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②] 중세 천년, 그레고리오 성가와 음유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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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헌재의 탄핵 판결과 벚꽃 대선을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2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 르네상스 시대 : 클래식 음악의 태동
         
①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최초의 오페라를 낳다
② 중세 천년, 그레고리오 성가와 음유시인들
③ 백년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④ 마드리갈, 인간을 노래하다
⑤ 콜럼버스의 항해와 <가브리엘의 오보에>

      ② 중세 천년, 그레고리오 성가와 음유시인들

1600년, 아직 ‘클래식 음악’이란 말이 없던 시절이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물론,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 헨델도 태어나기 전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당연히 음악은 있었다. 1600년 시점에서 ‘서양음악사’를 쓴다면 무슨 얘기를 하게 될까?

음악사의 시대는 칼로 두부 썰듯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수많은 요소들이 상호작용하여 일어난 변화는 후세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선택되어 역사 속에 놓이게 된다. 르네상스의 출발점 또한 선명하게 정의하기 어렵다는 게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 이전에 약 천년에 달하는 카톨릭 교회와 봉건영주의 시대가 있었고, 그 안에서 르네상스의 씨앗들이 자라났다는 점은 분명하다.  

중세 천년, 사람들은 시대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끝자락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일 뿐, 진정한 삶은 임박한 예수 재림으로 시작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중세의 역사가 프레데가르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은 다 끝나 간다. 우리는 말세에 살고 있다.” (루시엔 젠킨스 <클래식, 고음악과의 만남>, 임선근 옮김, p.7)

