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⑫] 하이든과 소나타 형식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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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⑫] 하이든과 소나타 형식의 완성
  •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 승인 2017.03.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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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3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사상은 음악에서 소나타 형식을 낳았다. 주제가 제시되고(제시부) 갈등과 발전을 거친 뒤(전개부)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는(재현부) 소나타 형식은, 현실의 모순을 합리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인간 이성의 움직임을 닮았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성은 정치에서 시민혁명으로, 음악에서 소나타 형식으로 결실을 맺었다. 소나타 형식은 고전 시대와 낭만 시대에 다양한 변화를 겪었지만, 언제나 그 시대의 인간 정신을 반영하는 기본적인 음악 형식으로 남았다.

 

소나타는 ‘음악 형식’ 뿐 아니라 ‘기악 독주곡’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됐다. 바로크 시대 초기에 모든 기악곡을 통틀어 부른 ‘소나타’는,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와 실내 소나타(Sonata da camera)로 분화한 뒤 차츰 기악 독주곡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됐다. 따라서 ‘소나타’란 말은 요즘도 다른 차원의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악곡 형식’으로서의 소나타와 ‘연주 형태’로서의 소나타는 18세기 중엽 거의 동시에 형성됐고,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손으로 완성되어 베토벤과 후세에게 전해졌다.

 

바흐와 헨델의 동갑내기 작곡가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는 소나타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1709년 로마에서 헨델과 건반 연주 실력을 겨룬 적이 있는데, 하프시코드 실력은 스카를라티가 조금 나았지만 오르간 연주는 헨델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 뒤 스카를라티는 헨델 얘기만 나오면 성호를 그으며 찬탄을 표했다고 한다. 그는 스페인 왕비 마리아 바르바라의 스승으로 25년간 마드리드에 머물며 555곡의 하프시코드 소나타를 작곡했다.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는 주제의 선율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갈랑 양식’과는 거리가 있지만 신선한 악상, 발랄한 테크닉, 긴밀한 짜임새로 오늘날도 많은 청중들을 매혹시킨다. 그의 D장조 소나타 K.119*는 스페인 전통 무용을 묘사하듯 흥겨운 케스터네츠와 스페인 기타의 리듬이 어우러진다. (그라우트 <서양음악사> p.555)

 

 

바흐와 모차르트의 시대, 그 사이를 이어준 징검다리는 바흐의 아들들이었다. ‘북독일의 바흐’로 불린 둘째 아들 엠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는 아버지 바흐의 '학구적 양식'(learned style)과 새로운 유행인 ‘갈랑 양식’을 구분하고, “‘학구적 양식’이 교회 음악에 적합한 반면, 극장 음악이나 실내 음악에는 ‘갈랑 양식’이 제격”이라고 했다. 그는 28년 동안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일하며 많은 작품을 썼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건반을 위한 소나타였다. <프러시아 소나타>(1742)와 <뷔르템부르크 소나타>(1744)는 두 주제가 등장하는 제시부와 뚜렷한 전개부를 갖춘 소나타 형식으로,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구성된 고전 소나타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는 <올바른 건반악기 연주 기법>(1753)에서 연주자는 기술만 갖춘 ‘조련된 새’에 그쳐서는 곤란하며, ‘영혼으로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감정양식(Empfindsamerstile)’은 하이든, 모차르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엠마누엘 바흐의 건반음악을 열심히 공부한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그는 아버지고, 우리는 모두 그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다. 바흐의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찬 바흐(1735~1782)는 1762년부터 영국에서 활약하여 ‘런던의 바흐’로 불렸다. 이탈리아의 유려한 선율과 화음을 익힌 그는 런던을 방문한 8살 모차르트의 협주곡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교향곡도 이 시기에 다양한 경로로 발전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서곡은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세 부분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는데, 이 서곡이 독립하고 확대되어 세 악장의 교향곡으로 진화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32번 G장조 K.318은 서곡과 구별하기 어려운 교향곡의 원래 형태에 가깝다. 밀라노의 삼마르티니(Giovanni Batista Sammartini, 1700~1775)는 오페라나 종교 음악보다 실내악과 관현악에 능통했는데, 갈랑 양식의 교향곡을 80곡 남겨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초기 교향곡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관현악단은 도시마다 악기 편성과 규모가 달랐다. 만하임 궁정 악단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자랑했다. 영국의 음악사가 찰스 버니는 이 악단을 본 뒤 “모든 병사가 장군으로 이뤄진 군대”라고 썼다.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1757)와 아들 칼 슈타미츠(Carl Stamitz, 1745~1801)는 교향곡에서 급격히 상승하는 음계인 ‘만하임 로켓’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기법인 ‘만하임 크레센도’를 구사하여 환호를 받았다. 모차르트는 1777년 이 악단의 연주를 듣고 “클라리넷이 포함된 오케스트라가 교향곡을 연주할 때의 찬란한 효과”를 찬탄해 마지 않았다.

