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⑮] 베토벤 :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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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3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시대는 가파르게 변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을 우려의 눈길로 지켜보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손을 대면 혁명 지도부를 박살내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혁명 지도부인 국민의회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게 선전포고로 맞섰다. 파리에는 단두대가 등장했고, 혁명과 반혁명의 대결은 피로 물들었다. 툴롱 전투에서 왕당파를 진압한 나폴레옹이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던 영국은 제니 방적기(1764), 증기 엔진(1769)의 발명으로 산업혁명의 시동을 걸고 있었다. 증기 기관차가 대륙을 달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뒤였다.

 

1792년 11월 베토벤이 빈에 도착했을 때의 유럽 풍경이다. 나폴레옹보다 한 살 아래인 베토벤은 이미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 감격한, 피 뜨거운 젊은이였다. 그는 35년 동안 빈에서 격동의 시대를 살며 음악으로 인간을 해방시키고, 환희 속에서 인류가 하나되는 형제애를 노래하고, 모든 후배 음악가들이 넘고자 했지만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음악의 큰 산이 된다. 그가 ‘제2의 모차르트’가 될 거라는 스승 네페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버지 요한의 교육이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만 못했을 수도 있고, 베토벤 자신의 재능이 모차르트에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제2의 모차르트’가 나올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는 그냥 베토벤 자신일 뿐이었다. 그는 혁명에 열광했고, 순박하고 용감했으며, 이미 <요젭 2세를 위한 장송 칸타타>로 하이든을 놀라게 한 젊은이였다. 그의 재능과 열정은 곧 ‘혁명의 음악’과 ‘음악의 혁명’을 낳게 된다.

 

베토벤이 도착한 빈은 모차르트 시절에 비하면 자유음악가가 활동하기 한결 좋은 여건이었다. 피아노의 성능이 급속히 개선되어 돈만 있으면 에라르, 슈타인, 브로드우드 피아노를 누구나 살 수 있었다. 1792년 빈에는 6천명이 피아노를 배웠고, 300명의 전문 연주자가 활약했다. 악보 출판업도 크게 성장했다. 아르타리아, 짐로크, 브라이트코프&헤르텔 등 악보사들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1800년 일반음악신문(Allgemeine musicalische Zeitung)은 “모든 사람이 음악을 하고, 모든 사람이 피아노를 배운다.”고 보도했다. 베토벤은 1801년 친구 베겔러에게 쓴 편지에서 “작곡 주문이 밀려들어서 수입이 넉넉하다”며, “내가 요구하면 그들(출판업자)은 지불한다”고 밝혔다. 모차르트 시대에 비해 음악 시장이 엄청나게 확대됐다는 뜻이다. 자유음악가의 위상도 높아졌다. 귀족의 후원을 받는 관행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베토벤만큼 탁월한 음악가는 귀족에게 굽신거릴 필요가 없었다. 1806년, 프랑스 점령군 장교를 위해 연주해 달라는 리히노프스키 공의 요청을 거절하며 베토벤이 “이 세상에 공작은 수천 명 있지만 베토벤은 한 명 뿐”이라고 일갈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빈에서 그는 먼저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빈에는 피아노 대결이 유행이었는데, 베토벤은 겔리넥, 뵐플, 슈타이벨트 등 내로라 하는 피아니스트와 즉흥연주 실력을 겨뤄서 빈 음악계를 평정했다. 겔리넥은 베토벤과 겨룬 뒤 외쳤다.“이 촌뜨기의 영혼에는 악마가 들어 있는 게 분명해!” 트레몰로 주법으로 인기를 끌던 슈타이벨트는 거만한 태도로 베토벤의 분노를 샀고, 무참하게 패배한 뒤 경연장을 빠져나가며“이 자가 있는 한 다시는 빈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직한 예술가에게 언제나 친절했지만 허세 부리는 인간을 참지 못한 베토벤의 면모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 C장조의 1악장을 빈에서 연주할 때, 피아노가 반음 낮게 조율돼 있자 즉석에서 반음 높은 C#장조의 타건으로 연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베토벤 vs 슈타이벨트 (BBC 다큐 재연) 바로 보기

 

 

하이든은 베토벤의 재능을 높이 사서 1795년 피아노 협주곡 Bb장조를 초연하게 도와주었고, 그를 런던으로 데려가 데뷔시킬 생각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좋은 사제 관계를 맺지 못했다. 베토벤은 빈에서 처음 출판할 3곡의 피아노 트리오 중 마지막 C단조가 제일 좋은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이든은 이 곡이 대중에게 너무 어려우므로 나중에 출판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베토벤은 하이든이 자기를 견제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고, 악보 표지의 이름에 ‘하이든의 제자’라고 써 넣자는 스승의 제안마저 거부해 버렸다. 두 사람 사이는 서먹해져 버렸고, 베토벤은 “하이든으로부터 배운 게 하나도 없다”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고향 본(Bonn)의 후원자 발트슈타인 백작은 젊은 베토벤을 빈으로 보내며 “하이든의 손으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배우라”고 당부했지만, ‘음악의 착한 종’ 하이든과 ‘시대의 반항아’ 베토벤은 애초에 잘 어울리기 힘들었다. 두 사람은 1808년 하이든 탄생 76주년 축하 음악회 자리에서 비로소 화해하게 된다.

