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⑨] ‘세계의 수도’ 런던의 풍경 : 메시아 vs 거지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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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헌재의 탄핵 판결과 벚꽃 대선을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2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7세기 영국은 대서양을 제패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돈과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도시 런던은 ‘세계의 수도’를 자처했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끈 청교도 혁명(1649), 의회 세력이 오렌지공 빌럼과 합세해 제임스 2세를 몰아낸 명예혁명(1688)으로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확립했다. 귀족과 시민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여러 분야에 함께 진출하면서 영국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선두주자가 된다.

 

크롬웰과 청교도는 극장을 악마의 발명품으로 여겨 모든 연극을 금지했지만 오페라는 ‘음악회’(cocert) 형식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귀족들은 프랑스 궁정 발레처럼 화려한 무대장치와 춤, 노래, 기악이 어우러지는 가면극 ‘마스크’(masque)를 즐겼다. 헨리 퍼셀(Henri Purcell, 1659~1695)은 17세기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그의 <디도와 아이네아스>(1689)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요소를 받아 들여 영국 오페라의 전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모차르트처럼 단명했기 때문에 영국 음악사에 더 많은 유산을 남기지 못했다. 그가 죽은 뒤인 1698년, 그의 별명을 딴 노래집 <영국의 오르페오>가 출판됐다. 여기 수록된 <울게 해 주오>(Let me weep)는 애끊는 슬픔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적신다.

 

1710년, 헨델이란 독일 출신의 음악가가 도착한 뒤 런던의 음악 풍경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그는 9살 때 오르간을 배웠고, 18살 때 법관 대신 음악가의 길을 택해 함부르크 오페라에 취직했고, 20살 때 오페라 <알미라>를 성공시킨 뒤 단도직입 런던으로 건너왔다. ‘세계의 수도’ 런던에서 오페라로 성공하면 ‘음악의 제왕’이 되는 셈이었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그의 런던 데뷔작 <리날도>(Rinaldo, 1711)는 무려 반년 동안 공연되며 엄청난 갈채를 받았다. 이 오페라의 성공으로 밑천을 만든 헨델은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의 주식에 투자하여 10배의 차익을 남겼다. 세계사 최초로 주식 바람이 불어 온 런던에서 헨델은 영리하게 돈을 굴릴 줄 알았던 모양이다.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큰 이윤을 남긴 남해회사는, 은행으로 변신을 꾀하다가 1720년 거품이 꺼지면서 몰락했다. 과학자 아이작 뉴튼도 이 회사에 7천 파운드를 투자했다가 2만 파운드의 손해를 봤다니, 적절할 때 치고 빠지는 헨델의 음악적 직관이 뉴튼의 치밀한 추리력보다 더 쓸모 있었던 셈이다. 헨델은 이 때 모은 돈으로 1719년 오페라 회사인 ‘왕실 아카데미’를 열고 음악활동의 거점으로 삼는다. (조병선 <클래식 법정>, p.268) 그는 <줄리오 체사제>를 비롯한 46편의 오페라를 선보였고, 막간의 화려한 오르간 연주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영화 <파리넬리> 중 알미레나의 아리아 ‘날 울게 두소서’ 바로 보기

 

 

<리날도>에는 유명한 아리아 <날 울게 두세요>(Lascia ch'io Pianga)가 나온다. 십자군 기사 리날도의 애인 알미레나 공주가 적에게 잡힌 뒤 자유를 갈망하며 부르는 아리아로, 영화 <파리넬리>(1991)*에서는 전설적인 카스트라토 파리넬리(Farinelli, 1705~1782)가 이 노래로 청중을 압도한다. 영화 장면들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리날도>가 공연된 것은 1711년이고, 파리넬리가 런던에서 활약한 것은 1733년부터 1737년까지 4년 동안이니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장면이다. 파리넬리는 헨델의 ‘왕립 아카데미’가 아니라, 헨델과 경쟁하던 자기 스승 포르포라(Nicola Porpora, 1686~1768)의 ‘귀족 오페라’에서 활동했다. 영화는 헨델이 무명의 파리넬리를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아풀리아에서 스카우트해 오는 걸로 돼 있지만, 실제 헨델은 그를 영입하러 볼로냐까지 찾아갔다가 만나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린 적이 있다. 런던에서 파리넬리의 수익은 헨델의 3배 정도였다니, 인기 스타가 작곡자보다 훨씬 돈을 잘 버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인 모양이다.

 

런던 초기의 기악곡 <물위의 음악>(1717)에는 유명한 일화가 따라다닌다. 헨델은 하노버공 게오르크의 궁정 작곡가였는데, 런던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휴가를 낸 뒤 아예 그 곳에 주저앉아버렸다. 계약 의무를 팽개친 헨델은 과거의 주군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714년 앤 여왕이 죽자, 할아버지가 영국인이었던 하노버공 게오르크가 조지 1세가 되어 영국 왕위를 잇게 된다. ‘조지’는 독일말로 ‘게오르크’, 다름 아닌 하노버공이었다. 자기의 배신행위 때문에 양심이 불편했던 헨델은 크게 당황했지만, 왕실의 뱃놀이 때 배 위에서 연주할 음악을 작곡하여 왕의 기분을 풀어 주는데 성공했다.

