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와 미국 수정헌법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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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정국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생각한다

▲ 하지만, 이 말이 성립하려면 거짓과 위선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며 기득권을 누려 온 인물들을 먼저 처벌하고 상식과 신뢰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 뉴시스

2002년, 월드컵으로 붉은악마의 물결이 광장을 뒤덮을 때 효순이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린 여학생을 죽여놓고 책임지지 않는 미군 당국의 태도는 격렬한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이 무렵, MBC의 미국 시리즈 10부작이 한창 촬영 중이었다. 2001년의 9·11 테러 이후 미국을 제대로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문제의식이 MBC 교양국 내에 존재했다. 반미, 친미를 떠나 미국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취지로 기획된 이 시리즈는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계기로 더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았고, <MBC스페셜>의 역사 한 켠을 장식할 만한 의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남았다.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영원한 우방이자 은인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분단과 동족상잔의 원흉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미국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었다. 제작팀은 정치적 편향을 최대한 배제하고 구체적으로 미국을 보여줄 수 있는 10개의 화두를 정한 뒤 취재에 나섰다. 김환균 PD는 자유의 여신, 김상균 PD는 군산복합체, 장덕수 PD는 총기소유의 자유, 김철진 PD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민운기 PD는 헐리우드의 작동원리 등을 맡았고, 정연주 선배(당시 미국 워싱턴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셔서 한겨레 논설위원으로 계셨다)가 아이템 선정과 취재 방향에 대해 자문해 주셨다.

 

나는 첫 회 ‘9·11 그 후 1년’에 이어 ‘수정헌법1조’ 두 편을 방송했다. 첫 회는 9·11 이후 변화한 미국의 분위기, 테러리스트를 색출하기 위해 논의되던 ‘USA Patriot법’ -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시민에 대한 수사기관의 이메일 감청 허용 - 문제, 그리고 아랍계 미국인에 대한 마녀사냥을 주로 다뤘다. 개인적으로는 ‘수정헌법1조’ 편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특종’이라 할 만한 건 없었지만, 미국 사회에서 상식으로 여겨지는 표현의 자유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돼 왔기 때문에 이 아이템이 꽤 큰 반향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연방대법원의 몇 가지 판례를 통해 수정헌법1조가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보장하는지 알아보았는데, 국가보안법과 레드컴플렉스가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짓밟아 온 한국에서 이 수정헌법1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나 자신 궁금하기도 했다.

 

당시 취재한 케이스 중 특히 세 개의 연방대법원 판결이 인상적이었다. 그레고리 존슨의 성조기 소각사건, 시카고 인근 스코키의 나치 시위 사건, 포르노 잡지 허슬러 사장인 래리 플린트 사건인데, 한국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질 경우 일반 시민 여론과 법원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상상하게 만드는 재미있는 사건들이었다.

 

먼저, 성조기 소각사건. 1982년, 강원대 학생 2명이 성조기를 불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학살의 배후도 미국이요, 전두환 군부독재의 배후도 미국임을 알리려는 몸부림이었다. 두 학생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1984년, 그레고리 존슨이라는 미국의 모택동주의자가 공화당 전당대회장 밖에서 성조기를 불 지르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인들은 격노했고 텍사스 주법원은 유죄를 선고했다. 이 분위기에 편승해 공화당 의원들은 ‘성조기 모독죄’를 신설하려 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성조기를 불 지른 것은 남에게 물리적 상해를 끼치지 않았고 미국 체제를 위협한 것도 아닌, 단순한 ‘상징적 표현’이라는 게 무죄 이유였다.

 

“화난다는 이유로 사람을 처벌하면 되는가”

 

당시 미국에서 이 케이스를 취재하던 중 저명한 법철학자인 마이클 헤이만 교수를 인터뷰했다. 이 분은 법학자이지만,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고 토마스 울프의 소설을 좋아하는 멋진 분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이 대조적인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껄껄 웃었다. 답변 요지는 간단했다. “화나게 하려고 성조기를 불 지른 것 아닌가? 자기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화를 안 낸다면 뭐 하러 불 질렀겠는가? 그러나 화난다는 이유로 사람을 처벌하면 안 되는 것이다.”

 

브레넌 연방대법원 판사의 판결 취지문은 감동이었다. “성조기를 불태웠다고 처벌한다면, 성조기가 상징하는 미국의 표현의 자유가 훼손될 것이다.” 다큐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성조기를 클로즈업하고, 이 멘트를 자막으로 넣을 때 짜릿한 감동이 몰려 온 게 기억난다. 미국이란 나라가 도덕적, 철학적으로 형편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수정헌법1조가 있고 이를 수호하는 연방대법원의 양심이 살아 있는 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허약하지 않았다.