 

베토벤을 얘기할 때‘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인용하는 것은 진부해 보이지만, 이 유서가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공교롭게도 빈에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이 확실시되던 1802년 10월, 유서를 썼다. 두 동생 카를과 요한 앞으로 쓴 유서는, 6년 전 생긴 귓병 때문에 그가 얼마나 고뇌했는지 사무치게 토로한다. “아!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감각, 과거에 내가 누구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소유했던 이 감각이 약화됐다는 걸 어떻게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청각 상실 때문에 더욱 외로웠다고 밝힌다. “나의 이 불행은 내겐 이중으로 괴롭단다. 이 불행 때문에 나는 오해받고 있는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인간 사회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심정을 토로할 수도 없어. 나는 거의, 완전히, 혼자일 뿐이야.”

 

하지만, 베토벤은 불굴의 의지로 삶을 긍정한다. 그것은 오직 예술을 향한 열정과 사명감이었다. “아! 내 속에서 느껴지는, 움트는 모든 것을 내놓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음은 이 모든 고통에서 그를 해방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예술혼에 자신을 맡겼다. 10대 소년 시절 이미 “나의 음악은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쳐질 것”이라고 말한 그는, 청각상실의 비극과 씨름하면서 인류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낱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타고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베토벤은 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공개하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처음 귓병이 생긴 게 1796년이므로, 그의 C장조 교향곡과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비창>, 바이올린 소나타 <봄>, 6곡의 현악사중주곡 Op.18 등 대부분의 초기 작품들도 귓병을 앓으며 작곡했다고 볼 수 있다. 찬란한 젊음에 빛나는 교향곡 2번 D장조와 우수 가득한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는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쓸 무렵 작곡했다. 1801년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지금부터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쓸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 다짐은 교향곡 3번 <에로이카>,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과 <열정>, 현악사중주곡 <라주모프스키> 등 선배 작곡가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걸작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에로이카>는 ‘음악의 혁명’이자 ‘혁명의 음악’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집정관에 오른 뒤 민주주의와 공화제의 기치를 들고 혁명전쟁에 나섰다. 베토벤과 동갑인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을 ‘말을 탄 시대정신’이라 불렀고, 베토벤은 그가 귀족 사회의 차별과 속박을 걷어내고 자유와 평등을 가져 올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헌정할 거대한 교향곡은 1804년 초에 완성됐다. 하지만 그해 5월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베토벤은 격분해서 ‘보나파르트’라고 써 놓은 표지를 찢어 버렸다.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가 전한 베토벤의 말이다. “그 역시 평범한 속물에 불과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오로지 자기 야망에만 탐닉하겠다는 것인가?”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는 원래 제목 대신 “한 위대한 인물의 기억을 기념하기 위해서 작곡했다”고 써 넣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비공개 초연 (사이먼 셀란 존스 감독 영화 <에로이카> 중> 바로 보기

 

 

이 곡은 우선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과거 교향곡의 두 배가 넘는 길이에, 이해하기 힘든 불협화음들이 자꾸 나와서 연주자들을 당황시켰다. 첫 악장은 두 개의 으뜸화음으로 퉁명스레 시작하는데, 교향곡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재현부에서는 호른의 시그널이 먼저 튀어나오는 바람에 베토벤이 잘못 작곡한 게 아닌지 오해를 일으켰다. 제자 리스는 호른 주자가 너무 일찍 나왔다고 소리쳤다가 베토벤에게 뺨을 맞을 뻔한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2악장은 ‘장송행진곡’이다. 베토벤은 영웅의 ‘삶’ 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이미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을 때 베토벤은 “17년 전부터 오늘을 예상해 왔다”며 이 ‘장송행진곡’을 상기시켰다. 4악장 피날레는 서주가 딸린 웅장한 변주곡으로, 인간에게 불과 자유를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를 예찬한다. 이 영웅적 행위를 위해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마다않은 프로메테우스는, 불행과 고뇌를 딛고 인류에게 고귀한 음악을 선사한 베토벤의 자화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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