 

교향곡의 역사를 결정한 것은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과 헝가리의 에스터하치 궁정 악단이었다. 하이든이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것은,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세 악장에 당시 인기 있던 메뉴엣을 넣어서 네 악장의 교향곡 형식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하이든은 현악합주에 목관과 금관을 더한 2관 편성의 에스터하치 궁정 악단을 위해 교향곡을 썼다. 도시마다 다른 형태로 발전하던 관현악단은, 결과적으로 하이든의 교향곡에 맞춰서 악기 편성을 표준화시킨 셈이 됐다.

 

하이든은 따뜻하고 친절한 품성, 온유한 리더십으로 ‘파파 하이든’이라 불렸다. 이러한 그의 선의와 유머는 음악으로 표현됐다. 1762년부터 30여년 동안 에스터하치 가문의 궁정 악장으로 일한 그는 엄연히 하인 신분이었지만, 탁월한 능력으로 에스터하치 공의 신임을 얻어서 일정한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 하이든은 ‘귀족의 종’이 아니라 ‘음악의 종’을 자처했다. 그는 훗날 누군가 자신을 칭찬하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케스트라의 지도자로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어떤 게 감동을 주고 어떤 게 취약한지 관찰할 수 있었다.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고, 신경에 거슬리거나 방해할 사람도 없었으니 독창성을 발휘해야 할 밖에.”

 

104곡에 달하는 그의 교향곡 중 45번 F#단조 <고별>은 그의 인간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1772년,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치 공작은 새로 지은 여름 궁전에 머물렀다. 악단의 음악가들은 아이젠슈타트의 집을 떠나 이곳에서 저녁마다 공작을 위해 연주했는데, 11월이 다 가도록 공작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자 가족이 그리워서 미칠 지경이 됐다. 단원들은 해고될까봐 두려워서 말을 못 했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하이든은 새 교향곡을 작곡하여 공작 앞에서 연주했다. F#단조의 슬픔에 가득한 곡은 4악장이 끝날 무렵 갑자기 아다지오로 바뀌었고, 자기 파트를 마친 연주자들은 한명씩 촛불을 끄고 퇴장했다. 공작은 당황했지만 곧 음악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마지막으로 두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가냘픈 선율을 연주한 뒤 자리를 뜨자 에스터하치 공은 말했다. “교향곡이 끝났군. 음악가들이 모두 떠났으니 나도 이제 가야겠구만.” 다음날, 공작은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12월 초, 가족이 기다리는 아이젠슈타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칫 소요사태와 대량 징계로 번질 수 있었던 위기가 ‘파파 하이든’의 지혜로 평화롭게 해결된 것이다.

 

하이든의 모든 작품은 공작에게 저작권이 있었고, 아무리 뛰어난 음악가라도 독자적인 예술가로 대접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하이든의 재량권과 자율성은 계속 확대됐다. 1779년, 에스터하치 공은 하이든의 고용 계약 중 “공작의 허락 없이 외부의 작곡 위촉을 받을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하여 좀 더 넓은 시민들에게 악보를 팔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하이든은 교향곡 76번~78번을 출판하며 “아름답고 우아하고 지나치게 길지 않은 교향곡들”이라고 소개했다. 이미 ‘절반의 자유음악가’로서 폭넓은 대중의 취향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1790년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치 공이 세상을 떠나자 하이든은 좀 더 자유로운 몸이 됐다. 그 해말 하이든은 흥행사 잘로몬의 초청으로 런던을 방문, 헨델 이래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영국 매스컴은 그의 도착을 떠들썩하게 보도했고, 1월 8일 첫 연주회를 찾은 황태자는 입장하자마자 하이든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지 3세와 왕비는 아예 런던에 머물러 달라며 윈저 궁을 숙소로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런던의 교향악단은 에스터하치 궁정 악단보다 2배 규모였고, 하이든은 이에 걸맞는 대교향곡으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두 차례의 런던 방문에서 연주한 12곡의 교향곡(93번~104번) 중 94번 <놀람>은 하이든의 유머러스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당시 청중들은 연주 도중에 떠들다가 느린 악장이 시작하면 졸기 일쑤였는데, 하이든은 2악장 주제를 여리게 반복한 뒤 갑자기 큰 소리로 “꽝” 연주하여 청중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교향곡 100번 <군대>, 101번 <시계>, 103번 <북소리> 등 한 곡에 하나씩 재미있는 요소를 넣어서 청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하이든은 자기를 환영해 준 영국 팬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훗날 “영국에서 보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헝가리의 에스터하치 궁에서 창작된 교향곡이 국경을 초월하여 런던의 청중들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의 ‘공통 관습 시대’가 열렸음을 뜻한다. 런던으로 떠나기 직전,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함께 식사를 했는데, 이 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전해진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이 여행길에서 고생할 거라며 살짝 놀렸다. “파파는 할 줄 아는 외국어도 없으니 더 힘드실 거에요.” 하이든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내 언어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듣지.” 이탈리아의 성악, 독일의 기악, 프랑스의 무곡이 융합되어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 어법이 탄생했고, 하이든의 교향곡은 이러한 보편성을 갖고 있었기에 두루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이든은 <황제>, <종달새>를 비롯, 70여 곡의 현악사중주곡을 남겼다.* 바이올린 2명, 비올라와 첼로 각 1명 등 4명이 마주 보며 연주하는 현악사중주는 18세기 후반의 사교 활동이었는데, 하이든에 의해 대표적인 실내악 장르로 격상됐다. 1781년 발표한 6곡의 <러시아 사중주곡>은 모차르트에게 큰 자극을 주었고, 모차르트는 공들여 작곡한 6곡의 현악사중주곡을 하이든에게 헌정하여 감사를 표했다. 1785년 모차르트의 새 현악사중주곡을 함께 연주한 뒤 하이든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당신의 아들은 지금까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작곡가”라고 극찬했다.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하지 않고 흔쾌히 인정한 하이든의 소탈한 품성을 엿보게 하는 일화다.

