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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⑭] 모차르트 : 사랑과 자유의 근대정신 (2)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3.17 1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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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3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785년 2월 11일 초연한 D단조 협주곡 K.466은 검붉은 어둠에 잠긴 ‘악마적’ 조성으로, 피날레를 당당한 D장조로 마무리하여 ‘고뇌에서 환희로’ 가는 베토벤을 예감케 한다. 이 곡부터 C단조 협주곡 K.491을 거쳐 마지막 Bb장조 협주곡 K.595까지 8곡의 협주곡은 한 곡 한 곡 모차르트의 원숙한 개성을 담아 낸 걸작이다. 모차르트의 기악곡은 장조로 된 곡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듣는 이를 즐겁게 할 목적이면 자연스레 장조를 택했지만 자신의 깊은 내면을 토로하기에는 단조가 더 적합했다. 모차르트는 새 협주곡을 선보인 뒤 즉흥연주로 청중들을 압도하곤 했다. 이 즉흥연주가 모두 악보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환상곡 D단조 K.397과 C단조 K.475를 통해 그의 즉흥연주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 D단조 K.466 (피아노 클라라 하스킬) 바로 보기

 

 

모차르트 환상곡 C단조 K.475 (피아노 발렌티나 리시차) 바로 보기

 

 

D단조 협주곡을 비롯, 모차르트의 새 협주곡들은 황제 요젭 2세를 비롯한 청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가사가 있는 오페라는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에서 3년 만에 가까스로 검열을 통과한 보마르셰의 희곡을 토대로 작가 다 폰테가 대본을 썼는데, 구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혁명을 예견케 한 이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자는 발상은 모차르트의 것이었다. 1785년 12월 완성됐지만, 정치적 논란과 경쟁자 살리에리파의 방해공작에 휩싸여 1786년 5월 1일에야 초연할 수 있었다. 황제는 처음엔 이 작품을 탐탁찮아 했지만, 결국 모차르트의 손을 들어주며 공연을 허락했다. 귀족을 적절히 견제하는 건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해롭지 않았고, 이는 황제의 후원에 기대서 귀족사회를 비판하려는 모차르트의 의도와 맞아 떨어졌다.

 

원작의 일부 ‘불온한’ 대사는 오페라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신들 대영주는 신분, 재산, 지위를 자랑스러워하지요! 그러나 태어나는 고통을 빼면 그 축복을 받기 위해 당신들이 한 게 무엇이요?” 귀족들은 피가로의 4막 대사가 불편했을 것이다. 특히 백작이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장면에 귀족들은 “혐오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페라는 빈에서 9번 공연된 뒤 막을 내렸다. 귀족들은 모차르트에게 등을 돌렸고, 예술적 취향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빈 시민들은 모차르트 음악이 어렵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차르트가 ‘성공의 정점’에서 발표한 최고의 걸작 <피가로의 결혼>이 그의 가난과 고독의 씨앗이 됐다는 건 역설적이다.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피날레 (영어 자막, 백작이 사과하는 장면 3:10) 바로 보기

 

 

<피가로의 결혼>은 그해 말, 정치적 변방인 프라하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프라하의 청중들은 사랑과 평등을 예찬한 이 작품에 열광했고, 거리와 무도회장은 온통 피가로의 선율로 넘쳐났다. 모차르트는 프라하 시민들을 위해 새 교향곡 D장조 K.504를 지휘했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에스타테스 극장은 그에게 새 오페라를 위촉했고, 모차르트는 1787년 내내 <돈조반니>의 작업에 몰두했다. 그해 10월 29일 막을 올린 <돈조반니>는 프라하에서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두었다. 바람둥이 귀족 돈조반니가 온갖 악행 끝에 대리석상의 심판을 받아 불구덩이에 떨어진다는 스토리는 부패한 귀족 사회의 몰락을 예고했고, 인간성의 대파노라마에 어울리는 장려한 음악은 듣는 이들을 전율케 했다. 하지만, 이듬해 5월의 빈 공연은 참담한 실패였다. 귀족들은 ‘부도덕한’ 주인공을 내세운 오페라를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고, 공연은 두 번만에 막을 내렸다. <돈조반니>에 대한 비난의 홍수 속에서 모차르트를 옹호한 사람은 하이든, 한 명 뿐이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조반니> 중 1막 피날레, ‘자유 만만세(Viva la Liberta)’ 바로 보기

