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⑩] 독일: “바흐는 시냇물이 아니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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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헌재의 탄핵 판결과 벚꽃 대선을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3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종교 갈등이 영토분쟁으로 번져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이 뒤엉킨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전투의 중심이 된 독일의 피해가 가장 컸다. 작센 지방은 폐허가 됐고, 기아 · 약탈 · 질병으로 인구의 1/3이 사망했고, 그 여파로 독일은 오래도록 후진국으로 남게 됐다.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ütz, 1585~1672)의 음악은 30년 전쟁의 역사를 증언한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조반니 가브리엘리의 음악을 배워서 돌아온 뒤, 작센의 수도인 드레스덴 궁정에서 활약했다. 전쟁의 포문을 연 ‘빌라호라 전투’의 마무리를 기념할 때 그의 <음악은 기쁨의 샘>이,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로 평화가 돌아왔을 때 그의 <주여, 당신은 긍휼함이 깊으셨으니>가 연주됐다. 전쟁으로 아내와 두 딸을 잃은 그는 음악으로 상처를 치유하며 <다비트 시편>, <마태 수난>, <요한 수난>, <부활 이야기>,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작곡했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작품에 담았고, 그렇게 울려 퍼지는 탄식의 감정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베로니카 베치 <음악과 권력>, 노승림 옮김, p.43) 그는 이탈리아의 음악양식을 루터의 독일 성서에 접목시켜 ‘신(新)독일음악의 아버지’로 불렸고, 100년 연하인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종교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흐는 루터교 음악 전통은 물론 유럽의 모든 새로운 조류를 흡수, 바르크 음악의 절정을 꽃피운 작곡가로 꼽힌다. 비발디를 위시한 이탈리아 협주곡에서는 ‘합리적 형식, 절제된 테마, 부드러운 멜로디’를 배웠다. 프랑스에서 추방된 위그노 교도로부터 프랑수아 쿠프랭 등 화사한 프랑스 궁정음악을 전수받았고, 헨리 퍼셀, 조지 헨델 등 등 영국에서 활약한 대가들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그는 독일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지만, “온 유럽이 그를 향해 흘러 들어와서” 음악의 바다가 됐다.

 

그는 음악사상 가장 큰 음악가족의 일원으로, 고조할아버지부터 아들까지 6대에 걸친 53명의 가족 약사(略史)를 직접 썼다. ‘바흐’(Bach)는 독일말로 ‘시냇물’이란 뜻인데, 당시 동유럽에서 여러 지역을 돌면서 음악 공연을 하는 ‘순회 음악가’란 뜻도 있었다. 고조할아버지 파이트 바흐(Veit, 1619 사망)는 1545년 경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을 떠나 독일로 이주했다. 종교 개혁 이후 동유럽은 영주의 신앙에 따라 천주교 지역과 개신교 지역으로 나뉘어졌는데, 아마 개신교를 찾아 루터의 고향 근처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바흐는 10살 때 부모를 여읜 뒤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에 의지해서 자랐다. 큰 형은 어린 바흐에게 오르간과 클라비어를 가르쳐 주었고, 어린 동생은 음악에 관한 건 뭐든지 다 배우려 했다. 바흐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큰 형은 스승 파헬벨 등 옛 거장들의 귀한 악보를 많이 갖고 있었는데, 이 보물들을 책장에 넣어 두고 아무도 못 보게 했다. 바흐는 그 악보들을 보고 싶었지만, 형은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밤, 바흐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틈을 타서 책장의 격자문 틈으로 손을 넣어 악보를 꺼냈다. 그는 이 악보를 달빛 아래서 베끼기 시작했는데, 거의 6달에 걸쳐 필사를 거의 마쳤을 무렵, 그만 큰형에게 들키고 말았다. 형은 동생이 힘겹게 받아적은 악보를 모두 빼앗고, 끝까지 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바흐는 20살 때 아른슈타트에서 뤼벡까지 왕복 400Km를 걸어서 오르간의 거장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를 만나고 온 적이 있다. 북스테후데의 유명한 ‘아벤트무직’을 듣고, 그의 오르간 기법을 완전히 익힌 바흐는 예정된 1달의 휴가 기간을 훌쩍 넘겨 3달만에 돌아왔다. 아른슈타트 관리들은 펄펄 뛰며 바흐를 나무랐지만, 배움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바흐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 자기의 놀라운 연주기량을 칭찬하면 바흐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저는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처럼 노력하면 누구라도 이만큼은 할 수 있을 겁니다.” (포르켈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 p.115)

