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④] 마드리갈, 인간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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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헌재의 탄핵 판결과 벚꽃 대선을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2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 르네상스 시대 : 클래식 음악의 태동 
       
①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최초의 오페라를 낳다
② 중세 천년, 그레고리오 성가와 음유시인들
③ 백년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④ 마드리갈, 인간을 노래하다
⑤ 콜럼버스의 항해와 <가브리엘의 오보에>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지동설을 발표한 뒤 과학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는 움직임이 확산됐다. 미술에서는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뒤를 이어 카라바조와 루벤스가 사실적인 인간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문학에서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삶의 의미를 캐묻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교황청의 지배가 여전히 강고했다. 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마녀사냥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피렌체에서 <에우리디체>가 초연된 1,600년은 조르다노 브루노가 신성모독죄로 화형당한 바로 그해였다.

아드리아해 연안 118개의 섬으로 이뤄진 곤돌라의 도시 베네치아는 교황청의 통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일찍이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가 ‘별천지’(musdus alter)라 부른 이곳은 지중해 무역의 중심으로 부를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비잔틴의 앞선 문화를 일찍 흡수했고, 자치 공화국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누린 베네치아에는, 억압받던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그 결과 베네치아는 피렌체와 함께 르네상스 음악을 꽃 피웠고, 비발디(1678~1741)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요람이 됐다.  

음악에서 르네상스 정신을 가장 널리, 오래, 꾸준히 노래한 것은 마드리갈이었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태동한 마드리갈은 아름다운 선율과 풍부한 표정으로 사랑을 노래했고 세태를 풍자했다. 아카데미 회원들의 연회나 연극에 주로 쓰였고, 귀부인을 기쁘게 해 줄 선물로 창작되기도 했다. 초기 마드리갈은 3~4명의 가수가 동시에 시 한편을 낭송하는 수준이었지만, 16세기 중엽 베네치아에서 페트라르카의 시와 결합되고 반음계적 서법을 도입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의 음악감독 빌레르트(Adrian Willaert, 1490~1562)는 <신음악>(Musica nova)에 25곡의 마드리갈을 수록했는데, 1곡을 제외하면 모두 페트라르카의 시를 사용했다. 빌레르트는 가사와 음악의 진정한 조화를 추구한 첫 작곡가였다. 시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으면 음악도 두 부분으로 구성했고, ‘거친, 가혹한, 야만적인’이란 가사와 ‘달콤한, 겸손함, 천사같은’이란 가사는 선율과 화음을 대조시켰다. 그의 제자인 로레(Cipriano de Rore, 1515~1565)도 페트라르카의 칸초나 <아름다운 동정녀> (Vergine bella)를 가사로 11곡의 연작 마드리갈을 작곡했는데, 슈베르트 연가곡처럼 약간의 극적 성격을 띈 연작 마드리갈은 ‘오페라’에 한 걸음 다가선 형태였다.

베네치아에서는 1년 내내 축제가 열렸고, 가면을 쓴 사람들은 익살을 부리며 광장을 누볐다. 횃불 퍼레이드와 함께 바퀴 달린 소형 무대를 끌고 다니며 짤막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소란한 분위기에서 노래했으므로 악기 반주도 있었다. 가면극은 평범한 사람들의 노래인 ‘빌라넬라’로 발전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하는 ‘빌라넬라’는 시골 노래의 전통을 모방한 가벼운 노래로, 1570년 무렵부터 진지한 마드리갈과 결합되어 ‘마드리갈 코메디’ 또는 3막의 즉흥 가면극 ‘코메디아 델 아르테’(comedia dell'arte)로 발전했다. 

추기경 벰보(Pietro Bembo, 1470~1547)는 단테, 보카치오, 페트라르카가 사용한 토스카나 언어, 특히 페트라르카의 시를 세밀히 분석하여 ‘완전함의 모델’이라고 찬양했다. 페트라르카는 평생 사랑한 라우라(Laura)에게 바친 366편의 소네트 <칸초니에레>(Canzoniere)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영원한 의미를 노래했다. 유쾌하면서도 근엄한 그의 소네트는 음악으로 만들기 좋은 리듬과 액센트를 제공했다. 페트라르카의 시가 가사로 채택되면서 마드리갈은 진지한 가사에 어울리는 차원 높은 음악 양식으로 변모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작곡가들이 페트라르카의 시에 열광하게 된 것은 벰보의 영향이었다. 

‘가사 그리기’ 기법은 16세기 마드리갈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천국’이란 단어에는 높은 음을, ‘올라간다’는 단어에는 상승 음계를 사용했고, ‘두려움, 수치심’같은 단어는 고뇌에 찬 반음계로 표현했다.*** 파스로(Pierre Passereau, 1509~1547)의 <그는 잘 생기고 착하다>(Il est bel et bon)는 한 여인이 자기 남편에 대해 다른 여자에게 얘기하는 내용인데, 남편이 닭에게 모이 주는 장면에서 꼬꼬댁 하는 닭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잔느캥(Clément Janequin, 1485~1558)은 가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표제 샹송’을 썼다. <전쟁>(La Guerre), <종달새>(L'alouette), <새들의 노래>(Le chant des oiseaux), <여자들의 수다>(Le Caquet des femmes)는 여러 일상적인 소리들을 노래에 불러들였다.

