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⑳]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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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815년 빈 체제 성립 이후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세력 균형을 이루며 유럽을 지배했다. 시민계급은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며 왕정 세력을 압박했다. 1830년 7월, 프랑스의 샤를 10세가 하원을 해산하고 언론자유를 폐지하고 선거권을 제한하자 시민들이 3일간의 무장 항쟁으로 왕을 몰아냈다. 이어서 ‘국민의 왕’이 되겠다며 권좌에 오른 루이 필립은 약간의 개혁 조치를 취했을 뿐, 구체제의 틀을 유지했다. 그는 폴란드의 봉기가 러시아에게 무참히 진압되는 것을 방관했고, 독립을 염원하는 여러 나라 민중의 요구를 모두 외면했다.

 

산업혁명으로 갓 태어난 노동계급은 기계파괴 운동에 실패했지만 차티스트 운동으로 참정권의 확대를 꾀했다. 1848년 혁명, 시민 계급과 노동 계급이 힘을 합쳐 빈 체체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를 전진시켰다. 자유 · 평등 · 형제애의 프랑스 혁명 이념을 실질적으로 담보할 사회주의가 대중에게 확산됐다. 아직 분열돼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혁명의 바람을 타고 1860년대 마침내 통일을 이루게 된다. 중남미도 시몬 볼리바르의 지도로 1820년대에 독립을 쟁취한다. 그러나 폴란드 · 헝가리 · 체코 등 약소국가들은 힘겨운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대륙으로 확산됐고, 1825년 달리기 시작한 증기기관차는 19세기 중엽에는 유럽 곳곳을 연결했다. 슈만은 연주여행을 떠나는 부인 클라라에게 “열차가 달릴 때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체코의 드보르작은 증기기관차 달리는 모습을 넋놓고 보는 게 취미였다. 하지만, 프란츠 리스트는 증기기관차보다 여섯 마리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대중의 환호 속에 달리는 걸 즐겼다. 19세기는 음악가들에게 사랑과 혁명의 시대, 곧 낭만시대였다. 유럽이 좁아졌기 때문에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슈만, 쇼팽, 리스트 등 이 시대의 위대한 작곡가들은 서로 잘 알고 지냈다. 이들은 신흥 시민계급의 속물성에 맞서서 예술의 고귀함을 지키며 서로 돕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젊은이들이었다.

 

베토벤 9번 교향곡 이래 가장 놀라운 작품은 1830년 초연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다. 베토벤 사후 3년 만에 나온 이 곡은, 예술가의 사랑과 죽음을 찬란한 관현악으로 묘사하여 교향곡의 세계를 단숨에 확장시켰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오필리아와 줄리엣을 연기한 영국 여배우 해리어트 스미드슨에게 사로잡혀 열렬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인기 정점의 스타였던 그녀의 눈에 무명 작곡가 베를리오즈가 보일 리 없었다. 그는 활기를 잃은 채 시름시름 환상에 빠졌고, 사랑과 죽음의 절망적인 투쟁 속에서 탈진했다. <환상> 교향곡으로 사랑을 승화시키면서 그는 서서히 되살아났다.

 

5악장으로 된 <환상> 교향곡에는 헤리엇 스미드슨의 모습이 모든 악장에 등장하는데, 그녀의 이미지를 베를리오즈는 ‘고정 관념’(idée fixé)이라 불렀다. 1악장 ‘꿈과 열정’은 환각에 빠진 예술가의 내면이다. 2악장 ‘무도회’, 예술가는 떠들썩한 축제를 즐기지만 그녀의 환상이 나타나자 다시 혼란에 빠진다. 3악장 ‘들판에서’, 평화로운 석양 풍경 속에 두 명의 목동이 피리를 부는데, 멀리 천둥소리가 울리자 목동은 한명만 남아 있다. 섬찟한 느낌에 예술가는 그녀가 죽었음을 직감한다. 4악장 ‘교수대로의 행진’, 예술가는 음독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애인을 죽인 죄로 교수대로 끌려간다. 기요틴은 가차 없이 그의 목을 잘라버린다. 5악장 ‘마녀들의 축제’,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마녀들의 춤 한가운데 그녀가 있다.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이어 그레고리안 성가 중 ‘진노의 날’이 울려 퍼진다.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마리스 얀손스 지휘, 바바리아 방송교향악단, 2013 BBC 프롬스 연주) 바로 보기

 

 

헤리엇 스미드슨은 2년 뒤, 다시 연주할 때 드디어 왔다. 베를리오즈는 그녀를 직접 초대할 용기가 없었지만, 엉거주춤하고 있는 그녀를 친구들이 등을 떠밀어 데려왔다. 그녀는 교향곡의 주제에 놀랐고, 자기가 바로 주인공이란 걸 깨닫고 크게 감동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연인 사이가 됐고, 이듬해 10월 결혼을 강행했다. 당연히 예상된 일이지만, 결혼과 함께 ‘환상’도 깨졌다. 그녀는 배우로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결혼 당일에도 빚 걱정뿐이었다. 두 사람 다 불같은 성격이었으니 날이면 날마다 다투었다. 헤리엇은 인기가 시들어가면서 알콜 중독이 됐고, 두 사람은 결국 1844년 이혼했다.

 

베를리오즈는 활화산 같은 사람이었다. 글루크, 모차르트, 베토벤을 숭배했지만, 불같은 성격은 그가 프랑스 혁명의 아들임을 증명한다. 1830년 7월 혁명, 유탄이 외벽에 튕겨 떨어지는 창가에서 작곡을 마친 그는, 거리로 나와 ‘성스런 시민들’과 함께 총을 들고 새벽까지 구호를 외쳤으며, 자신이 작곡한 <전사의 찬가>를 시위대가 부르자 덩달아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의 열정적인 성격은 낭만 시대 예술가의 전형이었고, <환상> 교향곡은 낭만 교향곡의 금자탑이 됐다. 그의 관현악곡 <로마의 사육제>, <로미오와 줄리엣>과 오페라 <파우스트의 저주>, <트로이 사람들> 등은 요즘도 무대에 오른다. <레퀴엠>,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 등 거창한 작품들은 메윌, 고세크 등 프랑스 혁명기 음악의 전통을 보여준다.

 

베를리오즈는 1831년 3월 로마에서 멘델스존과 만났다. 그는 로마 대상을 받았기에 왔고, 멘델스존은 성년을 기념하는 그랜드 투어 중이었다. 두 천재는 의기투합해서 타소의 무덤을 찾아갔고 카라칼라 목욕장의 폐허를 함께 보았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베를리오즈의 지나친 감정분출이 거슬렸고, 베를리오즈는 멘델스존이 너무 얌전하다고 느꼈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로마대상 수상작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첫 부분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고 실토했다. 멘델스존은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난 당신이 그 곡을 좋아하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솔직히 그 곡은 아주 형편없어요.” 베를리오즈는 조금 언짢았지만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베를리오즈는 멘델스존을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그의 취향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여겨 “멘델스존은 죽은 자들(=선배 작곡가들)을 너무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기질과 음악관이 무척 달랐지만 평생 따뜻한 우정을 유지했다. 멘델스존은 훗날 베를리오즈에게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지휘를 부탁했고, 자기 지휘봉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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