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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⑲] 낭만의 싹, 꿈꾸는 방랑자 슈베르트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3.31 09: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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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시기를 헤쳐 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시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31살의 짧은 삶에 650곡의 노래를 남겨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슈베르트(1797~1828)는 ‘멜랑콜리’에 머물지 않고, 쓰라린 현실 속에서 좀 더 달콤한 꿈을 꾸었다. 그는 가곡 뿐 아니라 오페라, 종교음악, 교향곡, 실내악, 소나타 등 숱한 걸작을 남겼다. 모차르트 이래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곡을 작곡한 천재는 없었다. 슈베르트의 영혼은 언제나 아름다운 선율로 넘쳤지만, 그가 음악가로 인정받기 위해 밤낮없이 애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가 작곡가로 활동한 1815년부터 1828년까지 10여년은 베토벤의 말년과 거의 일치한다. 그는 베토벤을 숭배했지만, 너무 수줍어서 이웃의 위대한 선배를 찾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소년 시절, 교장인 아버지를 도와 임시 교사를 하며 음악가의 꿈을 키운 그는, 가족 현악사중주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했고, 빈 성당 합창단에서 보이 소프라노를 노래했다. 12살에 쓴 첫 작품인 네 손을 위한 환상곡과 현악사중주곡은 가족끼리 연주할 목적이었다. 국립 신학교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된 14살 때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훤히 알고 있었다. 환갑을 넘긴 살리에리는 재능 있는 소년 슈베르트에게 무료로 노래 작곡법을 가르쳐 주었다.

 

1814년, 슈베르트는 자신의 미사 F장조를 지휘하던 중 소프라노 솔로를 맡은 테레제 그로프를 사랑하게 됐다. 테레제도 슈베르트를 좋아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임시교사 연봉으로는 안정된 결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두 사람의 교제를 금지했다. 첫사랑 테레제는 3년 뒤 빵 만드는 요한 베르크만과 결혼했고, 슈베르트는 실연의 아픔을 작곡으로 치유했다. 1815년은 한 해, 슈베르트는 <마왕>, <들장미>, <달에게 부침>, <소녀의 탄식> 등 무려 144곡의 가곡을 썼다. 하지만 이 많은 노래는 단 한 푼도 현금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침마다 곡을 쓴다. 한 곡을 완성하자마자 또 다른 곡에 착수한다.” 내면의 방랑자 슈베르트는 꿈과 음악에서 충만감을 맛보았다. 그는 늘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즐겁게 했고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면 두 손을 입에 대고 황홀해 하는 순박한 젊은이였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은 언제나 그를 빗겨갔다. 무한경쟁와 승자독식의 시대, 음악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출판업자들은 언제나 예술성보다 상업성이 우선이었다. 이름 없는 슈베르트에게 작곡료를 치르는 것은 출판업자들에게 모험이었다. 슈베르트는 1816년 7월의 일기에 썼다. “오늘 처음 작곡으로 돈을 벌었다. 칸타타 한 곡 작곡료로 100굴덴을 받았다.”

 

그는 대중 연주회를 여는 대신 음악 친구들의 모임인 ‘슈베르티아데’에서 즐기는 쪽을 더 좋아했고, 돈을 벌 때마다 친구들과 만찬을 열어서 모두 써 버렸다. ‘슈베르티아데’의 친구들 중 요젭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천재를 제일 먼저 알아보고 오선지를 사 주며 작곡을 격려했다. 프란츠 쇼버는 호탕한 문학청년으로, 어머니 소유의 집에 슈베르트가 머물 수 있게 해 주었고 오페라 <알폰소와 에스트렐라>의 대본을 써서 슈베르트와 함께 작업했다. 30살 연상인 바리톤 요한 포글은 1821년 <마왕>을 히트시켜 슈베르트를 널리 알렸다. 두 사람이 알게 되기 전, 14살 소년 슈베르트는 포글의 노래에 반해서 그가 출연하는 <피델리오> 티켓을 구하려고 교과서를 팔아버린 적이 있다. 슈베르트가 생전에 가곡 작곡가로 인정받은 것은 포글의 공이었다.

