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⑥] 춤의 뮤즈와 바로크 기악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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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헌재의 탄핵 판결과 벚꽃 대선을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2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2. 일그러진 진주, 클래식이 되다

⑥ 춤의 뮤즈와 바로크 기악의 탄생

⑦ 이탈리아 : 비발디 <사계>와 협주곡의 진화

⑧ 프랑스 : <세상의 모든 아침>과 루이 14세의 궁정 음악

⑨ 영국 : <메시아> vs <거지 오페라>, ‘세계의 수도’ 런던의 풍경

⑩ 독일 : “바흐는 시냇물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

⑥ 춤의 뮤즈와 바로크 기악의 탄생

세종 시대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조선은 임진왜란(1592)의 참화에 휩싸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에게 유린당한 조선은 명 · 청 교체기, 강대국의 틈새에서 중심을 잃고 병자호란(1636)과 삼전도의 굴욕까지 겪었다. 일본으로 가던 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박연, 1627)와 하멜(1653)이 연이어 조선으로 표류하여 서양의 존재가 알려졌지만, 소(小)중화사상에 빠진 조선의 지배층은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악학궤범>(1493)에 정리된 조선의 궁중 음악은 이씨 왕조가 끝날 때까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유럽에서 오페라가 탄생한 1600년 무렵 조선에서 판소리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흥미롭다. 부패한 권력자를 풍자하고 웃음과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판소리는 우리 민중의 오페라인 셈이었다.

 

유럽으로 가 보자. 1588년, 무적함대의 궤멸로 스페인은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고,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떠올랐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한 지 100년 되던 1592년, 스페인은 공식적으로 노예무역 허가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과학혁명의 세례가 유럽을 뒤덮었다. (중략) 아이작 뉴튼은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는데, 수학의 정밀함과 치밀한 관찰을 결합시킨 그의 태도는 근대과학 방법론의 모델이 됐다.

 

최초의 오페라가 탄생한 1600년부터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세상을 떠난 1750년까지 약 150년의 기간을 ‘바로크 시대’라 부른다.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란 뜻으로, 다양한 실험이 이뤄진 이 시기의 음악을 ‘괴상하다’고 폄하해서 부른 말이다. 장 자크 루소는 <음악사전>(1768)에서 라모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에 대해 “화성은 조화롭지 못하고, 선율은 부자연스럽고, 음악의 흐름 또한 억지스럽다”고 비판하며 ‘바로크’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스위스의 예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이 <미술사의 기초개념>(1915)에서 이 시대 예술의 가치를 재평가한 뒤 ‘바로크’란 말의 부정적인 뉘앙스는 사라졌다.

 

바로크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종교음악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세속음악이 활짝 꽃피었고, 성악에 비해 기악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됐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조각, 건축에 악기가 등장하는 걸로 보아 오래전부터 기악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만, 악보로 남아 있는 곡은 드물다. 교회가 성악을 권장하며 기악을 멸시한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바로크 시대에도 미사곡과 모테트는 물론, 알레그리의 <미제레레>(1630)*, 비발디의 <글로리아>(1715),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터>(1736) 등 뛰어난 종교음악이 창작됐다.

 

알레그리 <미제레레> (노래 탈리스 스콜라스)

https://youtu.be/YDOENZediM8

 

류트는 가장 인기 있는 가정용 악기로, 춤과 노래의 반주는 물론 독주 악기로도 널리 쓰였다. 중세의 피들(fiddle)에서 발전한 바이올린은 여성의 높은 목소리를 확장한 악기로, 16세기 이후 ‘악기의 여왕’으로 떠올랐다. 북이탈리아의 크레모나에서 아마티, 과르네리, 스트라디바리가 바이올린의 명품을 만들었고 코렐리, 비발디, 타르티니 등 대가들이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였다.

 

건반악기로는 오르간,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가 있었다.** 14세기에 발명된 클라비코드는 피아노처럼 건반을 누르면 탄젠트(tangent)라는 놋쇠막대가 현을 두드려 소리를 냈다. 하프시코드는 건반을 치면 플렉트럼이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 나라마다 쳄발로(Cembalo, 독일), 클라브생(Clavecin, 프랑스), 버지널(Virginal, 영국)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프레스코발디, 쿠프랭, 스카를라티 등 하프시코드의 명인들이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악기의 왕’으로 불린 오르간은 건반을 누르면 풀무 속의 바람이 파이프를 울려서 소리를 냈으며, 주로 교회에서 사용했다. 오르간의 대가는 단연 헨델과 바흐였다.

 

바로크 초기, 성악을 기악으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일이 잦아졌다. 악보에는 “인성(人聲) 또는 악기로 연주해도 좋다”는 지시가 나타났다. 기악은 성악을 확장하는 방편으로 활용되다가 차츰 성악에서 독립한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 잡는다. ‘바로크 기악의 창시자’로 불리는 조반니 가브리엘리(1554~1612)는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의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입체 음악 양식’을 실험했다. 그의 <교회에서>는 2팀의 성가대가 마주보며 부르는 형태인데, 이 이중 합창은 기악곡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 기악곡은 ‘노래에서 나왔다’는 뜻의 ‘칸초나’(Canzona)라 불렀는데, 이 용어는 차츰 ‘소나타’(Sonata)로 대체됐다.

