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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⑯] 베토벤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 (2)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3.22 10: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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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이후 교향곡은 작곡자의 세계관을 담는 강력한 표현수단이 됐다. 교향곡은 일정한 드라마를 갖게 됐고, 특히 마지막 악장으로 메시지의 중심이 옮겨졌다. 1808년 12월 22일 함께 초연된 교향곡 5번 C단조와 6번 F장조 <전원>은 이러한 변화를 한층 더 진전시켰다. C단조 교향곡 일명 <운명>은 베토벤의 평생 모토인 “고뇌에서 환희로”를 상징한다는 전통적 해석부터, 온갖 난관을 뚫고 전진하는 혁명을 묘사한다는 지휘자 가디너의 해석까지 숱한 논란을 낳으며 클래식 음악의 대명사로 불려 왔다. ‘운명의 동기’인 1악장의 첫 네 음표가 곡 전체에 걸쳐 발전하는 양식은 베토벤의 전형적인 작곡 방식으로, 3악장 스케르초와 4악장 피날레는 휴식없이 연주되어 드라마틱한 흐름을 강화했다. 이 곡을 들은 괴테는 “천정이 무너질 것 같다”고 했고, 베를리오즈의 스승 르지외르 교수가 “모자를 써야겠는데 머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19세기 지성사에 이 곡이 던진 충격은 그만큼 컸다.

 

교향곡 5번 C단조 (틸레만 지휘 빈 필하모닉) 바로 보기

 

교향곡 6번 F장조 (틸레만 지휘 빈 필하모닉) 바로 보기

 

6번 F장조 <전원>은 자연에 대한 베토벤의 따뜻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귓병 때문에 사람과 만나는 걸 두려워한 그는 하일리겐슈타트의 숲 속에서 마음의 평화을 누렸고, 때로 “사람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곡은 자연과 교감하며 위로받은 베토벤의 감사의 노래다. 이 곡의 표지에 베토벤은 “전원 교향곡, 또는 전원생활의 회상. 묘사라기보다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써 넣었고,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 유쾌한 느낌’, 2악장 ‘시냇가의 풍경’, 3악장 ‘시골사람들의 즐거운 모임’, 4악장 ‘천둥과 폭풍’, 5악장 ‘폭풍이 지나간 뒤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등 짧은 표제를 달았다. 휴식 없이 연주되는 3, 4, 5악장은 <전원> 교향곡이 뚜렷한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천둥과 폭풍’이 지난 뒤 ‘감사의 노래’가 이어지는 구성은 “고뇌를 너머 환희로” 가는 베토벤의 모토가 부드럽게 표현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베토벤은 5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는데, 만일 청각상실이란 비극을 겪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협주곡을 작곡하여 화려한 기량을 펼쳤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우수어린 3번 C단조는 모차르트의 영향을 벗어나 베토벤 특유의 웅장한 스케일을 들려주며, 서정적 향기 가득한 4번 G장조는 요제피네 다임을 향한 베토벤의 따뜻한 사랑을 담고 있다. ‘피아노 협주곡의 황제’로 불리는 5번 Eb장조는 당당하고 찬란하며 자유분방하다. 베토벤은 4번까지는 직접 연주했지만 <황제>는 요한 슈나이더와 칼 체르니가 라이프치히와 빈에서 각각 초연했을 뿐, 베토벤 자신은 연주하지 못했다. 청력이 악화되어 더 이상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연주할 수 있는 소나타는 평생 32곡이나 남겼다. 베토벤의 소나타들은 형식 파괴, 조성 변화, 강약 대비로 모차르트 시대와 확연히 달라진 피아노 연주법을 보여준다. 줄리에타 기차르디에게 바친 C#단조의 <월광>은 느린 악장으로 시작해 격정적인 피날레로 끝나는데, 베토벤은 “이 곡의 3악장을 제대로 치면 피아노가 박살이 날 것“이라고 했다. 고향의 후원자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바친 C장조의 <발트슈타인> 소나타는 ‘피아노의 에로이카’로 불릴 정도로 규모가 크며, 피날레에 라인 지방의 민요를 사용하여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았다. F단조의 <열정>은 ‘운명의 동기’를 다양한 형태로 구사하고 강약 대비, 조성 변화를 극대화하여 고뇌와 번민에 찬 베토벤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했다.

 

<에로이카> 이후 쏟아져 나온 교향곡 · 피아노곡를 비롯,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코리올란> 서곡 C단조, 첼로 소나타 A장조. 극음악 <에그몬트> 등은 글자 그대로 ‘걸작의 숲’을 이룬다.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에서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힌 플로레스탄은 작곡자 자신의 외로운 모습이었고, 피델리오란 남자로 변장하고 남편을 구하러 온 레오노레는 그가 갈구하던 이상적인 여성이었다. <피델리오>는 계몽과 혁명의 이상을 담았지만, 대중을 즐겁게 하기에는 너무 엄숙했기 때문에 흥행에 실패했다. 1806년, 극장장이 객석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모차르트 때는 저기까지 다 찼다”고 중얼거리자 베토벤은 역정을 내며 말했다. “나는 대중들을 위해 음악을 쓰지 않습니다.” <피델리오>는 세 차례 개작 끝에 1814년에야 가까스로 청중들의 갈채를 받게 된다. 베토벤은 오페라에 실패한 대신, 교향곡에 자유· 평등· 형제애의 세계관을 담았다. 모차르트 시대까지는 오페라가 음악의 중심이었지만, 베토벤의 손에서 교향곡은 드라마가 됐고, 음악의 황제로 거듭났다. 클래식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는 이제 오페라가 아니라 교향곡이었다.

