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㉒] 피아노의 시인 쇼팽, 그의 심장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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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㉒] 피아노의 시인 쇼팽, 그의 심장은 어디로 갔을까?
  •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 승인 2017.04.11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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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자를 벗으세요. 천재입니다.” 쇼팽을 맞이하며 슈만이 던진 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슈만이 1834년 <새 음악시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 쓴 글이다. 슈만(1810~1856)은 쇼팽의 <모차르트 ‘돈조반니’ 주제와 변주곡> Op.2 악보에서 천재를 알아보았다. 동갑내기인 슈만과 쇼팽은 1835년 라이프치히에서 만났다. 쇼팽은 발라드 G단조를 연주했고, 두 사람은 이 곡을 제일 좋아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슈만은 화려하고 고상하게 껍데기를 치장했지만 속마음은 고귀한 예술혼과 거리가 먼 신흥 부르조아를 혐오했다. 로시니가 제왕으로 군림하는 속물 세계에서 그는 ‘예술의 서정이 다시 영광을 되찾을 것’을 꿈꾸며 <새 음악시보>를 창간했다. 이 잡지를 이끈 가상의 단체 ‘다비드 동맹’에는 옛 대가인 모차르트와 베토벤부터 슈만 자신의 분신인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포함된다. 슈만은 ‘제2의 베토벤’을 고대하며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 리스트, 그리고 브람스의 음악을 열심히 소개했다. 그가 제일 먼저 주목한 천재는 쇼팽과 멘델스존이었다.

 

프레데릭 쇼팽(1810~1849)의 아버지 니콜라는 프랑스 태생이고 어머니 유스티나는 폴란드 사람이었다. 그는 모차르트처럼 뛰어난 신동으로 7살부터 작곡을 했고, 그림을 잘 그리며 원숭이 흉내로 친구들을 웃기는 어린이였다. 그는 39살 짧은 생애의 전반부를 폴란드에서, 후반부를 프랑스에서 살았다. 조국 폴란드에 대한 그리움은 민속춤곡인 폴로네즈와 마주르카는 물론 녹턴 G단조 Op.37-1, 왈츠 A단조(유작) 등 여러 작품에 배어 있다. 폴로네즈 A장조 <군대>와 Ab장조 <영웅>은 아무리 억압해도 꺼지지 않는 폴란드 민중의 찬란한 꿈을 노래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보다 한결 우아하고 세련된 쇼팽의 왈츠는 폴란드 민속 정서를 담았으며, 특히 아름다운 왈츠 C#단조 Op.64-2는 발레 <실피드>에 사용됐다.

 

쇼팽 녹턴 G단조 Op.37-1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바로 보기

 

 

쇼팽 왈츠 A단조 (유작,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바로 보기

 

 

쇼팽은 베토벤과 체르니의 테크닉을 한층 발전시켜 피아노의 표현력을 높였지만, 바흐의 평균율을 신뢰하며 모차르트 스타일의 루바토*를 구사한 고전주의자였다. 낭만시대의 피아노 연주 기법에 매혹적인 시정(詩情)을 담은 그를 ‘피아노의 시인’이라 부른다. 2015년 쇼팽 콩쿨에서 우승한 조성진은 쇼팽 음악의 특징을 ‘고귀하고, 극적이고, 시적이며, 노스탤저로 가득하다’고 요약했다.

 

폴란드를 떠나기 직전에 초연한 피아노 협주곡 1번에는 러시아의 압제에 허덕이는 조국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음악학교 동급생 콘스탄차 그와드코프스카를 향한 첫사랑이 담겨 있다. 1830년 10월 11일 바르샤바 국립극장, 쇼팽의 고별 연주회가 열렸다. 만 20살이 된 그는 더 넓은 세계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1악장은 고귀한 슬픔으로 가득한 첫 주제에 이어 따뜻한 햇살처럼 빛나는 두 번째 주제가 펼쳐진다. 2악장은 콘스탄차를 그리며 쓴 청순한 로망스다. 3악장은 크라코프 지방의 민속춤인 크라코비야크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대화하며 찬란한 기쁨을 노래한다. 연주가 끝난 뒤 친구들은 폴란드의 흙을 은잔에 가득 담아 쇼팽에게 선물했고, 쇼팽은 그 흙을 평생 보관했다.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 E단조 Op.11 (피아노 조성진, 2015 쇼팽 콩쿠르 결선) 바로 보기

 

 

 

