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 오래도록 타오르는 촛불을 위한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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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스미는』을 읽고

▲ 집회가 축제가 되고 사람들이 집회 나오는 것을 멋지고 재밌는 일로 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광장 밖의 삶 또한 중요하다. 더 오래, 더 길게 승리하기 위해서. 우선 『천천히 스미는』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 봄날의 책

촛불집회가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처음 2만 명으로 시작한 촛불집회는 국회 탄핵 가결 직전 전국 235만 명까지 모였다. 탄핵이 가결된 뒤에는 그보다는 적은 숫자가 모이지만, 사실 백만이라는 숫자에 압도당해서 그렇지 12월 17일 8차 집회 때 광화문광장에 모인 인원 60만 명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던 그 역사적인 워싱턴 행진의 참여 인원이 30만 명이었다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60만 명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촛불집회의 참가 인원은 갈수록 줄어들 수도 있다. 대규모 거리 시위의 참여 인원이 꾸준히 유지되기는 너무나 어렵다. 특별한 계기나 상황이 없다면, 앞으로 한두 번은 일시적으로 참여 인원이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참여 인원 숫자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전에 박근혜가 스스로 퇴진하지는 않을 거 같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결정을 언제 내릴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힘을 집중할 시기와 장기전을 준비해야할 시기를 전략적으로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과연 지금이 힘을 집중할 시기인지, 아니면 장기전을 생각하고 준비해야할 시기인지에 대한 판단이 활동가로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힘을 집중할 시기를 놓친다면 잘 오지 않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다가는 장기전을 대비해야 할 때 에너지와 역량을 모두 쏟아 부어 소진하고 결과적으로 장기전에서 써 먹을 수 있는 전략이나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잃게 되는 경우도 피해야 한다. 장기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투쟁만큼이나 일상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 운동은 내가 생각하기에 투쟁할 때 목소리 높이는 건 잘해도, 장기전이 필요할 때 투쟁 에너지의 원천인 일상을 잘 챙기는 것에는 서툴다.

영미 작가들이 쓴 산문들 모아놓은 책 『천천히 스미는』은 일상, 삶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의 삶은 다채롭다. 자연을 찬미하고,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며, 날마다 겪는 별 볼일 없는 경험들과 어쩌다 겪는 유별난 이야기들 모두 우리 삶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일상이다. 물론 이러한 일상적인 삶에는 당연하게도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정치적인 목소리도 포함된다. 『천천히 스미는』은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엘, 찰스 디킨스 등이 쓴 일종의 생활글을 모았다. 한편 한편이 담백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고, 무엇보다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서사들을 담고 있다. 격정적이면서도 담담하고 열정적이면서도 차분한 글을, 소박하면서도 치열한 삶의 고민들을 만날 수 있다.

내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글은 조지 오웰이 쓴 「두꺼비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다. 조지 오웰은 봄의 아름다움을 두꺼비를 통해 묘사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쓸 때, 즉 비정치적이라 여겨지는 글을 쓸 때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연을 언급하기만 해도 감상적이라는 비판 편지를 받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족쇄에 묶여 신음하는 상황에서 “노래하는 검은 새나 노랗게 물든 시월의 느릅나무처럼 돈 한 푼 들지 않을뿐더러 좌파 신문 편집장들이 계급적 관점이라 부를 만한 게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비난받을 일이냐고 조지 오웰은 반문한다. 이러한 태도들에 대해 조지 오월의 생각은 분명해 보인다. “분명 우리는 현실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어려운 상황을 최대한 즐기려고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실제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즐거움을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대체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돌아오는 봄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노동이 절감된 유토피아에서 행복할 이유가 있을까?”

사회변화는 지난한 과정이다. 역사책에는 혁명의 한 순간만 혹은 가장 눈부신 순간들만 나오지만, 실제로 하나의 사건이나 캠페인만으로는 혁명은커녕 조그만 변화도 이뤄내기 어렵다. 지난한 과정 동안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설익은 용기만으로 무턱대고 달려 나가다가 고꾸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사회의 변화는 기나긴 과정을 견디며 꾸준히 싸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기나긴 장기 레이스에서 지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사람들의 분노는 참 소중한 에너지이지만 그것은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 강력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쓰는 것은 사회 운동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장기전에서 우리가 반드시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일상적인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다. 조지 오웰의 말처럼, 그 어떤 독재 정권도 봄이 오는 것을 막지 못하며 봄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유토피아가 온다 한들 온전하게 자유롭기도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일상적인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망각하고 심지어 일상의 즐거움이나 아름다움을 영위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토록 엄중한 시국을 이야기하며 일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정치적인 관점이 없는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경우도 있다.

지금 시국에서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 더 강력한 힘을 집중해야하는지 아니면 장기전을 대비해 힘을 비축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우리가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내팽개친다면, 우리는 이 지난한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집회가 축제가 되고 사람들이 집회 나오는 것을 멋지고 재밌는 일로 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광장 밖의 삶 또한 중요하다. 더 오래, 더 길게 승리하기 위해서. 우선 『천천히 스미는』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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