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③] 백년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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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헌재의 탄핵 판결과 벚꽃 대선을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2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 르네상스 시대 : 클래식 음악의 태동
         
①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최초의 오페라를 낳다
② 중세 천년, 그레고리오 성가와 음유시인들
③ 백년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④ 마드리갈, 인간을 노래하다
⑤ 콜럼버스의 항해와 <가브리엘의 오보에>
 
         ③ 백년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14세기, 중세에 석양이 드리웠다. 십자군 원정 실패와 교황의 권력 다툼은 교회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게다가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한 페스트(1340~50)는 인간 실존의 근원에 의문을 던지게 했다. 내가 살기 위해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내버리는 생지옥에 사람들은 치를 떨며 최후의 심판을 떠올렸을 것이다. 농민반란이 연이어 터졌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1337~1453)이 일어났다. 그 시절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끔찍하게도 긴 전쟁이었다.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는 지금과 같은 민족국가 개념이 없었다. 영국 왕은 프랑스 왕의 신하였지만, 오히려 프랑스 내에 넓은 영토를 갖고 있었다. 1328년 프랑스의 샤를르 4세가 아들 없이 죽자, 그의 사촌인 필리프 6세가 일단 왕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영토 야심이 있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이의를 제기하며 왕위를 요구했고, 두 나라의 관계는 점점 험악해져 결국 전쟁에 돌입했다. 116년에 걸친 전쟁의 결과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잃고 대륙과 분리된 섬나라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오를레앙의 잔다르크가 활약하여 가까스로 승리한 프랑스는 중앙집권 국가 체제를 정비한다. 두 나라의 오랜 라이벌 의식은 이 전쟁에서 생겨났다.

백년전쟁은 자연스레 문화 교류를 낳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다투는 사이, 오늘날의 벨기에 · 네덜란드 · 북프랑스에 해당되는 부르고뉴, 플랑드르 공국이 번영을 누렸고, 이 중 부르고뉴 악파의 음악가들이 르네상스 음악을 주도하게 된다. 15세기, 막강한 세력을 이룬 부르고뉴 공작들은 디종, 브뤼헤, 브뤼셀, 캉브레 등 자신의 궁정에서 예술가들을 강력히 후원했다. 화려하고 세속적인 이벤트가 궁정에 넘쳐났고, 민스트렐은 이 취향에 맞춰 흥겨운 노래를 선사했다. 선량공 필립(Philip the Good)이 1454년 2월 릴(Lille)에서 개최한 연회의 기록을 보면,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요리사들이 거대한 파이를 날라 왔고, 파이의 뚜껑이 열리면 안에서 28명의 민스트렐이 다양한 악기를 들고 나와서 연주했다고 한다.

국제 교류도 활발했다. 공작은 음악가를 여행에 대동하여 유럽 곳곳에 음악을 전했고, 외국 음악가들의 방문도 줄을 이었다. 1420~1460년은 ‘뒤파이의 시대’라고 부른다. 뛰어난 작곡가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1397~1474)는 부르고뉴 뿐 아니라 볼로냐, 피렌체, 로마, 리용, 캉브레 등 여러 곳에서 활동했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종탑 왼쪽에는 그가 성가대원들을 지휘하던 곳이 남아 있다. 그는 유연한 리듬과 아치형의 부드러운 선율, 모든 성부가 동등한 화성을 구사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이름 중 ‘Fa’ 부분을 글자 대신 음표로 표기한 경우가 많은 걸로 보아 ‘뒤페’가 아니라 ‘뒤파이’로 발음하는 게 옳은 듯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노래가 사랑 타령인 것은, 음악과 사랑이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 아닐까. 뒤파이는 미사와 모테트 등 종교음악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랑 노래를 썼다. 그의 세속노래는 <안녕, 내사랑>(Adieu m’amour), <불쌍한 사람>(L’homme armé) 등 좌절된 사랑을 슬퍼하는 내용이 많고, 새해의 노래, 5월의 노래 등 행사 노래도 있다. 뒤파이 시대의 세속 노래를 ‘샹송’이라 불렀는데, 이 명칭은 오늘날 프랑스 ‘샹송’의 기원이 됐다.

