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⑬] 모차르트 : 사랑과 자유의 근대정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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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3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흔히 ‘음악사상 최고의 천재’로 불리지만, 그의 음악이 인류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단순히 ‘천재성’ 때문이라고 말하면 충분치 않다. 5살 때 작곡을 시작했고, 배우지도 않은 바이올린을 척척 연주했고, 바티칸의 시스틴 성당에서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한번 듣고 외워서 기록했고, <돈조반니> 서곡을 하룻밤 사이에 작곡했고, 바이올린 연주자의 악보를 써 주면서 자기가 맡은 피아노 파트를 악보 없이 연주했다는 것은 물론 놀라운 일이다. 그는 35년 짧은 생애에 남들이 베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을 썼고, 그 작품 하나하나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지닌 보편적 호소력은 천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모차르트보다 더 많은 작품을 쓴 선배 작곡가도 많고, 멘델스존처럼 어린 시절 모차르트보다 더 조숙한 재능을 보인 작곡가도 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같은 천재가 21세기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만큼 음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왜 아직도 모차르트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에 주목해야 한다. 모차르트의 시대는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하다. 첫째, 음악적인 면에서 그의 시대는 대중음악과 고급예술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은 유일한 시대였다.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음악은 시민들도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계몽시대의 정신을 반영한 음악의 ‘공통관습시대’(common practice period)가 열렸음을 뜻한다. ‘보편적 소통의 언어’로서의 음악은 모차르트에서 완성됐고, 가장 높은 차원으로 승화됐다. 프로이센의 플루트 연주자 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 1697~1773)는 <가로 플루트 연주법>(1752)에서 “여러 민족이 지닌 좋은 요소들을 혼합한 음악이 최상의 음악이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예언을 실현이라도 하듯 모차르트가 나타났다. 모차르트는 6살부터 35살까지 빈, 파리, 런던, 브뤼셀, 암스테르담, 로마, 볼로냐, 나폴리, 베네치아, 만하임, 뮌헨, 프라하,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유럽의 주요 도시를 두루 여행하며 다양한 음악 사조를 흡수하여 최상의 음악을 빚어냈다. 하이든이 에스터하치 공의 영지에 머물며 홀로 독창성을 키웠다면, 모차르트는 전 유럽을 직접 누비며 공부하여 드넓은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다.

 

베토벤 이후 모든 위대한 작곡가들은 독창적인 음악 어법을 치열하게 모색했는데, 이는 모차르트와 다른 방식으로 말하려는 시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전위적인 실험의 결과 클래식은 점점 대중과 멀어지는 길을 걸어야 했다. ‘공통관습시대’는 20세기 초까지 지속됐는데, 최초이자 최고의 열매인 모차르트의 음악은 모든 작곡가들을 잡아끄는 일종의 ‘구심점’으로, 시대가 흘러도 변함없이 빛나는 영감의 원천이 됐다.

 

둘째, 모차르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시민사회의 출발점에서 활동한 ‘최초의 시민 음악가’였다. ‘모차르트 쿠겔’이 상징하듯 그의 음악은 달콤하지만, 그의 시대는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18세기 후반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격랑친 근대 세계의 출발점이었다. 그가 태어난 1756년,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인 7년 전쟁이 일어나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서아프리카, 남아시아, 그리고 유럽의 전선에서 격돌했다. 이 전쟁이 끝날 무렵인 1763년 꼬마 모차르트가 ‘평화의 사절’처럼 전 유럽을 여행하기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가 어른이 될 무렵인 1775년 미국이 독립전쟁에 휩싸였고, 그 여파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그의 짧은 생애 동안 모든 이의 천부 인권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것이다.

 

모차르트는 근대 세계가 탄생한 시기, 정치 · 경제의 격변에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계몽사상에 깊이 공감하여 프리메이슨 회원으로 활동했고, 음악으로 자유 · 평등 · 우애의 이상을 노래했다. 1786년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은 모든 이의 평등을 예찬했고, 이듬해 프라하에서 막을 올린 <돈조반니>는 부패한 귀족 사회의 몰락을 경고했다. 두 작품이 발표된 것은 프랑스 혁명 전야였다. 1791년, 생애 마지막 해에 공연된 <마술피리>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메시지로 시민들에게 큰 갈채를 받았다. 모차르트의 친구 야크빈은 “천재를 만드는 것은 사랑, 오직 사랑 뿐”이라고 모차르트를 예찬했다. 그 지적대로, 모차르트의 음악은 ‘사랑’으로 가득하다. 근대의 출발점에서 활약하여 근대의 황혼인 21세기까지 빛을 던지고 있는 모차르트는 ‘최초의 시민 음악가’로 불릴 만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아버지는 <장난감 교향곡>의 작곡자이자 <바이올린 교본>(1756)을 쓴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였다. 그는 볼프강의 뛰어난 재능을 확인하자 주저 없이 자기 캐리어를 접고 아들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잘츠부르크의 기적’을 널리 알리고 음악가로서의 앞날을 개척하기 위한 3년간의 유럽 왕실 순례는 생각만큼 큰 수익을 가져오지 못했고, 여행에 동행한 누나 난넬의 회고처럼 “곡예단처럼 아이들을 끌고 다녔다”고 비난받을 여지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모차르트에게 이 여행은 최상의 교육 기회였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11살 모차르트는 이미 오페라와 교향곡을 쓰는 어엿한 작곡가가 돼 있었다. 이어지는 세 차례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당대의 오페라 양식은 물론 삼마르티니의 교향곡과 마르티니 신부의 대위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볼로냐 음악원의 명예회원으로 황금박차 훈장까지 받아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보다 큰 도시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겠다는 희망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밀라노의 페르디난트 공은 14살 모차르트를 궁정악장으로 채용할지 여부를 누나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의논했는데, “거지처럼 떠도는 음악가들을 궁정에 두면 안 된다”는 회신을 받고 채용 계획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궁정의 박대와 몰이해는 젊은 모차르트에게 쓰라린 경험이었다. 22살 때 어머니와 함께 한 파리 여행은 이 아픔의 극한을 맛보게 했다. 파리에서 모차르트는 교향곡 D장조를 지휘했고, 무용곡 <레 프티 리앵> 등 가벼운 곡들로 체류비를 벌었다. 하지만 오페라를 무대에 올릴 기회는 없었고, 현지 음악가들의 방해로 협주교향곡의 악보가 실종되어 연주회가 취소되는 등 곤란을 겼었으며,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차르트에게 베르사유 궁정 오르가니스트 자리도 내주지 않았다. 꼬마 모차르트에게 갈채를 보냈던 파리 사람들은 어엿한 대가로 성장하여 나타난 모차르트를 알아주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까지 일어났다.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와 피아노 소나타 A단조 K.310은 이 시기 모차르트의 심경을 반영한 작품이다. 그해 마지막날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 쓴다. “많은 슬픔,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몇 가지 참을 수 없는 일로 이뤄진 제 일상….”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 A단조 K.310 (피아노 마리아 조앙 피레스) 바로 보기

