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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는 일본 군가풍의 이 노래들을 직접 만들고 권력을 이용하여 이 노래들을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서울음대 피아노과 출신인 둘째 딸 근령이가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도와주었다. 박정희가 신중현을 ‘라이벌’로 점찍었기 때문에 더욱 잔인하게 짓밟았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 뉴시스

록밴드와 사물, 단소, 대금이 한바탕 어우러진 뒤 전인권이 말했다. “세월호의 마음과 함께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강산>의 후반부가 이어졌다.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 훗날에 너와 나 살고지고, 영원한 이곳에 우리의 새 꿈을 만들어 보고파. 봄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온다네, 아름다운 강산! 너의 마음은 나의 마음,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

 

지난 12월 31일, 촛불집회가 절정에 이른 순간이었다. 이 노래는 광장의 시민들에게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시민들은 아름다운 나라를 스스로 만드는 역사의 현장에 동참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공유했다. 1972년 독재의 어둠에서 태어나 45년만에 찬란하게 부활한 이 노래의 생명력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1970년대, 이 땅의 젊은이들은 통기타와 포크송으로 한 줄기 낭만을 숨 쉬었다. 한대수, 송창식, 이장희, 김민기 등 재능 있는 싱어송라이터들이 젊은이의 우상이자 자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신대철의 아버지인 신중현도 그 중 한명이었다. ‘한국형 록음악의 대부’라 불린 그의 노래를 김추자와 펄시스터즈가 열창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이 볼 때 이 젊은 ‘딴따라’들은 타락과 퇴폐의 온상이었다. 경찰이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하고, 거리에서 대학생들의 통기타를 압수하여 부숴버리던 시절이었다. 요즘 문제가 된 ‘블랙리스트’가 그때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손 봐 줘야 할’ 문화예술인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1972년, 신중현의 명동 사무실로 난데없이 청와대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대통령 찬가를 지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신중현은 발표하던 곡마다 히트하고 있었고, 그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정부는 절대 권력자인 박정희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기에 그가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의 뜻에 순종할지, 반항하여 수난을 자초할지 선택하라는 으름장이기도 했다. 신중현은 후자를 택했다. “할 마음이 없다. 내 생리에도, 음악성에도 안 맞는다.” 그는 곧 박정희 정권의 보복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만든 노래가 <아름다운 강산>이다. 그는 자전 에세이 <나의 이력서 - 록의 대부 신중현>에서 당시 심경을 밝힌다. “내 음악이 결코 천하거나 경박하고 나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정권의 압력에 맞서 체제 내적 저항으로 대응한 것이다.” 그는 사무실에서 일주일간 꼬박 매달려 이 곡을 써냈다. 다른 노래들에 비해 훨씬 더 큰 정성을 쏟은 것이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가장 한국적인 선율인 5음계에 담아서 얘기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이미지로 이 강산을 예찬하고 있지만, 지금 음미해 보면 차라리 통곡과 절규를 속으로 삼키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은 이 ‘애국적’인 노래마저 곱게 봐 주지 않았다. 노랫말을 떠나, 사이키델릭한 이 노래의 음향이 박정희의 취향에 맞을 수 없었다. 신중현은 박 정권의 야수적인 탄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1974년 12월, 가요정화운동이 벌어졌고 그는 대마초 사건으로 다른 연예인들과 함께 구속됐다. 물고문을 당했고, 미친 놈 소리를 들으며 정신병원에 끌려갔다. 이듬해 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석방됐지만, 공연이 일체 금지됐고 22곡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으로 낙인찍혔다. <미인>은 저속하고 퇴폐적이란 비난을 들었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란 가사는 국민 유행어였다. 구두닦이는 “한번 닦고 두 번 닦고”, 웨이터는 “한번 나르고 두 번 나르고”로 개사해서 불렀다. 하지만 박 정권은 이 가사에서 “한번 하고 두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라는 성적 상상을 봤고, 박정희 장기집권을 비판할 의도라고 의심했다. <거짓말이야>는 창법이 저속하고 불신감을 조장한다고 했다. 가수 김추자의 몸짓이 고정간첩에게 보내는 은밀한 사인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검열 당국의 강요로 만든 군가 <뭉치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 나라 위해 뭉치자”는 가사는 박정희 정권 퇴진 요구 데모에 쓰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신중현은 폐인이다. 끝났다.” 박정희 정권의 혹독한 탄압을 목격한 지인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그의 노래로 떠들썩하던 세상은 이제 고요하기만 했다. 그는 쓰라린 현실을 피하여 노장(老莊) 사상으로 도피했다. 이태원의 카페에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독주를 들이켰다. 사람이 보기 싫어지는 날엔 하염없이 낚시로 소일했다. 박 정권의 탄압은 체제가 개인에게 가한 ‘살인 행위’였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서 “1970년대, 신중현의 음악적 라이벌은 박정희였다”는 재미있는 해석을 제시한다. 신중현은 시장을 지배했지만, 학교 · 관공서 · 미디어를 지배한 것은 박정희였다는 것이다. <나의 조국>과 <새마을 노래>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 작사, 박정희 대통령 각하 작곡, 육군합창단 노래라고 음반에 명기돼 있는데. 박정희는 일본 군가풍의 이 노래들을 직접 만들고 권력을 이용하여 이 노래들을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서울음대 피아노과 출신인 둘째 딸 근령이가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도와주었다. 박정희가 신중현을 ‘라이벌’로 점찍었기 때문에 더욱 잔인하게 짓밟았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지난 해, 친박단체들이 집회에서 이 노래를 부른 데 대해 신중현의 맏아들 신대철은 강한 불쾌감을 표한 바 있다. 박 정권이 아버지에게 가한 탄압을 생각하면 박사모의 행태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 부자가 가난뱅이를 멸시하지 않는 세상,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지 않는 세상, 마음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함께 눈물 흘리는 세상, 약자와 소수자도 충분히 존중받는 세상, 노인이 젊은이를 사랑하고 젊은이가 노인을 공경하는 세상…. 새해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강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 뉴시스

박정희가 그토록 미워한 신중현의 노래를 박사모가 열창한 것은 가깝다. <아름다운 강산>은 전두환 정권 때 복권되어 벼락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KBS의 <100분쇼>에는 거의 매회 이 노래가 등장했는데, 박사모는 이 시절 이선희가 부른 <아름다운 강산>을 애국가에 버금가는 국민가요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제목, 같은 선율이지만 신중현의 자유로운 ‘록정신’과는 거리가 먼 노래였다.

 

신중현은 “진정한 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현한다”고 했다. 그에게 록은 “험악한 인생을 거치면서 견뎌낼 수 있는 바로 그 힘”이었다. 모진 세월을 살아남아 세밑 광장을 달군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은 새해에도 시민들의 마음속에 울려 퍼질 것이다. ‘아름다운 강산’은 자연 풍광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부자가 가난뱅이를 멸시하지 않는 세상,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지 않는 세상, 마음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함께 눈물 흘리는 세상, 약자와 소수자도 충분히 존중받는 세상, 노인이 젊은이를 사랑하고 젊은이가 노인을 공경하는 세상…. 새해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강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곧 세월호 1,000일이다. 촛불처럼 강렬한 이 노래의 생명력이 이 땅에 기어이 ‘아름다운 강산’을 이뤄낼 거라고 꿈꾸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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