1830년, 화가 드라크루아는 그 해 7월 혁명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담았다. 쇼팽이 빈에 도착한 지 1주일 만에 바르샤바는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쇼팽은 조국에 돌아가 총을 들고 친구 곁에서 싸우려 했고, 봉기 대열의 한 귀퉁이에서 북이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친구들은 음악으로 조국에 봉사하라며 그를 만류했다. 폴란드 민중이 러시아의 총칼에 짓밟혔다는 소식을 슈투트가르트에서 들은 쇼팽은 미칠 듯 하느님을 저주했다. 에튀드 <혁명>과 프렐류드 D단조 Op.28-24는 이 무렵의 작품이다. 파리에 도착한 뒤 그는 친구 마친스키에게 콘스탄차의 안부를 물었다. “삶이나 죽음이나 내겐 같은 거야. 그녀가 친절하게 내 안부를 묻거든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전해 줘. 아니,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가 너무 외롭고 불행하다고 전해 줘. 아니, 내가 죽고 난 뒤 내 뼛가루는 그녀 발밑에 뿌려져야 한다고 전해 줘.” 그러나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은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쇼팽 에튀드 C단조 Op.10-12 <혁명> (피아노 발렌티나 리시차) 바로 보기

 

 

쇼팽 프렐류드 D단조 Op.28-24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바로 보기

 

 

쇼팽의 키는 170Cm, 몸무게는 45Kg…. 무척 가냘픈 모습이었다. 피아니스트 모셸레스는 쇼팽의 얼굴이 “그의 음악처럼 생겼다”고 했다. 파리에는 폴란드 11월 봉기의 지도자 아담 차르토리스키와 민족시인 미츠키에비츠를 비롯한 폴란드의 주요 인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쇼팽은 이들과 교류하며 파리 사교계의 스타가 됐다. 로스차일드 가문 등 부유한 후원자들이 앞 다퉈 그를 초청했다. 한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쇼팽 때문에 모든 숙녀들은 넋이 나갔고 모든 남편들은 질투에 불탔다.” 그러나 쇼팽은 허세를 싫어했고 과장된 칭찬을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는 대규모 연주회 대신 몇몇 친구들 앞에서 조용히 연주하는 편을 즐겼고, 레슨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쇼팽은 1837년 2월, 폴란드 귀족 가문의 마리아 보진스카에게 청혼했다. 마리아는 쇼팽의 발라드 G단조를 잘 쳤고 쇼팽의 초상화를 그린 재주꾼으로, 그녀와 가족 모두 그를 좋아했다. 쇼팽은 그녀와의 행복한 만남을 <화려한 대왈츠> Eb장조로 노래하며 “이 곡에서 내 마음은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무렵 쇼팽은 폐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마리아의 어머니는 “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과 딸이 결혼하게 할 수 없다”며 청혼을 거절했다. 쇼팽은 그녀의 편지를 묶어서 ‘모야 비에다’, 즉 ‘나의 슬픔’이라고 써 넣고 평생 간직했다.

 

쇼팽 <화려한 대왈츠> Eb장조 Op.18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바로 보기

 

 

 

쇼팽과 조르쥬 상드(1804~1876)가 만난 것은 이 직후였다. 쇼팽보다 6살 위인 조르쥬 상드는 남장을 하고 시가를 문 채 사교계에 나타났고, 자유분방한 연애로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쇼팽은 처음엔 상드에게 거부감을 느꼈지만, 상드의 열렬한 고백에 차츰 마음을 열었다. 상드는 쇼팽을 ‘작은 사람’이라 부르며 엄마처럼 부드럽게 배려해 주었다. 상드는 쇼팽의 건강을 위해 마요르카 섬으로 함께 요양을 갔고, 노앙의 별장에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몄다. 쇼팽은 그녀와 9년 동안 동거하며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로 지냈다. 하지만 이 사랑에도 석양이 드리웠다. 상드는 딸 솔랑쥬와 늘 불화했는데, 쇼팽이 어린 솔랑쥬 편을 들자 격분하여 절교를 선언했다. 쇼팽은 “그 동안 함께 해 줘서 고맙고,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그 또한 고맙다”고 편지에 썼다.

 

쇼팽이 죽기 전 해인 1848년, 유럽 전역은 다시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상드는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는 글을 썼지만 쇼팽은 제인 스털링의 손에 이끌려 무기력하게 영국 순회 연주에 나섰다. 1849년 폴란드의 독립은 또다시 좌절됐고, 쇼팽은 그 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파리 마들렌느 성당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서는 8천명의 인파가 모였다. 쇼팽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됐고, 그의 프렐류드 B단조 Op.28-4가 오르간으로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그의 몸은 파리의 페르라섀즈 묘지에 묻혔지만,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가 조국 폴란드로 가져와서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했다.

 

쇼팽 프렐류드 B단조 Op.28-4 (플루트 마르틴 루더만, 기타 로린도 알메이다) 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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