슈베르트는 <피에라브라스> 등 17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5편을 무대에 올렸지만, 모두 인기가 없었다. 1815년부터 죽을 때까지 22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썼지만, 위대한 베토벤이 살아 있는 빈 음악계에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음악의 한때>, <방랑자 환상곡>, 즉흥곡 Gb장조, 듀오 환상곡 F단조 등 자유로운 형태의 피아노곡들은 시대정신을 소나타보다 잘 표현했지만 ‘슈베르티아데’에서 연주했을 뿐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최소한 15곡으로 추정되는 현악사중주곡을 비롯, 수많은 실내악곡을 써서 슈베르티아데에서 연주했다.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피아노 오중주 <송어>, 현악 오중주 C장조도 뒤늦게야 널리 사랑받게 됐다.

 

낭만 교향곡의 꽃 <미완성>을 서랍 속에 넣어 둔 것은 그가 뛰어난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인 1822년이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신비로운 슬픔의 1악장, 세상의 번뇌를 초월한 듯 평화롭고 달콤한 2악장, 그리고 20마디까지 쓴 채 중단한 3악장…. 이 곡은 완성되지 못한 슈베르트의 짧은 삶처럼 신비의 수수께끼로 빛난다. 풍부한 화성과 조바꿈으로 섬세한 시정(詩情)을 담은 이 <미완성>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교향곡 중 가장 완성미가 높다는 평을 듣는다. 1825년 작곡한 대교향곡 C장조도 생전에 연주할 기회를 찾지 못한 채 서랍 속에 있다가 1838년 빈을 방문한 슈만이 발견, 멘델스존의 지휘로 이듬해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됐다. 슈베르티아데의 한 친구는 훗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슈베르트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위대한 천재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는 꿈꾸는 내면의 방랑자였고, 이 ‘방랑자 의식’은 그의 여러 작품에 흔적을 남겼다.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연작시에 곡을 붙인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의 ‘방랑자 의식’을 들려주는 대표작이다. 대중의 환호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그의 순수한 예술혼은 빛을 더할 수 있었지만, 가난과 외로움을 견디는 것 또한 예술가가 짊어져야 할 멍에였다. 고달픈 자유예술가의 시대가 열렸지만, 봉건사회의 영향력은 아직 남아 있었다. 죽기 2년 전인 1826년, 슈베르트는 황제 프란츠 1세에게 궁정 부악장의 자리를 달라고 청원서를 쓴다. 자유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안정된 직장을 택하려 한 것이다. 10명 정도가 응모한 부악장 자리는 요제프 바이글에게 돌아갔고 슈베르트는 탈락의 쓴잔을 맛보게 된다.

 

마지막 해인 1828년 3월 26일, 슈베르트는 처음 공개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빈 무직페라인에서 G장조 현악사중주곡 D.887, 가곡 <별>과 <어부의 노래> 등 그의 작품 여덟 곡이 연주됐다. 슈베르트는 이 연주회로 꽤 큰 돈을 벌었고, 생전 처음 피아노를 살 수 있었다. 당시 신흥 시민계급이면 누구나 한 대씩 갖고 있던 피아노를 슈베르트는 생애 마지막 해가 돼서야 비로소 갖게 된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세 소나타 D.958, 959, 960은 깊은 영혼의 울림과 서정성으로 ‘방랑자 의식’을 들려준다. 슈베르트는 어렵게 장만한 자기 소유의 피아노를 쳐 가며 이 소나타들을 작곡했을 것이다.

 

가난하던 시절, 그는 일기에 썼다. “나는 즐거운 음악이란 걸 모른다.” 이런 구절도 있다. “나는 이대로가 좋아. 나는 그저 작곡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그는 죽기 직전에 쓴 가곡 <바위 위의 목동>에서 노래했다. “내 가슴속 깊은 곳의 고뇌. 내 기쁨은 끝나고 세상의 모든 희망은 나를 떠났다. 여기서 나는 너무 외롭구나. 봄이 왔다, 봄, 나의 기쁨. 이제 나는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슈베르트는 31살 꽃다운 나이로 텅 빈 피아노를 남겨둔 채 봄을 찾아 떠났다.

 

슈베르트의 유품은 피아노 하나, 정장 세 벌, 셔츠 넉 장, 조끼 아홉 벌, 신발 다섯 켤레, 부츠 두 켤레, 모자 하나가 전부였다. 나폴레옹의 혁명전쟁이 막을 내리고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가 들어선 유럽, 정치에 염증을 느낀 신흥 부르주아는 떠들썩한 왈츠와 유흥 음악에 탐닉했다. 슈베르트는 이러한 사회의 세속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내면의 깊은 오솔길을 걸었다. 이 고립감 속에서 그는 오히려 마음속의 황홀한 빛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속에 사랑을, 입술에 노래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 볼 수 없었던 낭만 음악의 중요한 특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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