 

1717년 7월 17일 왕의 유람선 행렬이 화이트홀에서 첼시까지 템즈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그 때 <물위의 음악>이 연주된 건 분명하다. 왕과 귀족들이 큰 바지선을 탔고, 악단이 탄 바지선이 나란히 가며 연주했다. 당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헨델이 작곡한 훌륭한 심포니를 50명의 악사들이 온갖 종류의 악기들을 동원하여 연주”했고, 이를 좋아한 왕은 “템즈강을 오르내리며 모두 세 번이나 되풀이 연주하도록 분부”했다. 밤늦게 뱃놀이가 끝났을 때, 악사들은 모두 파김치가 돼 있었다. <물위의 음악>은 F장조, D장조, G장조의 세 모음곡으로 이뤄져 있는데, 특히 제2 모음곡의 ‘호른파이프’는 영국 TV의 시그널 음악과 수많은 광고 음악에 등장하여 매우 잘 알려진 곡이다.

 

헨델 <물위의 음악> 제1모음곡 (2012 영국 BBC 프롬스 연주 실황) 바로 보기

 

 

헨델은 일이 잘 풀리자 1726년 아예 영국으로 귀화했고, 그의 이름도 영어로 ‘조지 프레더릭 헨델’(George Frederick Handel)**이 된다. 하지만 1728년, 그의 ‘왕실 오페라’는 큰 위기에 봉착한다. 존 게이(John Gay, 1685~1732)의 <거지 오페라>가 런던 팬을 휩쓸어 버린 것이다. 존 게이는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1667~1745)의 친구로, “형무소에 있는 죄수들의 도덕성은 상류층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며, 죄수들 이야기만으로도 좋은 연극이나 오페라가 가능하다”는 스위프트의 말에 솔깃하여 이 작품을 만들었다. 당시 런던의 거지와 창녀들의 삶을 익살스레 묘사한 이 작품은 영어로 돼 있고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전통 선율을 차용했기 때문에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게다가 권력층과 신흥 자본가를 풍자하는 내용은 관객들을 아주 통쾌하게 해 주었다. 이 작품은 1727년 헨델의 오페라 공연 때 일어난 불미스런 사건을 비꼬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 맥히스를 사이에 두고 폴리와 루시라는 두 여자가 머리끄덩이를 쥐어뜯으며 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헨델의 오페라 <아드메토>에서 주역을 맡으려고 경쟁하던 두 소프라노가 공연 도중 난투극을 벌인 사건을 풍자한 것이었다. <거지 오페라>는 62일 동안 상연되는 대히트를 기록하며 헨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거지 오페라>의 성공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시민 계층의 성장과 예술의 대중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이탈리아 오페라는 아무래도 귀족과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는데, 존 게이는 서민 취향의 이 작품으로 일거에 ‘대박’을 이뤄낸 것이다. <거지 오페라>는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의 효시가 됐고, 정확히 200년 뒤인 1928년,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쿠르트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로 다시 태어났다.

 

‘런던의 수퍼스타’ 헨델의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가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게 되자 헨델은 변신을 모색해야 했다. ‘왕립 아카데미’는 1737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고, 설상가상으로 헨델은 오른쪽 반신불수가 되어 걷거나 말할 때는 물론, 작곡을 할 때도 불편을 겪게 된다. 헨델은 저비용으로 흥행을 보증할 수 있는 오라토리오로 작곡 영역을 옮긴다. ‘오라토리오’는 교회에 딸린 기도실인 ‘오라토리움’(Oratorium)에서 온 말로, 종교적인 내용이지만 오페라처럼 드라마가 있고 영어로 노래했기 때문에 쉽게 인기를 끌 수 있었다. 합창을 강조한 대신 무대 · 의상 · 연기가 필요 없어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1739년 <사울>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이 크게 환영받았고, 마침내 1742년 <메시아>가 세상에 나왔다.

 

찰즈 제넨스(Charles Jennens, 1700~1773)는 1741년 ‘성서 모음’(Scripture Collection)이라는 대본을 만들어 헨델에게 주었고, 헨델은 이 대본으로 총보 354쪽의 대작 <메시아>를 8월부터 9월까지 단 3주만에 완성했다. 그 기간 헨델은 감동에 사로잡혀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곤 했는데, ‘할렐루야’ 합창 부분을 작곡할 때는 하늘이 열리며 위대한 신의 모습이 나타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메시아>는 1742년 4월 13일 더블린의 ‘닐 음악홀’(Neal's Music Hall)의 자선 음악회에서 초연되어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다음날 <포크너>지는 “청중들의 기쁨과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며 “마음과 귀를 사로잡은 최고의 작품”이라고 격찬했다. 극장이 매일 초만원을 이루자 신문은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부풀린 치마를 입고 오지 말라”고 여성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런던에서 공연됐을 때 일반인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종교적인 작품을 극장에서 공연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으로 여겨진 것이다.

