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팔인간’, 결국 인간도 유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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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팔인간’, 결국 인간도 유인원
[EBS 최평순 PD 제작기]
  • EBS 최평순 PD
  • 승인 2017.03.06 11: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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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우리는 유인원이라는 존재 자체에 무지하다. 설사 안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을 그냥 원숭이라고 부르곤 한다. ⓒ EBS

작년 큰 인기를 끈 ‘사피엔스’라는 책의 흥행 요인 중 하나는 제목이 주는 강렬함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가 동물이라는 것을 잘 잊고 산다. 그러다 보니 ‘호모 사피엔스’로 호명될 때 낯선 느낌이 든다. 만물의 영장 인간이 한낱 유인원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6종의 유인원 중 하나다. 영장류에는 유인원과 원숭이만 존재하는데, 둘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기준은 꼬리의 유무다. 꼬리가 있으면 원숭이, 퇴화했으면 유인원이다. 인간은 꼬리가 없으므로 분류학적으로 유인원이다.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보노보, 기번, 인간이 유인원이다. 인간을 제외한 유인원의 특징은 인간과 유사하다는 것. 지능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임신 기간, 월경 주기 등 많은 것이 인간과 닮았다. 우리 눈엔 침팬지나 고릴라나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침팬지와 우리가 침팬지와 고릴라의 관계보다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유인원이라는 존재 자체에 무지하다. 설사 안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을 그냥 원숭이라고 부르곤 한다.

 

‘긴팔원숭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번(Gibbon)은 그래서 억울하다. 꼬리가 없는 어엿한 유인원인데, 팔자에도 없는 원숭이라니! EBS 다큐프라임 <긴팔인간>은 제대로 된 이름 하나 갖지 못한 유인원 기번의 생태를 세계 최초로 다룬 자연 다큐멘터리다. 많이 알려진 다른 유인원에 비해 미지의 존재로 남겨진 그들의 생태는 그 생경한 이름만큼이나 신비하다. 게다가 침팬지, 고릴라, 보노보처럼 아프리카에 서식하지 않고 가까운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산다.

▲ 눈으로도 찾기 힘든 녀석들을 카메라로 찍는 건 무모함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예민하고 겁이 많은 기번은 인간을 보는 순간 도망친다. 꽤 거리가 멀어도 의식적으로 나뭇잎 사이로 숨는다. 특히 새끼를 가진 어미는 극도로 경계심을 보이며 최대한 몸을 엄폐한다. ⓒ EBS

아시아의 유인원 기번은 왜 우리에게 잘 안 알려져 있을까? 학명 Hylobatidae가 그 힌트다. ‘나무 위에 사는’이란 뜻처럼 기번은 평균 35m의 나무에서 수상(樹上)생활을 한다. 고릴라나 침팬지는 땅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데 반해, 야생 기번은 거의 땅에 내려오지 않는다. 평생 한두 번 내려올까 말까 할 정도다. 또한 나무 위에 살기 좋게 몸집이 작다. 소형 유인원인지라 다른 대형 유인원보다 더 빠르고 잽싸다. 나무 기둥과 이파리가 빼곡한 밀림(密林)에서 작고 빠른 녀석들을 인간의 눈으로 땅에서 올려다보며 찾는 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잘 안 알려졌고, 그들의 생태를 제대로 찍은 방송국도 없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가장 인간적인 유인원’이다. 인간을 제외한 유인원 중 유일하게 일부일처제 사회를 구성해 부부가 두세 명의 자녀를 양육하며 핵가족 생활을 한다. 주로 팔을 이용해 움직이지만, 걸을 땐 허리를 곧추세우고 두 발로 움직이는 직립 이족보행으로 이동한다. 또한 인간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음악도 한다. 인간 소프라노처럼 노래 부를 수 있게 성대 조절 능력이 발달했다. 부부 사이가 좋을수록 노래를 더 자주 더 길게 부른다. 역할을 나눠 합창하는데, 노래엔 정해진 형식이 있고 반복되는 운율이 있다. 멀게는 6.5km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맑고 큰소리로 노래 부른다. 보이진 않고 들리는 존재. 그래서 더 신비하다.

▲ 이 다큐멘터리가 다른 자연 다큐멘터리와 다른 점은 소위 말하는 ‘먹고 먹히는’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극적인 구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보여주고자 한 것이 유인원 기번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 EBS

눈으로도 찾기 힘든 녀석들을 카메라로 찍는 건 무모함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예민하고 겁이 많은 기번은 인간을 보는 순간 도망친다. 꽤 거리가 멀어도 의식적으로 나뭇잎 사이로 숨는다. 특히 새끼를 가진 어미는 극도로 경계심을 보이며 최대한 몸을 엄폐한다. 멸종위기의 야생 유인원을 다루다 보니 다른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세트촬영을 할 수도 없었다.

