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피고인>은 그 주인공인 박정우 검사라는 캐릭터가 처한 처지만 두고 보면 그 기획의도에 담겨진 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심지어 ‘피고인 정서’라고 불러도 될 만한 것들이다. 즉 무고한 이가 억울한 살인죄 누명을 쓰고 감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상황. 그것도 자신의 가족을 살해했다는 충격적인 누명이기에 심지어 자기방어적인 망각의 기제가 발동하여 당시 상황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혹여나 자신이 진짜 그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빠져버린 상황이 그렇다.
이 상황은 고스란히 현재 우리네 대중들이 처해 있는 것과 정서적인 공감대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그저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온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현실은 갈수록 나빠져 있다. 그리고 정작 그렇게 만든 이들은 저 뒤로 숨어 있고 이렇게 나빠진 현실이 바로 우리 탓이라고 말한다. 하루하루 버텨내며 살아가는 것조차 숨 가쁜 상황에 몰리다보니 이런 기억 속에 각인된 거짓들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은 피해자인 서민 대중들이 오히려 죄책감까지 느껴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만들어낸다.
<피고인>이 박정우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으로 그려내는 건 그래서 지금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시대정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누명을 쓰고 있는 인물이 그 누구에게도(심지어 검사인 친구에게조차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결국 혼자 살아 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현실. 이것 또한 우리네 대중들이 처한 현실 그대로가 아닌가.
여기에 지성이라는 든든한 연기자의 열연은 그 박정우라는 캐릭터에 대중들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하다. 눈에 핏발이 선 채 억울해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 진실을 밝히려는 안간힘은 바로 지금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답답함과 억울함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고인>이 어떤 가치를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정확히 여기까지다. 이 드라마는 그러한 시대정서를 갖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온전하고 통일성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 시청자들의 공감을 가져가기보다는 그 정서를 역으로 이용해 시청률을 끌어내는 ‘막장의 공식’으로 이끌고 간다. 박정우는 마치 늪에 빠져버린 것처럼 한 가지 상황을 애써 벗어나면 그걸 다시 뒤집어 원점으로 돌려놓는 무한 반복의 지옥에 빠져있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우에 빙의되어 있는 시청자들이 끝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끌려 다니게 만들려는 드라마의 숨겨진 의도다.
막장드라마의 공식이 그렇다. 답답한 고구마 전개나 그런 민폐 캐릭터를 세워놓고 시청자들을 답답하게 만들어 놓은 후 끝없이 그 해결을 지연시킴으로서 동력을 얻는다. 그것이 드라마의 한 가지 작법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활용해 그 목표를 시청률로 삼기 시작하면 시청자들은 일종의 동원된 관객으로 전락되어 버린다. 막장드라마가 일종의 미끼를 던져 시청자들을 계속해서 낚는 방식을 활용하듯이 <피고인>은 박정우라는 인물이 하려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좌절시킴으로서 시청자들을 낚는다.
그러면서 <피고인>은 여기에 감옥 소재의 장르물이라는 포장을 씌워놓는다. 이 포장이 중요한 건 막장드라마라는 외피를 숨김으로써 시청자들이 안심하고(?) 그 덫에 빠지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자주 봐왔던 감옥 장르물이 우리네 막장드라마의 공식과 만나 괴이한 괴물드라마가 탄생한다. 흔히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지칭으로 막장드라마를 이야기하듯 <피고인> 역시 마찬가지 시청패턴을 보인다. 다만 그것이 장르물에서 시도되었다는 점이 특이하게 보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30%를 넘보는 시청률을 얻었지만 <피고인>은 안타깝게도 애초에 가져왔던 시대정서를 휘발시켰다. 점점 엔딩으로 다가갈수록 또 시청률이 높아지면 질수록 그 평가가 혹독해지는 건 그래서다. 대중들이 느끼는 현실의 답답함을 반영하거나 위무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용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