중세의 위대한 문화적 성취이자 종교적 신앙의 기념탑으로 꼽히는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는 반주와 화음이 없는 단선율의 ‘평성가’(plainchant)였다. 성가는 원래 노래가 아니라 “(시편의) 가사를 소리 높여 말한다”는 뜻이었다. 악기는 가사 전달을 방해하며 신도들의 마음을 혼란케 한다 하여 교회에서 연주가 금지됐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540~604)는 이 성가를 체계화해서 보급했다. 그가 비둘기 모양의 성령으로부터 선율을 전해 듣고 받아 적었다는 얘기는 성가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꽤 느리게 불렀을 것이다. 노트르담 성당처럼 천장이 높아서 음향 전달이 늦은 고딕식 건물에는 빠른 음악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책, p.9) 약 3,000곡이 전해지는 그레고리오 성사는 미사와 모테트* 등 종교음악의 원천과 영감이 됐고, 오늘날의 카톨릭 미사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교회가 서양음악의 전통에 미친 영향은 뿌리 깊었다. 교회는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의 <음악의 원리>를 이론적 배경으로 삼아서 정교하게 다듬었고,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 991~1033)가 창안한 기보법을 개선했다. 교회 음악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기존 성가에 새로운 선율을 섞은 다성음악(organum)이 발전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이었지만 사람들은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갔다. 교회 밖에서는 다양한 세속음악을 즐겼으며, 세속음악의 발전은 본격적인 르네상스를 꽃피우기 위한 토양을 다지고 있었다. 11세기말부터 프랑스의 ‘음유시인’인 트루바두르(남부)와 트루베르(북부)가 영주의 궁정에서 사랑을 노래했다. 이들 중엔 귀족, 기사, 평민 출신은 물론 성직자 출신도 있었다. 평민들에 둘러싸여 노래하는 종글뢰르(jongleur)도 있었다. 이들은 마을의 술집이나 광장에서 마술, 곡예, 동물쇼를 보여주고 무용담과 사랑 이야기를 낭송하고 춤과 노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종글레르는 열 가지 정도의 악기를 다룰 정도로 뛰어난 예인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교회 음악보다 훨씬 더 생기있고 다채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신분보장이 안 되고 법적 보호를 못 받는 하층민이었다. 이들에 대한 귀족과 성직자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기독교의 도덕을 타락시키며 도둑질을 일삼는 퇴폐적 인물로 매도하며 영성체와 성사 참여를 금했지만, 한편으로는 후한 급료를 주며 집에 데리고 있거나 수도원의 축제에 초청하여 연주를 즐겼다. 종글레르의 노래와 춤 음악은 민중 사이에 구전됐고, 일부는 필사본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은 종글레르의 노래는 교회음악에 비해 분량이 적다. 교회는 식자층의 세계였지만, 종글레르는 대부분 문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글뢰르가 ‘마술사’, ‘어릿광대’로 다소 경멸하는 뉘앙스가 있었다면, 민스트렐(minstrel)은 ‘기능인’이란 뜻으로 종글레르를 조금 예의바르게 부르는 말이었다. 독일에서는 13세기부터 민네징어(Minnesinger), 즉 ‘사랑의 가인’이 귀부인의 사랑 이야기를 노래했다.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 1170~1220)은 바그너의 악극 파르지팔의 바탕이 된 서사시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보다 좀 더 근엄한 음악을 들려준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는 15~16세기에 나타났다. 한스 작스(Hans Sachs, 1494~1576)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통해 불멸의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며 체제에 반항한 골리아르(Goliard)도 있었다. 성지자의 길을 가기 전에 세속적인 기쁨을 최대한 누리려는 사람들, 부와 권력에 탐닉하는 성직자들의 위선에 진저리를 치며 방랑자의 길을 택한 사람들로 이뤄진 이들은, 라틴어로 시와 선율을 쓰고 생계를 위해 구걸도 했다. 이들은 유럽의 마을과 대학을 순회하면서 술, 사랑, 도박 등 불경스런 주제는 물론 남녀 간의 육욕과 환락을 거리낌없이 노래했고, 그레고리오 성가 등 종교 음악을 익살스레 개작하여 권력자와 성직자를 풍자했다. 교회는 이들을 사탄의 사자로 간주하여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교회는 끝까지 세속음악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당시 회화를 보면 교회 음악은 주로 천사들이 연주하고, 세속음악은 악마 닮은 짐승들이 연주하는 걸로 표현했다. 큰 그림의 필사본에서 종글뢰르의 연주 장면은 그림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교회나 수도원에도 근엄한 음악만 있는 건 아니었다. 13세기 초 바바리아 남부 보이에른의 수도원에서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 세속의 노래)는 술, 사랑, 도박 등 외설적이고 부도덕한 내용과 함께 세상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이 책을 은밀히 읽고 노래하며 억압된 감정과 욕구를 승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카르미나 부라나>는 1937년, 독일의 작곡가 칼 오르프가 24개의 시에 음악을 붙여서 초연한 뒤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인간의 존재와 의미를 재발견하는 르네상스가 싹트기 시작했다. 단테의 <신곡>,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모두 14세기의 산물이다. 예술에 자유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세속적인 관능을 그린 생생한 사실주의 회화가 처음 나타났다. 음악에서도 새로운 조류가 생겨났다. 필립 드 비트리(Philippe de Vitri, 1291~1361)가 1322년 발표한 음악 이론서 <아르스 노바>***는 14세기초 프랑스 음악에 나타난 박자와 기보법의 새로운 변화를 옹호했다. 그때까지 음악은 대부분 성스러운 숫자에 상응하는 3분박이었지만, 비트리는 2분박도 동등하게 인정했다. 쉼표와 당김음을 활용한 다채로운 리듬으로 좀 더 자유분방한 표현이 가능해졌고, 가사도 굳이 라틴어가 아니라 자국어를 사용하여 훨씬 더 많은 세속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요한네스 22세 등 교황청은 크게 반발했지만 <아르스 노바>, 즉 ‘신음악’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르스 노바>의 대표적 작곡가는 프랑스의 기욤 드 마쇼(Guillaumme de Machaud, 1300~1377)다. 그는 중세 음악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는 <노트르담 미사>(Messe de Notre Dame) 등 종교 음악도 썼지만 세속 음악 분야에서 더 큰 업적을 남겨 ‘최후의 음유시인’으로 불린다. 단테의 베아트리체나 페트라르카의 라우라처럼 19살 소녀 페론(Peronne)를 깊이 사랑한 그는, 3년간의 열렬한 사랑을 자전적 시집 <진실한 이야기책>(Livre du Voir dit)에 담아서 노래했다. 완벽한 성품을 지닌 고귀한 여성에 대한 사랑의 시는 프랑스 트루바두르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아르스 노바’에 걸맞는 새로운 리듬과 화성을 구사했다. 본격적인 르네상스에 앞서 ‘최초의 자유예술가’로 기록된 그의 음악혼은 15세기의 르네상스 작곡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 모테트는 ‘말’이란 뜻의 프랑스어 ‘mot’에서 유래했다. 13세기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중요한 음악 형식으로, 원래 교회 음악에서 출발했지만 사랑 노래로 확대되고 세속 선율을 흡수하면서 종교적 모테트와 세속적 모테트로 분화되었다. 

** <데카메론>은 페스트가 전유럽을 휩쓸 때, 피렌체 근교의 한 빌라에 10명의 젊은이 - 7명의 여성과 3명의 남성 - 가 피신하여 10일 동안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눈다. 10명이 10일 동안 나눈 100개의 이야기라 해서 제목이 ‘데카메론’이 됐다. 이야기판을 벌이기 위해 모인 이들은 저녁 식사 후에는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으로 하루를 마쳤는데, 당시 음악이 귀족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칸초나’는 노래하기 좋은 서정시였고, ‘발라타’는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이었다. 

*** 서울시향의 상주 작곡가 진은숙이 진행하는 현대음악 콘서트의 제목 <아르스 노바>는 여기서 따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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