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PD의 고백 ⑤] 비겁했거나 겨우 비겁함을 면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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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PD의 고백 ⑤] 비겁했거나 겨우 비겁함을 면했거나
[어느 PD의 고백 ⑤] 황성준 SBS PD의 고백
  • 황성준 SBS PD
  • 승인 2016.12.09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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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여름, SBS 4부작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 마지막 편 방송을 준비하고 있던 편집실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방송의 말미 몇 커트에 촛불집회 장면을 넣느냐 마느냐에 대한 담당PD와 책임프로듀서인 부장PD와의 의견충돌이었다. 책임프로듀서는 종교다큐멘터리와 광우병 촛불집회의 상관관계가 그리 크지 않으니, 풀샷은 몰라도 ‘이명박 OUT'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시민들을 클로즈업한 장면만은 방송에 내보내지 말자는 입장이었고, 담당PD는 <신의 길 인간의 길>의 주제가 넓게 보면 결국 사람들 사이의 소통에 관한 것이므로, 정부의 일방적인 미국산 소고기 수입 협상에 반대하는 촛불집회로 방송이 마무리 되는 것이 맞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입사한지 만 2년도 안된 조연출이었던 필자는 눈만 껌뻑껌뻑 거리며 선배들의 날선 대화들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16년 11월, 사상초유의 국정농단사태에 '박근혜 OUT'을 외치는 촛불들로 광화문이 다시 가득 찼고, 그 눈 껌뻑이던 조연출은 <영재발굴단>의 연출자가 되어 편집실에서 8년 전과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역사영재가 작금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나머지 자신만의 이상국가(理想國家)를 세우며 직접 만든 헌법을 낭송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 사이사이에 촛불집회 그림을 삽입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8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윗분’들의 입장이었다. 담당PD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11월 30일 <영재발굴단>에서는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시민들의 모습과 촛불집회 장면들이 그 어떤 압력(?) 없이 방송되었다. 방송쟁이로서, 지상파 시사교양PD로서 현 시국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것 같아 보람이 있었고, 8년 전과는 다른 회사 분위기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SBS <영재발굴단> 11월 30일 방송 ⓒSBS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시골 학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반장 엄석대가 무너지던 장면을 떠올려 보자. 공고해 보이던 엄석대 왕국이 해체되고 담임선생님의 주도로 공개재판이 열리자, 지금껏 침묵했던 같은 반 아이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뒤늦게 소년 권력자가 저지른 부당한 행위들을 고자질하는 그 장면 말이다. 촛불집회 장면 하나 방송에 넣었다고 잠시나마 정의로운 언론인이 된 줄 알았던 필자의 모습이 꼭 그 아이들 갔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많은 SBS의 동료들이 요즘 이와 같은 부끄러움과 씁쓸한 패배감을 맛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난 8년간 SBS는 4대강 사태, 국정원 대선개입, 세월호 사건 등 굵직한 현장들 속에서 비겁함을 겨우 면하는 취재와 보도만을 해왔다. ‘그나마 SBS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칭찬인지 위로인지 쓴 소리인지 모를 말들을 들으며 겨우 지켜왔던 자존심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에서 맹활약하는 일부 언론사들을 지켜보며 빠르게 무너져 갔다. 그리고 그 무너진 자리는 지난 8년 간 누적된 지상파 방송 언론의 무기력함이 시린 아픔으로 변해 채워지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뿌리 깊은 전근대성이 가장 추악하고 적나라한 형태로 드러난 권력형 비리다. 비판의 기능을 상실한 언론도 이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의 부역자로 다음 세기의 역사교과서에 기록되지 않으려면, 국정조사와 특검, 탄핵소추안 표결 등이 시작되는 이 번 주부터가 또 다른 운명의 변곡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졌다. 어두운 광장을 밝히는 촛불처럼 빛나게 날을 세우고 있어야 하는 계절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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