리방을 취재삼아 기웃거리곤 했는데 특히 탈춤반과 노래패가 끌렸다. 순천은 탈춤반 ‘쌀패’에서 ‘한네의 승천’ 중 사랑가를 부르고 있었다.

 

(굿거리)

사랑을 얻었네 하늘같이 큰 사랑

선녀님같이 울 엄니같이 크나 큰 사랑

나는 얻었네

해가 가고 달이 가도 내 사랑 위해

죽기라도 하겠네 사랑을 얻었네

(중모리)

무서워요 두려워요

이 행복이 부서질 것 같아 사라질 것 같아요

내 맘엔 사랑이 깃들 수가 없나요

꼭 붙들어야죠 달아나지 않도록

내 마음에 깃든 이 큰 사랑

무서워요 두려워요 이 큰 행복이

(자진모리)

손에 손을 맞잡고 기운을 차려야지

험준한 황토도 옥토로 갈아

울엄니 얼굴 같은 꽃을 피우자

자!

손에 손을 맞잡고 기운을 차리자 아!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을 얻었네

선녀담서 얻은 사랑 무지개빛 사랑

물처럼 맑게 꽃처럼 곱게

하늘 같이 큰 사랑 바다 같이 넓은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을 얻었네

(김영동 글 곡/ 한네의 이별 중 사랑가 가사)

 

 

반달눈의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순천이가 노래를 부르다 두 팔을 벌려 반갑게 맞아주었다. 얼결에 노래 한곡 배우게 되었다. 거기서 김영동을 만났었다. 그날로 김영동 테이프를 사서 ‘늘어지도록’ 들었다.

순천이는 탈춤반 선후배들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 학교 근처는 방값이 비쌌기 때문에 학교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동쪽 끝 마을 영등리 2층집을 구해서 다락방에서 순천이가 살고, 주인집 옆 켠에 한의대에 다니던 K선배와 L선배가 함께 지냈다. 81학번 K선배는 방위를 마치고 복학해서 82학번이던 L선배와 동급생이었다. 뒤로 또 다른 방에서는 미술전공의 82학번 C선배가 살았다. 가끔 순천이는 30분을 걸어서 내 하숙방에 찾아 왔는데, 밤이 늦어지면 자고 가기도 했다. 어느 때는 내가 30분을 걸어서 순천이네 자취방에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특별한 손님’이 왔다고 한 지붕 네 가족의 선후배가 모여 밥을 먹기로 했다. 적당한 그릇이 없어서 빨간 바가지에 밥과 열무김치, 고추장을 넣어 쓱쓱 비벼먹었다. 나까지 다섯 명이 몇 번 숟가락질을 하고 나면 바가지의 홈에 걸려서 ‘드르륵’ 소리가 나곤 했다. 다섯 개의 숟가락이 바가지를 긁을 때 마다 드르륵 거리는 게 재밌어서 누군가 웃기 시작했다. 한번 터진 웃음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누구랄 것 없이 웃었다. 입에서 밥알이 튀어 나왔으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빈 바가지를 두드리며 L선배가 각설이 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따라 부르며 앞마당에서 한바탕 놀이판이 펼쳐졌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왔네

어허 이놈이 이래도 정승판서 자제로

팔도감사 마다고 돈 한푼에 팔려서

각설이로만 나섰네

절씨구씨구 잘한다

품바하고 잘한다

(구전 민요 각설이타령)

 

군 입대를 앞둔 84학번 후배가 2층집을 찾았다. 입대하는 후배를 위해 추어탕을 끓여야 한다며 2층집 식구들이 양동이를 들고 논으로 나섰다. 마침 비가 온 후라 논둑에 논물이 그득했고 고랑에는 제법 많은 물이 들락거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미꾸라지는 보이지 않고 그러는 사이 시간은 훌쩍 지났다. 고작 미꾸라지 두어 마리가 팔딱거리는 양동이를 들고 돌아와서 추어탕을 어찌 끓였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또다시 빨간 바가지에 밥과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었을지도 모른다. 달리 먹을 것도 없고 근처에 식당도 없던 동네였으며 설령 식당이 있더라도 밥 한 끼 사먹을 용돈조차 부족하기만 하던 가난한 대학생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순천이는 휴학을 했고 그렇게 나와 순천이는 한동안 만날 수 없었다. 훗날 들으니 박순천은 복학하여 대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아침에 자취방에서 눈을 뜨면서 “아, 나는 판소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연히 들어 그날로 익산 문화원에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화패에서 활동하며 학생운동과 6월 항쟁을 이끌다가 남원 강도근 명창으로부터 제대로 소리를 익혔다. 강도근 선생으로부터 흥보가, 심청가, 춘향가, 적벽가, 수궁가를 사사하고, 현재 스승인 남해성 선생을 만나 수궁가, 심청가를 사사했다.