 

 

요젭 2세는 끝까지 모차르트를 챙겨 줬다. 1787년 말, 빈 궁정 악장 글루크가 세상을 떠나자 황제는 모차르트를 궁정 작곡가로 임명하며 800굴덴의 연봉을 지급하기로 했다. 모차르트는 말썽 많은 오페라 대신 궁정 무도회에서 연주할 가벼운 춤곡을 작곡해야 했다. 마지막 세 교향곡 - Eb장조 K.543, G단조 K.550, C장조 K.551 <주피터> - 은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경제 불황이 빈을 덮쳐 폭동까지 일어났다. 1789년, 모차르트는 빈 초기 시절처럼 예약연주회를 열어서 활로를 모색하려 했지만, 예약한 사람이 황실도서관장인 반 슈비텐 남작 한 명뿐이어서 연주회를 취소해야 했다. 그가 프리메이슨 동료인 푸흐베르크에게 돈을 꿔 달라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베를린, 라이프치히를 여행하며 새 일자리를 구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요젭 2세가 모차르트에게 맡긴 마지막 오페라는 <코지 판 투테>였다. 두 젊은이가 자기 애인의 정조를 시험하는 오락물이었는데, 궁정 악장 살리에리가 ‘부도덕한 내용’이라며 작곡을 회피하자 모차르트에게 차례가 돌아간 것이었다. 모차르트와 다 폰테는 이 작품에서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하녀 데스피나의 입을 통해 “노예의 사슬을 벗어던지라”고 노래했다.

 

1790년, 터키와 전쟁이 터지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17만명의 젊은이가 동원되어 3만3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요젭 2세가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세상을 떠나자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동료 이외에는 기댈 언덕이 없게 됐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에 신경이 곤두선 후임 황제 레오폴트 2세는 급격히 반동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는데, 모차르트는 수행 음악가에서 제외됐다. D장조의 <대관식> 협주곡은 프랑크푸르트의 대관식이 아니라 드레스덴의 궁정음악회에서 초연됐다. 1790년 7월, 프랑크푸르트 장터에서 열린 프랑스 혁명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차르트는 당대의 계몽사상가 치겐하겐을 만난 뒤 빈으로 돌아왔다. “인간들의 피를 쏟게 한 쇳덩이를 녹여서 쟁기를 만들자”고 노래한 프리메이슨 칸타타 K.619는 치겐하겐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모차르트 프리메이슨 칸타타 K.619 바로 보기

 

 

생애 마지막 해인 1791년, 모차르트는 더욱 원숙한 음악세계를 열고 있었다. 여전히 시민사회와 궁정사회 사이에서 방황했지만, 그의 행보는 뚜렷하게 시민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레오폴트 2세의 프라하 대관식에서 공연한 <황제 티토의 자비> K.621은 궁정사회의 요구에 따른 작품이었다. 이번에도 원래 작곡을 의뢰받은 살리에리가 너무 바뻐서 모차르트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티토 황제의 측근인 세스토가 사랑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너그러운 황제가 이를 용서하고 포용한다는 내용인데, 레오폴트 2세 부부는 이 작품을 지루하게 여겼다고 한다. 궁정사회에서 모차르트가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 듯 했다.