 

바흐는 1708년 바이마르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주로 칸타타와 오르간곡을 작곡했다. 이 ‘바이마르 시대’를 ‘오르간 곡의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젊은 바흐는 혈기왕성하고 타협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궁정 악단을 지휘하던 중 성의 없이 연주하는 파곳 주자를 모욕하여 결투를 벌인 일도 있고, 시원찮은 오르간 연주자에게 가발을 벗어 던지며 “차라리 구두 수선공이 되라”고 소리친 기록도 있다. 그의 ‘전설적인’ 오르간 실력에 대해 많은 증언이 전해진다. “그의 두 발은 마치 날개가 달린 것처럼 페달 위를 날아다녔다. 천둥이 치는 듯한 힘찬 음향이 교회에 울려 퍼졌다.” 이 시기 작곡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는 그가 얼마나 열정적인 젊은이였는지 짐작케 한다.

 

바흐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565 (오르간 헬무트 발하) 바로 보기

 

당시 음악가는 귀족과 성직자의 하인이었고, 젊은 바흐에게 이러한 봉건적 위계는 견디기 힘든 속박이었다. 바이마르 영주 빌헬름 에른스트가 자신을 진급시키지도 않고 자유롭게 놓아주지도 않자 바흐는 몰래 쾨텐의 일자리를 알아보았고, 이 때문에 ‘명령 불복종’ 죄목으로 한 달간 구류를 살았다. 이 때 감옥 안에서 스케치한 게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으며, 이 6곡의 모음곡들로 예수의 전 생애를 묘사하려 했다는 해석이 있다. 바흐는 종교음악 뿐 아니라 세속음악에도 악보마다 ‘S. G. D’(Soli Gloria Deo, 오직 신의 영광)이라고 써 넣었다. 엄격한 신분질서에 절망하면서 오직 신앙으로 자신의 열정을 다스려야 했고, 개인의 열정을 우주의 질서에 복속시키는 ‘질서 속의 자유’를 음악에서 추구한 게 아니었을까. (조병선 <클래식 법정> pp.170~176)

 

예정보다 사흘 빠른 1717년 12월 2일 석방된 바흐는 가장 행복했던 ‘쾨텐 시대’를 맞게 된다. 쾨텐의 영주 레오폴트 후작은 아름다운 바리톤 음성의 소유자였고 바이올린, 비올라 다 감바, 클라비어를 연주할 줄 알았다. 17명으로 된 우수한 악단을 운영한 그는 지위와 상관없이 악단의 일원으로 연주에 참여했으며, 새 악장 바흐를 극진히 우대했다. 바흐는 그를 가리켜 “음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음악을 아는 후작”이라고 칭찬했다. 쾨텐 궁정이 캘빈파여서 복잡한 교회음악을 금지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덕분에 바흐는 종교음악 작곡의 의무에서 풀려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 등 기악곡들을 맘껏 쓸 수 있었다.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중 2번 F장조는 1977년 발사된 보이저(Voyager) 호에 실려 우주 공간을 날아가고 있는 작품이다. 바이올린, 레코더, 오보에, 트럼펫 등 4명의 독주자가 등장하는 합주협주곡으로, 트럼펫 파트가 너무 어려워서 한국에서는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고 한다. 4번 G장조는 두 명의 리코더와 바이올린 솔로의 신선한 음색과 상쾌한 선율이 돋보인다. 6번 Bb장조는 솔로가 없고 합주 파트에 바이올린이 없는 게 특징이다. 중간 음역과 낮은 음역의 현악기가 이루는 우아한 음색과 질감을 느낄 수 있다. 바흐는 악단에서 연주할 때 비올라를 맡아 위 아래 파트를 들으며 앙상블을 이끌곤 했는데, 플루트, 바이올린, 쳄발로가 등장하는 5번 D장조를 연주할 때는 쳄발로를 맡았다.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 (칼 리히터 지휘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 바로 보기