 

베토벤은 이미 빈 사회에서 널리 존경받았다. 1808년 프랑스의 위성국가 베스트팔리아에서 베토벤을 초청했을 때, 루돌프 대공· 로브코비츠 공· 킨스키 공은 베토벤을 빈에 잡아두기 위해 연 3천 굴덴을 후원하기로 했다. 피아노 실력이 뛰어났던 루돌프 대공은 황제 프란츠의 동생이었지만 베토벤의 음악 친구로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눴다. 1809년,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루돌프 대공이 빈을 떠나 피신했을 때, 베토벤은 <고별> 소나타로 작별을 아쉬워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피아노 트리오 Bb장조 <대공>은 루돌프 대공의 이미지를 음악에 담았다. 베토벤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와 <장엄미사> 등 걸작을 그에게 헌정하여 오랜 우정을 기념했다. 1812년, 테플리츠 거리를 베토벤과 괴테가 함께 산책할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루돌프 대공의 마차 행렬이 다가오자 괴테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지만 베토벤은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루돌프 대공은 마차에서 내려 베토벤에게 먼저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이 사건으로 괴테와 베토벤은 너무나 다른 상대의 기질을 확인하고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만다. 그 해, ‘불멸의 연인’과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베토벤이 마음을 털어놓은 상대도 루돌프 대공이었다.

 

1812년 7월, 베토벤은 테플리츠에서 ‘불멸의 연인’ 안토니 브렌타노에게 3통의 편지를 썼다. 안토니는 베토벤과 실제로 결혼을 생각한 유일한 여성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 프란츠 브렌타노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어머니였다. 가정의 행복을 갈망했지만 친구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던 베토벤은 그녀에게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끝내 만남을 포기했다. 세 통의 편지는 그의 서랍 속,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곁으로 들어갔다. 이 무렵 베토벤은 일기에 썼다. “너, 불쌍한 베토벤이여, 너에게 행복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너는 오로지 혼자 모든 것을 창조해야만 한다. 너의 예술 안에서만 살아라. 이것만이 너의 유일한 실존이다.”

 

같은 해,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원정에서 참패하여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사랑의 마지막 희망을 접은 베토벤은 실낱같은 혁명의 꿈마저 잃어버렸다. 1813년, 전쟁 희생자를 위한 자선음악회에서 교향곡 7번이 초연됐다. 이 곡은 거침없는 리듬의 향연이자, 숭고한 도취를 통한 삶의 카타르시스였다. 빈의 대다수 청중들은 이 교향곡에 “술 취한 사람의 음악”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칼 마리아 폰 베버는 “베토벤이 이제 정말 정신 병원에 갈 때가 됐군”이라고 했다. 하지만, 훗날 바그너는 이 교향곡에 열광하여 리스트가 피아노로 편곡한 피날레에 맞춰서 춤을 추며 ‘디오니소스의 축제’라 불렀다. 초연 때 앵콜 요청을 받은 2악장 알레그레토는 전장에서 죽어간 프랑스 병사들의 운구행렬을 상상하며 작곡했다. 통곡하듯 흐르는 이 장송행진곡은 사라져 버린 혁명의 꿈을 애도한 곡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교향곡 7번 A장조 (틸레만 지휘 빈 필하모닉) 바로 보기

 

1813년, 나폴레옹은 스페인 전선인 비토리아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하여 완전히 궤멸됐다. 오스트리아는 승리의 기쁨과 애국주의 물결에 휩싸였고, 흥행사 멜첼은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음악회를 기획했다. 이 때 선보인 <웰링턴의 승리>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베토벤에게 큰 수익을 안겨 주었다. 베토벤 스스로 대단치 않다고 생각한 곡이 가장 큰 인기를 얻은 것은 자못 역설이었다. 애국주의에 편승해서 갈채를 받은 사실 때문에 이 시기를 베토벤의 ‘타락기’로 보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 해 작곡한 교향곡 8번 F장조를 널리 알리기 위해 <웰링턴의 승리>와 함께 연주하도록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1814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의 수뇌부가 빈에 모여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질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왕정의 복구와 프랑스 혁명 이념의 전면적인 폐기를 뜻했다.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재상이 주도한 유럽 반동체제가 완성될 무렵, 영국에서는 기계화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투쟁인 럿다이트 운동(1811~1816)이 진압됐다. 베토벤은 내면으로 침잠했다.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 이후 그의 작품들이 연주되는 횟수는 줄었고, 빈 시민들은 심각한 베토벤의 음악보다 <세비야의 이발사>와 <라 체네렌톨라> 등 재기발랄한 로시니의 오페라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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