 

하지만 빈에서 9월 30일 막을 올린 <마술피리> K.620은 시민사회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프리메이슨 동료인 엠마누엘 시카네더가 대본을 쓴 이 징슈필은 주인공 타미노 왕자와 파미나 공주가 시련을 통해 성숙하여 빛의 왕국을 이어받는다는 내용으로,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면에 드러냈으며, “음악의 힘으로 죽음의 어두움을 기꺼이 헤쳐 나가자”는 가사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유언과 같았다. <마술피리>는 빈에서 100회 이상 공연되며 모차르트에게 마지막 부와 명예를 갖다 주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11월 18일 프리메이슨 회당 개소식에서 칸타타 <우리의 기쁨을 소리 높여 알리세>를 지휘한 뒤 갑자기 앓아누웠고, 보름 뒤인 12월 5일 새벽 1시 숨을 거두었다.

 

모차르트의 사인은 영구미제로 남았다. 당시의 명의 클로제트는 ‘속립열’이라 했지만, 이는 ‘사인’이 아니라 ‘증상’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가 처방을 잘못해서 모차르트를 죽게 만든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연쇄구균 감염에 의한 ‘신장염’이나 ‘류마티즘열’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모차르트의 시신이 실종됐기 때문에 검증할 수 없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푸시킨의 장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와 이를 토대로 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오페라, 그리고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로 이어졌지만 문학적 허구가 분명하다. 황제의 비밀경찰이 독살했다는 설, 모차르트의 연인 막달레나 호프데멜의 남편 프란츠 호프데멜 -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 친구 - 이 질투에 사로잡혀 독살했다는 설, 비밀경찰이 호프데멜의 질투를 이용해서 독살을 사주했다는 설까지 다양한 추측이 난무했지만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모차르트 <마술피리> 피날레, ‘빛의 승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바로 보기

 

 

모차르트는 앓아눕기 직전, 친구 안톤 슈타틀러를 위해 아름다운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를 썼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미완의 <레퀴엠>이다. 검은 옷을 입은 죽음의 사자가 모차르트에게 이 곡을 의뢰했고, 모차르트가 자신의 죽음을 위해 이 곡을 썼다는 신비스런 얘기가 퍼졌지만, 사실은 음악애호가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 사랑하던 아내가 21살로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에서 자신이 지휘하려고 의뢰한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라크리모사’ 8 마디까지 총보를 쓴 뒤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는 부인 콘스탄체의 관리 아래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했다.

 

모든 작곡가들은 그 시대의 자식이다. 하지만, 독창성과 상상력으로 그 시대를 뛰어넘은 작품들만 오래 살아남아 기억되는 법이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차이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살리에리(1750~1825)는 오로지 그 시대의 규범 내에 머물렀다. 모차르트와의 세속 경쟁에서 승리가 분명해 진 궁정 악장 살리에리는 1791년, 비로소 맘 놓고 모차르트의 교향곡 G단조와 <대관식> 미사를 지휘했다. 그는 <마술피리> 공연마다 객석에서 “브라보”를 외쳤다. 그는 75세까지 살면서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를 가르친 교육자로 존경 받았지만 궁정시대의 한계에 머무른 그의 음악은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디터스도르프(1739~1799)도 마찬가지다. 그는 잘 나가는 선배 작곡가로서, 모차르트가 아름다운 악상을 아껴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 적이 있다. 너무 많은 패시지가 나왔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다 듣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다는 지적이었다. 디터스도르프 음악은 ‘공통관습시대’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미래를 가리키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요즘은 거의 듣지 않는다. 반면, 모차르트 음악은 21세기 사람들의 생활 감정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24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따뜻한 우정을 나눴다. 두 사람은 상대의 음악을 존경했고, 프리메이슨 회원으로 자유 · 평등 · 우애의 시대정신을 공유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러시아> 사중주곡에 영향을 받아 6곡의 현악사중주곡을 작곡, 하이든에게 헌정했다.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모차르트의 C장조 사중주곡 <불협화음>에서 배운 바가 없지 않았다. 1790년 말, 하이든이 런던으로 떠날 때 모차르트는 연로한 하이든의 안위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세상을 먼저 떠난 것은 그 자신이었다. 모차르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런던에서 들은 하이든은 “세상은 앞으로 100년간 이와 같은 천재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토벤은 17살 나던 1787년 봄 모차르트를 찾아와서 즉흥연주 실력을 선보였고, 모차르트는 “이 젊은이는 언젠가 세상에 얘깃거리가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여 본으로 돌아가야 했고, 모차르트는 <돈조반니> 작곡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이어지지 않았다. 5년 뒤 베토벤이 다시 빈을 찾았을 때 모차르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후원자 발트슈타인 백작은 젊은 베토벤을 빈으로 보내며 “하이든의 손으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배우라”고 당부했지만, 하이든과 베토벤은 그리 좋은 사제지간이 될 수 없었다. ‘음악의 착한 종’ 하이든과 ‘시대의 반항아’ 베토벤은 애초에 어울리기 어렵지 않았을까.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유산을 거의 독학으로 익혔다.