 

한 가지 희망은 야생 영장류 학자들이 이들을 오랜 시간 쫒아 다녔다는 것이다. 유인원은 마치 인간처럼 처음엔 낯선 대상에 호기심을 보이다 금방 지루해하고 피하다 포기하는 습성이 있다. 제인 구달이 이것을 이용해 야생 침팬지 연구에 성공했고, 태국의 브로클만 교수도 같은 방식으로 흰손기번을 40년 넘게 연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과학자들도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고유종 자바기번을 10년 전부터 연구해오고 있다. <긴팔인간>은 브로클만 교수와 국내 최초의 야생 영장류 학자 김산하 박사의 자문을 받아 그들의 방식 그대로 촬영을 시도했다.

 

새벽 5시 경 야생 기번이 잠에서 깰 때부터 다시 잠자리에 드는 오후 5시까지 계속 땅에서 따라다녔다. 또한 나무 위에서의 촬영도 병행했는데, 특수 제작한 플랫폼을 35~40m 높이의 나무 여러 군데에 설치한 후 매일 카메라 감독이 올라가 위장 상태로 대기하다가 촬영했다. 책상 하나 남짓한 크기의 공간에서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촬영한 김용 감독과 무거운 망원렌즈를 들고 정글에서 야생 유인원을 쫓아다닌 이창열 감독이 고마울 따름이다. 처음 보는 제작진과 망원렌즈라는 무섭게 생긴 장비에 경계하던 기번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거리를 주기 시작했다. 2년의 제작 기간 동안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듯 촬영한 끝에 18여 종의 기번 중 5종의 야생 기번의 다양한 생태를 화면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세계 최초로 기번이 이웃 기번과 싸우는 야생 전투 신을 찍었고, 진도 6.1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실제 기번이 보여준 행동도 촬영했다. 자연재해 앞에서 그들은 마치 매뉴얼이 있는 듯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 내가 쳇을 쳐다보면 그 시선을 인식하고 쳇이 나를 쳐다본다. 나와 같은 눈코입을 가진 존재와의 교감. 유인원을 만난다는 것이 다른 동물, 식물을 만나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 EBS

이 다큐멘터리가 다른 자연 다큐멘터리와 다른 점은 소위 말하는 ‘먹고 먹히는’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극적인 구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보여주고자 한 것이 유인원 기번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루는 단순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가족의 안위를 확인한 뒤, 먹이를 찾아 움직이며 먹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오후엔 가족끼리 털을 골라주며 유대감을 확인하거나 서로 놀다가 밤이 되기 전 포식자를 피해 잠자리 나무를 고른 뒤 나뭇가지 위에서 잔다. 먹고 싸고 놀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자고. 35m 나무 위에 사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는 폭우가 쏟아지고 난 뒤 날이 개자, 한 녀석이 감기에 걸린 듯 연신 재채기를 하는데 너무 사람 같고 귀여워 한참을 웃었다. 긴 팔을 가진, 나무 위의 작은 인간. 프로그램명 <긴팔인간>은 시청자가 긴팔원숭이라고 알려진 유인원 기번을 보며 우리 인간의 원형을 발견하길 바라며 지은 제목이다.

 

“침팬지는 자연이 인간에게 파견한 대사다.” 제인구달의 이 말은 유인원과 인간의 연결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다. 우리는 별 이유 없이 우리와 닮은 유인원을 보면 짐짓 웃게 된다. 최근 SNS에선 동물원 오랑우탄이 인간이 보여주는 마술을 보고 ‘빵’ 터지는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혹성탈출’이라는 영화를 보며 정말 유인원이 사람을 지배하는 날이 올지 상상하기도 한다. 나 또한 이 프로그램을 처음 기획하게 된 것은 <하나뿐인 지구-동물권리 특집 유인원, 사람을 고발하다> 편을 제작하면서다. 미국에서 벌어진 유인원 인격권에 대한 법적 논쟁을 다뤘는데, 솔직히 침팬지의 높은 지능에 깜짝 놀랐다. 암에 걸린 오랑우탄에 인간과 똑같은 항암 치료를 한 사례도 취재하며 유인원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다.

 

기번은 미지의 유인원이다. 우리가 잘 몰랐던 아시아의 신비한 존재. 태국 밀림에서 내가 주로 따라다닌 녀석은 33살의 가장 쳇인데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난다. 처음엔 도망가거나 날 무시하는 척하더니 일 년 가까이 연을 맺자 마치 날 안다는 듯 조금은 편하게 행동한다. 7m 남짓 가까이 와줬을 땐 세상에 녀석과 나밖에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쳇을 쳐다보면 그 시선을 인식하고 쳇이 나를 쳐다본다. 나와 같은 눈코입을 가진 존재와의 교감. 유인원을 만난다는 것이 다른 동물, 식물을 만나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도 유인원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좋은 출발점은 우리가 유인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긴팔인간>은 유인원 세계로의 초대장이다. 기번을 보고 들으며 느꼈던 그 감동이 많은 사람들과 공유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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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진 2022-01-17 07:11:50
오래 전 기사 이지만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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