 

4곡의 관현악 모음곡은 그냥 ‘서곡’(Overture)이라고도 부르는 건 ‘서곡과 춤곡들’을 줄여서 불렀기 때문이다. 프랑스 궁정풍의 장엄한 서곡과 춤곡들을 엮어서 만든 이 모음곡 중 3번 D장조에는 훗날 아우구스트 빌헬미가 바이올린 독주로 편곡해서 연주한 ‘G선 위의 아리아’가 들어 있다. 플루트 솔로가 활약하는 2번 B단조에는 ‘폴로네즈’, ‘바디네리’ 등 매혹적인 선율들이 나온다.

 

바흐 관현악 모음곡 2번 B단조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바로 보기

 

 

<샤콘느> D단조는 바흐 기악곡의 한가운데 왕관처럼 솟아 있는 곡이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2번 D단조의 마지막 악장으로, 자유와 엄격성, 즉흥성과 형식미가 완벽하게 결합된 작품이기 때문에 ‘영원을 향한 인간 정신의 끝없는 비상(飛上)’으로 불린다. 주제와 30개의 변주곡은 단조 - 장조 - 단조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으며 앞부분 네 곡(알레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을 다 합한 것보다 규모가 크다. 자필악보에 써 넣은 손가락 지시로 볼 때 바흐 자신이 연주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바흐 사후엔 너무 규모가 크고 어려워서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잊혀졌다. 19세기 후반 바이올린의 거장 요제프 요아힘이 연주한 뒤 브람스가 “가장 깊은 사색과 가장 강렬한 느낌의 완전한 세계”라고 격찬하여 널리 알려졌다.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2번 D단조 중 <사콘느> (바이올린 기돈 크레머) 바로 보기

 

 

두 번 결혼하여 20명의 자녀를 둔 바흐는 무척 성실한 가장이었다. 1707년 결혼한 첫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와 5남 2녀를 두었는데, 이 중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1710~1784)과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1714~1788)은 뛰어난 음악가로 자랐다. 훗날 ‘함부르크의 바흐’로 불린 칼 필립 엠마누엘은 어린 시절 자기 집이 ‘비둘기집처럼’ 생기가 넘쳤다고 회상했다. 바흐가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면 아이들이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을 때뿐이었다. 그가 바란 것은 아이들이 노래를 좀 더 잘 부르고, 작곡을 좀 더 잘하고, 또 악기를 좀 더 잘 다루게 하는 것 뿐이었다. <2성 인벤션>과 <3성 인벤션>은 자녀들의 클라비어 연습을 위해 만든 곡이다.

 

쾨텐 시절, 레오폴트 후작이 휴양을 떠날 때면 악장 바흐와 악사들도 동행하곤 했다. 1720년 5월부터 7월까지 레오폴트를 수행하여 칼스바트에 다녀온 바흐는 그 사이 아내 바르바라가 세상을 떠난 것을 발견했다. 이 때 슬픔을 달래며 써내려 간 곡이 바로 <평균율 클라비어> 1집이다. 1721년, 군비 확장 때문에 쾨텐 궁정의 음악 예산이 축소됐고, 레오폴트 후작의 새신부 프레데리카 헨리에타가 음악을 싫어하는 게 분명해지자 바흐는 쾨텐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그해 12월, 바흐는 궁정의 젊은 소프라노 안나 막달레나 뷔르켄과 재혼했다. 그녀는 남편의 음악을 잘 이해했고, 생모를 잃은 자녀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낄 줄 알았던 그녀는 예쁜 패랭이꽃을 잘 손질해서 새 가정을 아늑하게 단장했다. 바흐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고, 가족음악회도 열 수 있게 됐다.