 

모차르트는 모든 장르의 곡을 썼지만,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오페라였다. 오페라(Opera)란 말은 ‘작품’(Opus)의 복수형으로, 당시에 “작품을 하나 했어” 하면 오페라를 썼다는 뜻으로 통했다. 작곡가가 돈과 명예를 거머쥐려면 오페라로 성공해야 했다. 모차르트는 피아노곡을 작곡할 때도 누가 물어보면 “오페라를 쓰고 있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는 오페라에서 “음악은 가장 끔찍한 상황에서도 귀에 거슬리지 않고 항상 음악으로 남아서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근대 오페라의 기틀을 세웠다.

 

전문가들은 그의 소나타나 협주곡을 이해하려면 오페라를 보러 가라고 권하곤 한다. 그의 기악곡들도 오페라 아리아처럼 노래하기 적합한 주제를 사용하며,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성격이 있다. 이 성격들은 대립하고 갈등하며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승화되곤 한다. 그의 음악은 기악과 성악을 넘나든다. 사람 목소리를 악기처럼 사용한 <엑슐타테 유빌라테> K.165는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으로 보아도 무방하며, <대미사> C단조 중‘ 사람의 몸으로 나시고’(Et Incarnatus Est)는 목관악기와 소프라노가 대등하게 어우러진다. 바이올린 협주곡 3번 G장조는 오페라 <양치기 임금님> K.208의 1막 아리아 ‘고요한 공기’(Aer Tranquillo)와 아주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의 경계도 뛰어넘었다. 드높은 환희를 노래하거나 엄숙한 느낌을 표현할 때 그의 오페라와 미사곡은 구별되지 않는다. 어느 경우든 인간의 진솔한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대미사 C단조 K.427 중 ‘사람의 몸으로 나시고(Et Incarnatus est)’(소프라노 바바라 보니) 바로 보기

 

 

모차르트에 대해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말러, 메시앙 등 후대의 위대한 작곡가들이 남긴 찬사는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드보르작은 프라하 음악원 강의 중 유리창을 열어 보이며 “모차르트는 태양과 같다”고 했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모든 벽을 뛰어넘었다. 대중음악과 고급예술, 종교음악과 세속음악, 기악과 성악의 경계를 뛰어넘은 그의 음악은 마침내 시대의 경계마저 뛰어넘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래서 드보르작에게 ‘태양’으로 보인 게 아니었을까.

 

차이코프스키는 1886년 10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를 ‘음악의 예수’라 불렀다. 모차르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예수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 마음과 똑같다고 고백한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말에 덧붙여, 모차르트의 생애 자체가 예수를 닮았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모차르트는 25살 되던 1781년 자유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는 모든 것을 던진 결단이었다. 빈에서 그는 자유음악가로 성공했지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마술피리>로 기득권 세력과 충돌했고,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급기야 35살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시대와 불화하면서 자유를 선택했고, 하필이면 최고의 걸작들 때문에 외로운 길을 걷게 됐고, 가장 뛰어난 음악을 인류에게 무상으로 남겨준 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랑의 메시지를 설파하다가 유태인들에게 버림받고 30대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삶과 닮지 않았는가.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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