 

하이든은 에스터하치 공의 극장에서 공연할 오페라도 20편 가량 작곡했다. 1776년, 그는 당시 문화계 인사들의 약전(略傳)인 <오스트리아의 학자>에 실릴 자신의 대표작 목록을 만들었는데, 여기엔 오페라 <약제사>, <오판된 부정>, <뜻밖의 만남>이 포함된 반면 교향곡과 현악사중주곡은 하나도 없었다. 하이든은 자신의 오페라를 자랑스러워 한 게 분명하다. 1781년, 파리의 콩세르 스피리튀엘 관계자가 자기 오페라를 극찬했다는 얘기를 들은 하이든은 자못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들이 내 오페레타 <무인도>와 최근에 쓴 오페라 <보상받은 충성>을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요. 장담컨대 파리나 빈에서는 그런 작품이 연주된 적이 없을 거요.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시골이니, 그게 나의 불운이지요.” 영국인들은 하이든을 ‘음악의 셰익스피어’라 부르기도 했다.

 

하이든의 명성은 이베리아 반도까지 퍼졌다. 1785년 스페인의 카디츠 성당이 위촉한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남긴 일곱 말씀에 서곡과 에필로그를 더해 9악장으로 구성한 관현악곡이었다. 하이든은 이 곡을 피아노 독주, 현악사중주, 오라토리오로 편곡하여 널리 알렸다. 이 곡은 규모나 감정의 깊이로 볼 때 하이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하이든은 런던에서 본 헨델의 <메시아>에서 큰 충격을 받고 처음부터 다시 음악을 공부하는 자세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작곡에 착수했다. 밀턴의 <실락원>을 토대로 한 영어 대본을 빈 황실도서관장 반 슈비텐 남작이 독일어로 번역해 주었다. 하이든은 이 작품에 자신의 모든 예술혼을 쏟아부었다. “나는 <천지창조>를 쓸 때만큼 경건한 마음가짐이 된 적이 없다. 매일 무릎을 꿇고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버틸 힘을 달라고 신에게 간청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p.145~p.146) 1798년 이 작품을 완성됐을 때 하이든은 심각한 산후우울증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1799년 3월 부르크테아터에서 하이든의 지휘로 초연했고, 수익금은 세상을 떠난 음악가들의 부인과 자녀들을 위해 기부했다.

 

하이든은 전 유럽의 존경을 받으며 빈에서 여생을 보냈다. 1808년 3월, 그의 76회 생일을 축하하는 갈라 콘서트가 빈 대학에서 열렸다. 도심에는 경찰이 통제해야 할 정도로 많은 군중이 모여서 “하이든 만세!”를 외쳤다. 살리에리가 <천지창조>를 지휘했고, 베토벤은 연로한 하이든의 손과 이마에 열정적으로 입 맞추었다. 기력이 약해진 하이든은 ‘하늘은 주의 영광 드러내고’ 합창을 들은 뒤 청중들의 기립박수 속에 연주회장을 떠났다. 이것이 대중 앞에 나타난 하이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듬해, 빈은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포연에 휩싸였지만, 나폴레옹은 하이든의 집 앞에 보초를 세워서 존경을 표시했다. 폭음이 잦아들 무렵인 1809년 5월 마지막 날, 하이든은 눈을 감았다.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은 이미 세상에 나와 있었다. 하이든이 ‘음악의 종’으로 77년의 삶을 마무리할 때, 음악의 혁명은 이미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건 18년 전이었다.

 

* 'K'는 스카를라티의 작품 목록을 정리한 하프시코드 연주자 겸 음악사가 랄프 커크패트릭(Ralph Kirkpatrick)의 머릿글자에서 따 왔다.

 

** <세레나데>는 하이든이 아니라 호프슈테터(Roman Hoffstetter) 신부가 취미삼아 작곡한 것으로 확인됐다. 요즘 음반에는 작곡자 이름을 ‘하이든-호프슈테터’라고 병기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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