최근,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소극장에서 소리꾼 박순천 수궁가 두 번째 완창 발표회가 있었다. 기쁜 맘으로 발표회장을 찾았다. 박순천은 크고 작은 행사에 소리로 흥을 돋우어 준 재능기부의 천사로 알려져 있다. 문화판에서 그에게 소리 빚 없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탄탄한 인맥을 쌓은 사람으로 성장했다. 늦게 소리 공부를 시작한 그를 위해 근심 없이 소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박순천 명창을 후원하는 ‘국악사랑 박순천과 동행’(회장 김경선 전 순창군 부군수)이 발족하였을 뿐 아니라, 무려 백여 명이 참가해서 응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니, 인간 박순천이 살아온 과거와 소리꾼 박순천의 미래를 동시에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중요무형문화제 제5호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인 남해성 명창은 제자 박순천에 대해 ‘감정표현이 풍부하며 정확한 박자감으로 내가 가르치는 소리를 가장 나처럼 소화해서 표현할 줄 아는 소중한 제자’라고 아낌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발표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이크가 문제를 일으켰으나, 박순천은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거추장스럽다며 마이크를 떼어버리고 육성으로 소리를 이어갔다. 역시 내 친구답다.

소리는 무르익어 범피중류 부분에 이르렀다. 별주부鼈主簿가 토끼를 꼬여내어 등에 업고서 수궁을 향해 바다에 들어가는 장면을 진양조로 노래한 것이다.

 

범피중류 둥덩둥덩 떠나간다.

망망헌 창해이며 탕탕한 물결이로구나.

백빈주 갈매기는 홍요안으로 날아들고 삼상의 기러기난 한수로 돌아든다. 유량한 남은 소리 어적이었마는, 곡종인불견에 수봉만 푸르렀다. 애내성중 만고수는 난로 두고 이름인가?

장사를 지나가니 가태부는 간곳이 없고 멱라수를 바라보니 굴삼려 어복충혼 무양도 하다든가.

(수궁가 중 범피중류 일부)

 

“가사가 도망갈까 봐 긴장했다.”는 소감이 무색할 정도로 관객들을 쥐락펴락 웃고 울리며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필리핀에서 온 관객은 “많은 문화 공연을 접했지만, 판소리가 이렇게 위대한 문화인 줄 몰랐다.”면서 박순천 판소리 완창에 갈채를 보냈고 70평생 처음 판소리 공연장을 찾았다는 할머니도 소리의 매력에 흠뻑 젖어 들었다.

박순천 명창은 엇중모리장단에 맞추어 뒤풀이를 부른 후 “더질더질~”로 소리를 맺었다. ‘더질더질’은 ‘어질더질’의 다른 말로 판소리 공연의 뒤풀이에 나오는 끝말이다. 영어자막 ‘The End'와 같다고 이해하면 될까. 더질더질은 판소리 완창 자만이 할 수 있는 맺음이다. 완창한 번 못한다면 더질더질은 평생 써 볼 수 없는 표현이다. 더질더질! 이 얼마나 귀한 표현인가. 소리꾼 친구 덕에 판소리 완창 감상하고 귀가 번쩍 틔였다. 진정한 소리꾼 하나 얻은 기쁨이 크고 그가 내 친구여서 더 자랑스럽다.

우리 모두, 해마다 일 년을 마무리할 때마다, 혹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더질더질’ 맺음 할 수 있도록 더 열정적이고 완숙한 무대로 꾸려가 보자고 격려하고픈 세모歲暮다. 더질더질~.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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