 

또 하나, 미국 나치들이 유태인 마을 스코키에서 위협적인 시위를 벌인 사건. 1977년 시카고 근교의 스코키 마을 앞에서 미국 나치들이 시위를 벌이겠다고 발표하자 스코키 주민들은 나치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조치를 법원에 요구했다. 일리노이 지방법원은 “스코키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 네오나치의 집회를 금지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네오나치는 즉각 연방대법원에 항소했다. 미국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이 재판에서, 연방대법원은 1978년 1월 27일 ‘네오나치 승소’라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나치 마크를 앞세운 시위는 상징적 발언으로, 수정헌법 1조가 보호하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사전 제약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놀라운 일은, 이 때 미국 나치의 변론을 맡은 ACLU(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우리나라로 치면 민변 쯤 될까?)의 변호사가 유태인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우리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면, 우리가 소수가 됐을 때 똑같은 일을 당할 것”이라며 나치 변론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미국의 지식인, 종교인, 인권운동가를 비롯한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나치 시위가 벌어진 스코키에 모여 반나치즘 시위로 대응한 것이다. 기가 죽은 네오나치는 다시는 스코키에 들어오지 못했다. 연방대법원이 나치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자, 더 많은 시민이 나치의 광풍에 대해 더 강력한 표현의 자유로 맞선 것이다. 나치의 광풍을 잠재우고 시민 사회를 지켜낸 양심과 상식의 통쾌한 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사례로 도색잡지 <허슬러> 대표인 래리 플린트가 떠오른다. 그는 영화 <래리 플린트>로 잘 알려진 인물로, <허슬러>에 실린 캄파리 광고에서 미국 기독교 지도자 제리 폴웰이 “자기 어머니와 X했다”고 장난을 친 뒤 광고 하단에 작은 글씨로 “패러디일 뿐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이라고 써 넣었다. 고매한 미국인들은 격분했고, 제리 폴웰 목사는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하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은 “공직자나 영향력 있는 인물에 대한 풍자는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래리 플린트는 포르노에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성행위 장면을 넣었다가 극우 백인단체의 테러를 당하기도 했지만, 연방대법원은 결국 그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해 주었다.

 

인터뷰에서 래리 플린트가 남긴 한 마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수정헌법1조는 저 같은 잡놈도 보호해 주지요. 따라서 모든 사람이 수정헌법1조의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당시 인터뷰한 사람들은 아마도 미국에서 제일 유쾌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예외 없이 수정헌법1조를 자랑스러워했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 국가보안법과 레드컴플렉스로 평범한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민주화 이후에도 걸핏하면 ‘종북’ 딱지를 붙이며 윽박지르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숨통을 조이는 한국, 심지어 방송사 안에서 거슬리는 말을 한다는 이유로 기자 · PD들을 징계 · 해고하는 이 나라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부럽기 짝이 없는 미국의 민주주의였다.

 

표현의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수정헌법1조는 1791년, 기존의 미국헌법을 보완하기 위해 추가된 조항으로, “의회는 종교 · 언론 · 출판 · 집회 · 탄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미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하지만, 수정헌법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언제나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역사의 경험이 웅변하고 있다. 1950년대 메카시 광풍이 미국을 휩쓸었을 때 수정헌법1조는 실종된 바 있고, 바로 지금, 대통령 당선자 트럼프는 “성조기를 모욕하면 시민권을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표현의 자유는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지켜야 할 가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정헌법1조를 무조건 한국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약자에 대한 조롱과 혐오표현을 무제한 방치하는 것은 위험하다. 5·18 희생자들을 홍어에 비유하거나, 단식중인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 시위를 벌인 일베와 극우들의 패륜 행위에 대해서는 적절한 규제가 필요해 보인다.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을 모욕하다가 테러를 당했는데, 테러는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지만, 글로벌 차원의 약자인 이슬람을 모욕한 샤를 리가 잘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가 전세계 시위 현장에 메아리쳤는데, 나는 차마 그 구호를 외칠 수 없었다. 국가보안법과 레드컴플렉스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우리나라의 경우, 나치를 찬양하거나 나치 희생자를 모욕하면 처벌하도록 한 유럽의 사례가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박근혜 탄핵 여부를 놓고 온 국민의 시선이 헌법재판소에 쏠려있다. 대다수 국민들이 당연하게 요구하는 탄핵이지만, 혹시 헌재가 엉뚱한 짓을 하지 않을까 안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6월항쟁 이후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하지만,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서 통합진보당 해산 등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판결로 불신을 자초해 온 죄과가 있다. 정치 성향을 떠나 상식과 양심에 따라 미국 민주주의를 수호해 왔고 바로 그 때문에 미국인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연방대법원을 보고 배우기 바란다.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이 더 중요하며, 그들을 판단할 기준은 그들이 행동하고 실천해 온 역사 아닐까. 볼떼르의 모토, “나는 당신과 의견이 다르다. 하지만 당신의 견해가 억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성립하려면 거짓과 위선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며 기득권을 누려 온 인물들을 먼저 처벌하고 상식과 신뢰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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