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⑱] 멜랑콜리의 시대, 잊혀진 작곡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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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⑱] 멜랑콜리의 시대, 잊혀진 작곡가들
  •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 승인 2017.03.28 11: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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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시기를 헤쳐 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시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되고 유럽의 질서를 논의하는 빈 회의가 열릴 무렵, 시민계급은 급속히 보수화됐다. 혁명과 정치에 대한 염증이 번졌고, “희의는 춤 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빈은 너나없이 왈츠에 흠뻑 빠졌다. 젊은 요젭 라너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이러한 요구에 부흥하여 본격적인 왈츠 음악를 쓰기 시작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서 활짝 피어난 왈츠 음악은 빈 사람들의 사랑 속에 빈필 신년음악회까지 이어졌다. 피아노와 악보의 보급으로 좀 더 많은 대중이 가정에서 음악을 즐기게 됐다. 아마추어들도 피아노를 연주하고, 가곡을 노래하고, 오페라를 발췌해 부르거나 감상하게 됐다. 독일어로 “성실하다”는 뜻의 형용사 비더(bieder)에 가장 평범한 남자 이름인 마이어(Meier)를 이어붙인 ‘비더마이어’란 말은 신흥 시민계급의 가볍고 안락한 여흥 음악을 가리켰다.

 

베버 <무도회에의 초대> (피아노 아르투어 슈나벨) 바로 보기

 

 

초기 자본주의,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고,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시대였다. 파리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프랑스 혁명은 오페라의 상업화를 엄청나게 부채질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극장을 열고 오페라를 공연할 수 있게 됐다. 오페라 극장은 신흥 시민계급의 사교 무대였고, 부자가 자기를 과시하는 무대였다. 부자들이 즐겨 앉는 좌우의 박스석에서는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관객들은 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오페라를 감상하는 분위기도 요즘과 달리 떠들썩했다. “군중의 소리가 공연자들의 노래를 압도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애완동물들이 날뛰며 다녔고, 화장실을 대신한 나무 양동이에서 나는 악취는 여간해서는 참기 힘들었다.” (도널드 서순 <유럽문화사> p.446)

 

공연물의 내용도 가관이었다. 1799년, 프랑스의 파리 오페라는 <이시스의 신비>를 공연했는데,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플롯을 바꾸고 새 인물을 집어넣고 <돈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황제 티토의 자비> 등 다른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를 넣고, 심지어 하이든 교향곡의 주제들을 짜깁기한 잡탕 오락물이었다. 이 작품은 1809년까지 약 10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 중의 하나였다. 훗날 베를리오즈는 상업성을 위해 예술을 훼손한 이 작품에 격분하여 이렇게 썼다. “이런 끔찍한 혼합물을 만들어 놓고 <이시스의 신비>란 제목을 붙이고 이런 상태로 공연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모차르트의 이름 옆에 자신의 이름, 바보의 이름, 신성모독자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라흐니츠(Lachnitz)라고.” (베를리오즈 <음악여행자의 책> p.100)

 

겔리네크 <이시스 신비> 주제에 의한 변주곡 (피아노 시프리앙 카차리스) 바로 보기

 

 

당시 오페라 제작자들은 흥행을 위해 이러한 개작을 서슴지 않았다. 독일 낭만 오페라의 기수 베버의 <마탄의 사수>는 파리에서 <로빈 후드>로 공연됐다. 오늘날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흥행을 위해 문학작품을 맘대로 각색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런던 코벤트 가든의 음악감독 헨리 비숍 - <즐거운 나의 집>을 작곡 - 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를 공연하며 서슴없이 자기 음악을 끼워 넣기도 했다. 이런 관행은 로시니의 오페라가 청중들을 사로잡은 1820년대부터 사그러들었고 청중들이 무대 위에 집중하는 에티켓도 19세기 중반에야 정착됐다.

 

진지한 예술음악과 가벼운 오락음악의 경계는 베토벤 말기에 이미 생겨나고 있었다. 19세기 초, 피아노는 엄청난 속도로 진화했고, 연주 테크닉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베토벤이 <함머클라비어>등 마지막 소나타를 쓸 무렵 훔멜, 체르니, 모셸레스, 존 필드 등 여러 피아니스트들이 활약했지만 그들의 이름은 거의 잊혀졌다. 베토벤의 <황제>(1809)와 쇼팽의 E단조 협주곡(1830) 사이의 약 20년 동안, 수많은 피아노 협주곡이 작곡됐지만 이 기간은 피아노 협주곡의 공백기처럼 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815년 이후 베토벤이 내면의 엄격한 음악을 개척하고 있을 때, 자본주의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진지한 예술가들은 ‘멜랑콜리’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었다. ‘멜랑콜리’는 미학자 김동규의 지적처럼 ‘사랑과 죽음이 교차하는 심미적 감정’(<멜랑콜리 미학> p.357~p.358)으로, 자본주의 초기 음악을 지배하는 근본 정조였다.

 

모차르트의 제자로, 하이든의 뒤를 이어 에스터하치 궁정 악장을 역임한 요한 네포무크 훔멜(1778~1837)은 이중 트릴의 명수로, 악마와 같은 테크닉을 자랑했다. 그는 8곡의 협주곡과 10곡의 소나타를 써서 모차르트와 쇼팽의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지만, 오늘날 연주되는 그의 작품은 Eb장조 트럼펫 협주곡 정도다. 피아노 연습곡으로 친숙한 칼 체르니(1791~1857)는 베토벤의 제자로 <황제> 협주곡을 빈에서 초연했고 프란츠 리스트의 스승이자 근대 피아노 테크닉의 아버지로 이름을 남겼지만, 정작 그의 화려한 피아노 작품을 들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훔멜 트럼펫 협주곡 Eb장조 중 3악장 (트럼펫 티네 팅 헬세트) 바로 보기

 

 

‘예민한 감성의 음악가’이자 ‘고상하고 신사다운 인간’으로 사랑받은 이그나츠 모셸레스(1794~1870)는 낭만시대의 새로운 조류에 적응하기 위해 세 번이나 연주 스타일을 바꾸었다. 그는 옛 전통의 좋은 점과 새로운 테크닉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했지만 쇼팽과 리스트의 그늘에 가려 점차 잊혀졌고, 말년에는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주식’으로, 현대음악을 ‘간식’으로 취하며 조용히 지냈다. 그가 쓴 8곡의 피아노 협주곡은 ‘멜랑콜릭’의 정서를 벗어나지 못했다. 쇼팽의 녹턴에 영향을 미친 존 필드(1782~1837)는 무치오 클레멘티의 피아노 상점의 매장에서 홍보를 위해 연주하는 등 불우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는 완벽한 기교와 시적인 표현으로 “쇼팽과 비슷한 스타일”이란 평을 들었다. 그의 녹턴은 쇼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간혹 연주하고 감상하지만, 작곡가로서 존 필드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존 필드 <녹턴> 모음 (피아노 엘리자베트 조이 로우) 바로 보기

 

 

이 모든 음악가들의 공통점은 ‘멜랑콜리’에 젖은 작품을 썼다는 점이며, 이 정서는 쇼팽의 E단조 협주곡이나 F단조 협주곡에서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갑자기 펼쳐진 자본주의 사회에 던져진 많은 ‘자유음악가’들에게 성공의 문은 좁았고 생존은 불안했다. 꿈과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던 음악가들은, 사랑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멜랑콜리’라는 정서로 승화시켰는데, 이 테두리에 안주한 수많은 음악가들은 오늘날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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