단순히 가사를 묘사하는 건 유치하며, 시의 깊은 정서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반성도 나왔다. 피렌체의 페리와 카치니는 ‘음악의 감정이론’을 신봉했다. 사랑, 기쁨, 분노, 증오, 공포 등 다양한 정서는 사람 몸속에 흐르는 체액의 흐름을 자극하여 정서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가령, 두려움을 표현할 때는 낮은 음역의 하강하는 선율과 함께 쉼표와 불협화음을 사용하고, 기쁨을 표현할 때는 빠른 템포의 셋잇단음표와 화려한 꾸밈음을 구사하는 게 효과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은 “노래 하나는 반드시 한 가지 감정만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으로, 이는 바로크 오페라의 기반이 된 단선율 노래, 즉 모노디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피렌체의 <에우리디체>와 만토바의 <오르페오>로 결실을 맺었다.     

마드리갈을 최고의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였다. 그는 1587년부터 1638년까지 9권의 <마드리갈집>을 펴냈는데, 1~4집은 순수 르네상스 양식, 5~6집은 과도기 양식, 7~9집은 바로크 양식으로 분류된다. 5집에 포함된 <무정한 아마릴리>(Cruda Amarilli)는 시작 부분의 절규에서 강한 불협화음을 사용했고 ‘아, 가혹하게’(ahi lasso)란 가사에서는 높은 A의 음역에서 멜리스마****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는 화성을 통해 가사의 의미를 그리려 한, 한층 발전된 ‘가사그리기’ 기법이었다. “가사 먼저, 그리고 음악” (Prima le parole, poi la musica)라는 모토는 그의 음악관을 반영한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음악평론가 아르투시(Giovanni Maria Artusi)는 몬테베르디의 노래에 나오는 자유로운 불협화음들은 빌레르트가 확립한 작곡 규범을 무시한 오류라고 비판했는데, 이에 몬테베르디는 “음악은 가사의 ‘어구’보다 그 ‘의미’가 드러내도록 해석하여 표현해야 한다”는 ‘제2작법’을 설명하며 맞섰다. 그는 1607년 만토바에서 <오르페오>를 초연하여 음악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고, 1613년 해고된 뒤엔 베네치아로 활동무대를 옮겨서 <포페아의 대관식>, <율리시즈의 귀환> 등 더욱 무르익은 오페라를 썼다.

마드리갈의 역사에서 카를로 제수알도(Carlo Gesualdo, 1561~1613)를 빼놓을 수 없다. 이탈리아 남부 베노사의 공작으로 미술의 카라바조(1571~1610)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는, 1590년 아내 마리아와 정부 카라파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두 사람의 시신에는 30곳 이상의 자상이 있었으며, 사건 이후 궁전앞 거리에 시신을 전시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느꼈을 슬픔을 소재로 6성 마드리갈 <오 엉클어진 머리카락>(O chiome erranti)을 작곡했다. 제수알도는 피할 수 없는 고독이라는 근대 인간의 심리를 보여준 게 아닐까. 그의 음악은 고향을 잃은 자, 현세와 피안 사이를 떠돌다 쫓겨난 자, 인간에 대한 우월감과 신에 대한 거리감 사이에서 분열된 자의 노래였다. 고통 받는 구세주와 자기를 동일시한 그는 12명의 소년을 고용해 하루 3번씩 채찍으로 자기를 때리게 했고, 채찍으로 맞을 때마다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니콜라우스 팔레지외 <음악사의 운명적 순간들>, p.27~p.44)

그는 페라라의 공주 엘레노라 데스테와 다시 결혼했다. 하지만 사랑을 노래한 그의 마드리갈은 결코 명랑한 음조를 찾지 못한다. 예술가로서 과장과 흥분이 심했던 그는 거칠게 난도질한 테마,강렬하고 파괴적인 반음계법을 구사했다. <나는 고통에 지쳐서 죽는다>(Moro, lasso, al mio duolo)는 죽음의 고통을 반음계적 호모포니로 표현했고, 생명(vita)란 단어를 멜리스마로 처리했다. 찰스 버니(1726~1814)가 “거칠고 미성숙하고 제멋대로인 전조의 표본”이라고 혹평한 그의 작품은 르네상스의 시대에 갇혀있지만 19세기 낭만시대의 정서를 250년 앞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뛰어난 음악가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훌륭한 가수였고, 여러 가지 악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피렌체의 바사리가 쓴 전기에 따르면 메디치가의 로렌초는 밀라노의 로도비초 공작에게 다빈치를 보내면서 리라 다 브라치오를 선물했다고 한다. 다빈치의 뛰어난 즉흥연주 솜씨를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피렌체에서도 마드리갈이 다채롭게 발전했다. 피렌체의 축제에서 불린 노래 ‘칸토 카르나샬레스코’(Canto Carnascialesco)도 가면극으로 진화했다.

*** 악보의 시각적 이미지로 연주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눈 음악’ (eye music)도 있었다. 로레는 ‘어두운’, ‘눈먼’, ‘밤’ 같은 단어에 검은 음표를 사용했다. 오케겜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스캥이 작곡한 <나무의 요정>(Nymphes des bois)는 작품 전체를 검은 음표로 기보하여 조가(弔歌)임을 표시했다. 

**** 멜리스마(Melisma)는 가사 한 음절을 노래할 때 음정이 다른 여러 음표를 연결해서 부르는 창법을 말한다. 음절 하나에 음표 하나씩 대응하도록 노래하는 방식은 실라빅(Syllabic)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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