 

 

모차르트 바이올린소나타 E단조 K.304 (피아노 클라라 하스킬, 바이올린 아르투어 그루미오)

1악장 알레그로 바로 보기

2악장 템포 디 메뉴엣 바로 보기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프란스 브뤼헨 지휘 18세기 오케스트라) 바로 보기

 

 

모차르트가 새로운 일자리를 원한 것은 잘츠부르크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갈등 때문이기도 했다. 1771년 부임한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의 급료를 올려주는 대신, 여행을 떠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고, 수행원들이 식사할 때는 요리사 옆에 앉아야 하는 ‘하인’의 의무를 요구했다. 자유 없이 살 수 없었던 모차르트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1773년에 작곡한 G단조 교향곡 K.183은 콜로레도 대주교의 억압에 대한 모차르트의 ‘자유 선언’이었다. 모차르트는 1780년 말, 오페라 <이도메네오> 공연을 위해 한 달 휴가를 내고 뮌헨에 갔는데, 예상보다 일이 길어져서 석 달 만에 빈의 대주교 일행과 합류했다.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험한 욕설을 퍼부으며 나무랐고, 모차르트는 사직하겠다고 응수했다. 1781년 6월 8일, 대주교는 부관 아르코 백작을 시켜서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냈다. 음악사상 최초의 자유음악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5살, 자유의 몸이 된 모차르트가 제일 먼저 떠올린 고객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갓 즉위한 요젭 2세였다. 20년 전 만난 6살 꼬마 모차르트를 기억하고 있던 요젭 2세는 어른이 된 그를 우호적으로 맞아주었다. 황제는 17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차르트를 궁전으로 초청하여 당대의 피아니스트 무치오 클레멘티와 경연하게 했고, 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독일어 오페라 <후궁에서 구출하기>의 작곡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고용돼 있을 때는 미사곡 등 종교음악과 디베르티멘토 등 가벼운 오락음악을 주로 작곡했지만, 자유음악가가 된 뒤에는 진지한 오페라와 함께, 화려한 기량을 뽐낼 수 있는 피아노 협주곡에 주력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오페라는 대성공이었고, 모차르트는 자신이 기획한 예약음악회에서 새로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을 연주하여 갈채를 받았다. K.413부터 K.415까지 빈 시절의 첫 협주곡들에 대해 모차르트는 “너무 어렵지도, 너무 쉽지도 않고, 꼭 중간쯤 되는 곡”으로, “전문가만 알아들을 수 있는 패시지들이 여기저기 있지만, 거리의 마부들도 휘파람으로 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인미답의 자유 음악가로서 최대 다수의 청중에게 다가서려는 모차르트의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잘츠부르크에서 작곡한 창의성 넘치는 Eb장조 협주곡 K.271에 비해 빈 초기 작품들이 온건하게 들리는 것은, 당시 청중들의 취향을 존중하여 흥행을 도모한 결과였을 것이다. 1784년 모차르트의 연 수익은 3,300 굴덴 가량이었는데, 이는 같은 시기 하이든이 에스터하치 공으로부터 받던 연봉의 3배가 넘는 액수였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12번 A장조 K.414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바로 보기

 

 

빈에서의 성공은 아버지 레오폴트와 화해의 길을 열어주었다. 어머니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아들이 어머니를 잘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질책했고, 부자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다. 더 큰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겠다는 욕구는 두 사람이 같았지만, 아들이 선택한 자유음악가의 길은 아버지가 볼 때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아들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범한 가정의 콘스탄체 베버(1762~1842)와 결혼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됐다. 부자간의 갈등은 낡은 체제와 새로운 체제 사이의 갈등, 그 축소판과 같았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성공을 알렸고, 1785년 2월 잘츠부르크의 아버지가 빈의 아들을 방문함으로써 화해가 이뤄졌다. 2월 12일, 하이든이 모차르트의 새 현악사중주곡들을 함께 연주한 뒤 레오폴트에게 “당신의 아들은 제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찬양했을 때 아버지의 기쁨은 최고조에 이르렀을 것이다. 3월 10일 초연한 C장조 협주곡 K.467의 아름다운 안단테에서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소나타 C장조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경의를 표했고, 이 곡을 들은 레오폴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모차르트는 1784년 12월, 자유 · 평등 · 우애를 기치로 하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는데, 빈을 방문한 아버지 레오폴트도 가입하여 부자가 나란히 회원이 됐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 C장조 K.467 중 2악장 안단테 (피아노 알프레트 브렌델) 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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