백년전쟁의 혼란 속에서 영국의 온유한 노래 전통이 자연스레 대륙에 스며들었다. 단순하고 명료한 영국 음악은 부르고뉴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음악의 왕자’로 불린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 1390~1453)은 가장 영향력이 큰 작곡가였다. 수학자,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3도와 6도 화음을 구사한 온유하고 부드러운 선율로 부르고뉴, 플랑드르 악파를 풍요롭게 해 주었다. 영국의 무용노래에서 유래한 ‘캐럴’(carol)은 독창과 합창이 교차하는 노래 양식으로, 이 가운데 종교적인 캐럴이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캐럴’로 이어진 것이다. 영국 아카펠라 그룹인 킹스 콰이어의 노래는 당시의 창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은 이탈리아에 전해져 피렌체, 만토바, 페라라 등지에 르네상스 음악의 씨앗을 뿌렸는데, 플랑드르의 수도 브뤼헤(Brügge)에 근거를 두고 유럽을 누빈 이 음악가들을 플랑드르 악파라고 한다. 질 뱅슈아(Gille Binchois, 1400~1460)는 던스터플과 뒤파이를 직접 만나 영향을 받은 거장이다. 그는 <결혼할 소녀들> (Filles à marier), <점점 더 새로워지네>(De plus en plus) 등 궁정풍의 사랑을 노래했는데, 15세기말의 작곡가들이 그의 선율을 자주 인용한 걸로 보아 그의 영향력은 선배인 던스터블과 뒤파이를 능가한 것으로 보인다. 뒤파이의 음악이 위엄과 우아함, 명료한 형식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면 요한네스 오케겜(Johannes Ockeghem, 1410~1497)은 화려하고 수수께끼같은 기법으로 우리를 매혹시킨다. ‘황금 목소리의 사나이’란 별명으로 높은 인기를 누린 그의 손에서 르네상스 음악은 규모가 확대됐고 선율과 화성, 리듬과 구성이 한층 정교해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동료 시인과 작곡가들은 추도음악과 만가를 작곡하여 그를 애도했다. 

‘음악의 미켈란젤로’라 불린 거장 조스캥 데프레(Josquin des Prez, 1450~1521)는 일관된 방식으로 음악에 감정표현을 시도한 최초의 위대한 작곡가로 꼽힌다. “그의 음악은 우아하고 온화하며 사랑스럽고 명랑하다. 그의 음악은 마치 ‘새의 노래’처럼 자연스레 흐른다.” (민은기 등 공저, <서양음악사 1>, p.145) 훗날 루터는 “다른 작곡가들은 음표의 의지를 따르지만 조스캥은 음표들이 자기 의지를 따르게 만든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가사와 형식의 제약을 받는 미사보다 표현 방법이 자유로운 모테트를 선호했다. 모테트 <아베 마리아>(Ave Maria)와 세속 노래 <귀뚜라미>(El Grillo)는 이러한 그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4성 합창곡이다. 그는 3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고, 죽은 뒤에도 악보가 자꾸 발견되어 “조스캥은 살았을 때보다 세상을 떠난 뒤 더 많은 작품을 썼다”는 우스개가 돌기도 했다. 

그가 루이 12세의 궁정에서 일할 때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루이 12세는 그에게 특별수당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까맣게 잊어버렸다. 조스캥은 성서의 시편 119편 49절을 가사로 모테트를 작곡하여 왕에게 들려주었다. “당신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잊지 마소서. 나의 희망은 그 말씀에 있사옵니다.” 이 음악을 듣고 조스캥의 의도를 눈치 챈 루이 12세는 곧 자신의 약속을 이행했다고 한다. (같은 책 p.142) 이 시대의 노래들은 21세기 청중의 귀에는 모두 비슷하게 들리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작곡가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었다. 이 시대 거장들의 이름이 작품과 함께 남아 있는 것은 작곡가들이 독립한 예술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초기 음악에 큰 영향을 준 영국 음악은 오히려 정체 상태에 빠져든다.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 1505~1585)는 <세상의 구원자>(Salvator mundi) 등 영국 성공회의 노래인 서비스(Service)와 앤섬(Anthem)을 작곡했다. 윌리엄 버드(William Byrd, 1540~1623)는 작은 합주단 ‘콘소트’(consort)가 반주하는 아름다운 독창과 이중창을 남겼다. 당대 최고의 류트 연주자였던 존 다울랜드(John Dowland, 1563~1626)는 스스로 ‘우울한 사람’이자 ‘불행한 영국인’이라 부르며 <흘러라, 내 눈물이여>(Flow, my tears) 등 단순한 선율에 깊은 애수를 담은 류트 반주의 노래를 썼다. 영국 음악은 대륙의 역동적인 발전을 수용하지 못한 채 ‘조용한 관조와 몽상적 취향’이란 특유의 악풍에 갇히고 만다. 이러한 내성적 경향은 왕위 쟁탈을 위한 랑카스터(Lancaster)가와 요크(York)가 사이에 벌어진 장미전쟁(1455~1485)의 혼란과 무관치 않았다. 영국의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Emma Kirkby)는 이 시대 영국 작곡가들의 노래들을 녹음했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가 고음악(ancient music)과 시대 악기(period instrument) 연주에서 강세를 보이는 것은 이 나라들이 르네상스 초기의 음악 중심이었고, 그 시대의 저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뤼헤, 캉브레 등 부르고뉴, 플랑드르의 중심 도시에는 지금도 옛 악기들이 잘 보존돼 있고, 당시 음악을 들려주는 연주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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