 

가브리엘리 <교회에서>(In Ecclesiis)

https://youtu.be/r86RSzqvrTg

 

‘울리다’(sonare)란 동사에서 나온 ‘소나타’(sonata)***는, 악기를 울려서 소리를 내는 모든 기악곡을 일컫는 말이었다. 교회에서 연주하는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와 세속에서 연주하는 실내 소나타(sonata da camera)로 분화됐고, 솔로 한 명만 연주하는 무반주 소나타와 3~4명이 함께 연주하는 트리오 소나타로 발전했다. 바로크 시대의 기악곡은 모두 ‘소나타’에서 진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용 음악은 바로크 기악의 풍요로운 원천이 됐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교댄스가 널리 유행했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춤을 잘 추어야 했다. 춤은 남녀가 어울리며 서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엄격한 규율사회에서 필수였다. 춤의 대가인 투아노 아르보는 <무용기보법>(1589)에서 “(춤 출 기회가 없다면) 어떻게 여성이 누구와 결혼할지 결정할 수 있겠는가?” 묻고 있다. 이러한 춤에는 언제나 음악이 함께 했다. 종교 갈등이 심했던 독일에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음악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한 미하엘 프레토리우스(1571~1621)가 ‘춤의 뮤즈’에게 바친 무용 음악 <터프시코레>는 바로크 초기 무용 음악의 결정판이다.

 

미하엘 프레토리우스 <터프시코레>(Terpshichore)

https://youtu.be/Q5h_-4FWhrA

 

춤을 뒷받침해 주던 음악은 점차 연주용 모음곡과 변주곡으로 독립하여 바로크 음악을 싹틔웠다. 모음곡(Suite)은 대조적인 2~3개의 춤곡을 함께 묶어 연주하면서 생겨났다. 두 박자의 느린 춤곡과 세 박자의 빠른 춤곡을 주로 연주했고, 독일 춤곡인 알르망드(allemande)와 프랑스 춤곡인 쿠랑트(courante)가 특히 인기 있었다. 모음곡은 사라방드(Sarabande)와 지그(Gigue) 등으로 확대되어 바로크 음악의 대표 양식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바흐 류트 모음곡 1번 E단조 (연주 줄리안 브림)

https://youtu.be/4K0mY2cmLBY

 

변주곡(Variations)도 춤에서 발생했다. 일단 춤이 시작되면 끝날 때가지 음악이 이어져야 했고, 이를 위해 자연스레 즉흥 변주를 구사하여 음악을 늘이곤 했다. 흥겨운 춤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음악을 악보에 기록한 결과 태어난 게 변주곡인 셈이다. 코렐리의 <라 폴리아>, 헨델의 <파사칼리아>, 바흐의 <샤콘느>*****는 춤에서 탄생한 바로크 변주곡의 대표작이다.

 

코렐리 <라 폴리아> Op.5-12 (리코더 연주 프란스 브뤼헨)

https://youtu.be/vuz9eBkUWlY

 

헨델 <파사칼리아> G단조

https://youtu.be/zjywSnVcVtI

 

스페인 춤곡인 사라방드(sarabande) 풍의 아리아를 주제로 사용한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1742)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변주곡 중 하나로 꼽힌다. 최초의 바흐 전기를 쓴 요한 포르켈에 따르면 이 곡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드레스덴에 머물던 러시아 대사 카이절링 백작은 불면증 때문에 밤마다 골트베르크라는 15살 난 쳄발로 연주자를 불러서 연주를 시켰고, 그다지 효과가 없자 바흐에게 잠을 부르는 음악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바흐가 작곡한 게 이 변주곡인데, 백작은 크게 만족하여 금잔에 금화를 가득 담아서 바흐에게 주었다. 그의 1년 연봉을 웃도는 금액으로, 평생 받은 사례 중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곡에 대한 바흐 자신의 코멘트를 보자. “변주곡은 기본 화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재미없는 작업이지만, 졸게 만들기엔 제일 좋은 방법이지.” 시끌벅적한 춤판에서 태어난 변주곡이 불과 150년 만에 잠을 재촉하는 음악으로 진화했다니, 자못 역설적이다.

 

바흐 <골트베르크> 변주곡 (피아노 연주 글렌 굴드)

https://youtu.be/aEkXet4WX_c

 

* 알레그리(Gregorio Allegri, 1582~1652)가 1630년 경 작곡한 이 9성 합창곡은 교황청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음악으로 여겨졌다. 교황청은 이 곡의 거룩한 악보를 성 베드로 성당 밖으로 가져 나가면 엄벌에 처한다고 선포했는데 1770년, 14살 모차르트가 한번 듣고 외워서 악보로 옮겨 적는 바람에 금기가 깨졌다는 일화가 있다. <미제레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뜻이다.

 

** 클라비어(Klavier)는 건반악기를 통틀어 부르는 독일말로, 바로크 시대에는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를 뜻했다.

 

*** 바로크 시대의 소나타는 18세기 후반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시대에 확립된 독주곡인 소나타와 다르므로 구분해야 한다. 클래식 음악의 대표적 악곡 형식인 ‘소나타 형식’(제시부-전개부-재현부로 구성)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교회 소나타는 일부 성당에서 미사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다가 18세기 후반 멸종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늘날 연주되는 교회 소나타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17곡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 통주저음(basso continuo) : 솔로가 쉬는 동안에도 비올라 다 감바와 하프시코드가 연주하는 저음 부분은 계속됐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으며,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작곡 방식이 됐다. 통주저음이 밑에서 받쳐주기 때문에 솔로는 일정한 불협화음을 연주해도 안전했고, 비교적 자유롭게 템포를 조절할 수 있었다.

 

***** 샤콘느는 17세기 스페인과 남프랑스에서 유행한 3박자의 느린 춤곡인데,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중남미에서 유럽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바흐의 <샤콘느>는 무반주 파르티타 2번 D단조의 마지막 악장으로, 주제와 30개의 변주곡으로 이뤄져 있다. ‘파르티타’(Partita)도 똑같이 모음곡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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