 

헨델 <메시아> 중 ‘할렐루야’ (몰몬 테버너클 합창단) 바로 보기

 

 

헨델 <메시아> 중 ‘우리에게 아기 나셨네’ (몰몬 테버너클 합창단) 바로 보기

 

 

<메시아>는 32곡의 헨델 오라토리오 중 최고 걸작으로, 특히 ‘할렐루야’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합창 음악의 백미로 꼽힌다.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니, 크리스트의 왕국이 이 땅에 이뤄졌네. 왕 중의 왕, 그의 통치는 영원하리라!” 이 합창이 시작될 때 청중들이 모두 기립하는 관례가 있다.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될 때, “왕 중의 왕”이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서 감동한 조지2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다른 청중들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생긴 관례라고 한다. 하지만, 조지2세가 공연장에 늦게 도착했고 그를 맞이하려고 청중들이 모두 일어났는데, 그 때 우연히 ‘할렐루야’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화려한 푸가로 이사야서 9장 6절을 노래하는 12번째 합창도 크리스마스 때 거리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우리에게 아기 나셨네, 우리에게 아들 오셨네. 그의 어깨에 나라가 있네. 그의 이름은 멋진 지도자, 전능한 신,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자!”

 

헨델은 <메시아>를 32차례나 직접 지휘, 과거의 명성을 단숨에 회복했다. 이 작품은 성공회가 지배하는 영국의 국가 이념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환영받았고, 헨델은 영국의 영웅으로 존경받게 됐다. 게다가 연주의 수익금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 당시 한 평론가의 말이다. “이 음악은 굶주린 자를 먹였고, 헐벗은 자를 입혔다.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고아들을 키웠을까!”

 

 

헨델의 음악혼은 <왕궁의 불꽃놀이>(1749)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영국 왕실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의 종결을 축하하기 위해 거대한 불꽃놀이를 계획했고, 이에 어울릴 화려한 음악을 헨델에게 의뢰했다. 헨델은 트럼펫 9대, 호른 9대, 오보에 24대, 파곳 12대, 팀파니 세 쌍, 작은 북 두 개 등 57명의 대규모 악단을 위해 5악장으로 된 이 곡으로 화답했다.

 

축제를 일주일 앞두고 런던 시내 스프링 가든에서 열린 리허설에는 12,000명의 관객이 몰렸고, 마차가 뒤엉겨서 3시간 동안 꼼짝도 못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4월 27일 그린 파크에서 열린 축제는 진행이 매끄럽지 못했다. <왕궁의 불꽃놀이> 서곡이 연주되자 101발의 축포가 울려 퍼졌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축포에 이어 불꽃놀이를 시작해서 하늘에 대성당 무늬를 그려야 했는데, 모양이 엉망이 돼 버렸다. 불꽃이 엉뚱한 데로 튀어서 행사장 오른편 건물에 불이 붙자, 불꽃을 담당한 세르반도니는 이성을 잃고 마구 화를 냈다. 하지만 헨델은 “저 건물의 불꽃이나 하늘의 불꽃이나 마찬가지”라며 연주자들을 진정시키고 의연히 지휘를 이어갔다. 사람들은 불꽃놀이에 실망했지만 헨델의 음악에는 열광했다.

 

헨델 <왕궁의 불꽃놀이> (2012 영국 BBC 프롬스 연주 실황) 바로 보기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를 지휘하던 헨델은 마지막 ‘아멘’ 코러스가 끝나자 쓰러졌고, 1주일 뒤 74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치됐다. 헨델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 음악의 공백을 메울 사람이 없었다. ‘세계의 수도’를 자처한 런던은 그 후 요한 크리스찬 바흐를 필두로 하이든, 멘델스존, 드보르작 등 뛰어난 음악가를 초청하여 영국 음악의 명맥을 이어갔다.

 

헨델의 인기는 음악사에서 한 번도 식어 본 적이 없다. 하이든은 1791년 런던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이 <메시아>를 연주하는 장면에 충격을 받고 빈에 돌아와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작곡했다. 1859년 런던에서 열린 헨델 서거 100주년 축제 땐 500개의 오케스트라, 5,000명의 합창단이 헨델을 연주했고, 9만 명의 청중들이 몰렸다. 베토벤은 책상 위에 늘 헨델, 바흐, 모차르트의 악보를 놓고 공부했는데 그 가운데 헨델을 최고로 여겼다. 생애 마지막 해인 1827년, 그토록 갖고 싶었던 헨델 악보 전집을 선물 받고 베토벤은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헨델의 음악은 진리 그 자체다. 그는 모든 작곡가들 중 가장 위대하다.”

 

* 헨델의 이름은 독일어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이다. 영국으로 국적을 바꾼 이유를 묻자 헨델은 “이름에서 귀찮은 우므라우트(a위의 점 두 개)를 떼려고 그런 거”라며 농담으로 받아넘겼다고 한다.

 

**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는 ‘심각한 오페라’란 뜻으로, 영웅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비극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가 많다. 음악도 이에 걸맞게 장중한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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