 

안나 막달레나는 13년 동안 13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막내 요한 크리스찬(1735~1782)은 훗날 ‘런던의 바흐’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했다. 안나 막달레나는 남편의 악보를 사보하여 도움을 주었는데, 남편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필체가 비슷해서 후세의 바흐 연구자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2권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했다. 이 소곡집에는 바흐가 아내를 위해 직접 쓴 가곡도 하나 들어 있는데, 행복한 죽음을 꿈꾸는 내용이다. “그대가 내 곁에 있으면 난 죽음의 안식을 찾을 때까지 기쁘게 살 것이네. 오, 그대의 아름다운 두 손이 내 충실한 눈을 감겨 준다면 나의 마지막은 얼마나 즐거울까!”

 

바흐는 1723년 라이프치히의 ‘칸토르’(음악감독)로 임명되어 그 곳에서 나머지 27년을 보냈다. 라이프치히 시의회는 “학교 책임자들과 검열관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13개조의 까다로운 고용계약서에 서명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쾨텐 궁정에서 ‘해고 증명서’를 떼서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텔레만, 그라우프너, 파슈 중 한명을 후임자로 영입하려 했던 시의회는 여의치 않자 바흐를 뽑았다. 시의원 아브라함 플라츠는 “우리는 최고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간 정도의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묵묵히 굴욕을 감수했다.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를 위해 일주일에 평균 한 곡씩, 도합 295곡의 칸타타를 썼다. 당시 예배는 4시간 정도 걸렸는데, 일요일과 축일에는 언제나 새로운 칸타타를 연주해야 했다. 이 끔찍한 의무 때문에 바흐의 엄청난 양의 칸타타가 세상에 나온 셈이다. 칸타타 <마음과 입과 행동과 생명으로> BWV147에는 연말 거리에서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예수는 언제나 나의 기쁨’(Jesus bleibt meine Freude)이 나온다. 이 분주한 나날에도 바흐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칸타타 <주여, 내 죄를 사하여 주소서>(Tilge, Höchste, meine Sünden 1745) BWV1083은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터>(1736)를 편곡한 작품이다. <마태 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B단조 미사 등 바흐 종교음악의 걸작들은 거의 다 라이프치히 시절에 나왔다. 그는 오페라를 한 편도 남기지 않았지만, 대신 귀족, 교수, 학생들이 요청하면 <커피> <결혼>, <농민>, <사냥> 등 따뜻한 유머가 넘치는 ‘세속 칸타타’를 쓰곤 했다.

 

헨델이 <메시아>를 발표한 1742년 바흐는 유명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작곡했다. 헨델이 <왕궁의 불꽃놀이>로 런던을 떠들썩하게 만든 1749년, 바흐는 만년의 대작 <푸가의 기법>을 썼다. 바흐는 헨델을 아주 존경하여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 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바흐와 헨델은 둘 다 말년에 시력을 잃은 채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은 결과였다. 1750년 3월, 바흐를 수술하여 실명케 한 영국 안과의사 존 테일러는 2년 뒤 헨델마저 수술에 실패, 또 완전히 실명시켜서 음악사에 이름을 남겼다.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한다. 그의 위대성은 아낌없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만,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다. 1750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등 극소수의 음악가들이 그의 위대성을 이해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의 이름과 음악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1829년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 100주년을 맞아 이 작품을 부활시킨 걸 신호탄으로 1850년에 바흐 협회가 결성되고 1900년에 바흐 전집 악보가 발간되는 등 ‘바흐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이러한 19세기의 움직임은 기독교 윤리로 자본주의 체제를 뒷받침한 유럽 지배층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았다. 바흐는 어느새 유럽 기독교계의 우상이 됐고, 급기야 ‘음악의 아버지’로 추대된 것이다.

 

그의 종교음악을 향해 유럽 기독교계는 커다란 존경을 바쳤다. 하지만, 그의 기악곡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겨서는 곤란할 것이다. “만일 큰 재앙이 일어나 서양음악이 일시에 소멸한다 해도 바흐의 <평균률 클라비어 곡집>만 남는다면 모두 재건할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음악의 아버지’란 표현이 과장됐다 하더라도, 바로크 시대의 모든 음악적 실험이 바흐의 손에서 완결되어 큰 봉우리를 이뤘다는 점은 사실이다. 베토벤은 <평균률 클라비어 곡집>을 접하고 이렇게 썼다. “바흐는 ‘시냇물’(Bach)가 아니라 ‘큰 바다’(Meer)라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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