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슬픔, 함께 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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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가 인양되고, 마지막 한명까지 돌아오고, 진상규명이 이뤄질 때 비로소 애도는 시작될 것이다. 아무 설명 없이 음악을 들어 보자. ⓒ 뉴시스

박근혜 전대통령이 구속된 바로 그 날 세월호가 물 위로 떠올랐다. 2014년 4월 16일, 그후 3년…. 희생자 유족들의 슬픔, 피멍으로 타들어간 미수습자 가족들의 가슴을 다시 언급해야 할까. 정부는 유족들을 돈으로 모욕하며 상처를 덧나게 했고, 진상조사를 방해하여 분노를 부채질했다.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다”며 함께 했지만, 단식 중인 유족들 앞에서 피자를 먹으며 ‘폭식 투쟁’을 벌인 인간 이하의 행태도 있었다. 이를 배후조종한 게 바로 정부였다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한답시고 음악을 내밀 수는 없었다. 내가 ‘위로하는 자’고 상대방이 ‘위로받는 자’라는 구분은 오만하니까. 똑같이 약한 사람들이고, 똑같이 위험에 노출돼 있는 우리들 아닌가. 세월호가 인양되고, 마지막 한명까지 돌아오고, 진상규명이 이뤄질 때 비로소 애도는 시작될 것이다. 아무 설명 없이 음악을 들어 보자.

페르골레지 <슬픔의 성모> 바로 보기

 

 

이 곡을 쓴 페르골레지(1710~1736)는 26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평민 출신인 그는 귀족 가문의 마리아 스피넬리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동안 서로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마리아는 수녀원에 들어갔고, 1년도 안 돼 세상을 떠났다. 페르골레지도 폐결핵이 악화되어 포추올리의 수도원에서 요양을 시작했다. 이 수도원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며 써 내려 간 곡이 바로 <슬픔의 성모>다.

 

탄식하는 어머니의 마음, 날카로운 칼이 뚫고 지나갔네.

존귀한 어머니 애통해 하실 때 함께 울지 않을 사람 누구 있으리?

사랑의 원천이신 성모여, 내 영혼을 어루만져 당신과 함께 슬퍼하게 하소서.

 

아들 예수를 먼저 보내는 어머니 마리아의 아픔을 노래한 곡, 영원 속에 새겨진 슬픔의 모성이 영롱한 합창으로 펼쳐진다. 페르골레지는 이 작품을 완성한 뒤 기력이 다하여 초연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젊은 페르골레지는 이 곡을 작곡할 때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어머니를 그리워했을 것 같다. 마지막 순간, 그는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몸부림치다가 힘없이 어머니를 부르지 않았을까?

 

 

드보르작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

안토닌 드보르작(1841~1904)은 꼬마 시절, 그는 교회 마당에서 바이올린으로 왈츠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귀엽다고 동전을 주면 부모에게 조르르 달려와서 웃는 귀여운 아이였다. 정육점을 하던 아버지는 장남인 그에게 가업을 물려주려 했고, 덕분에 그는 위대한 작곡가 중 정육점 면허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 됐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토닌이 16살 때 프라하의 음악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설득 덕분이었다.

 

 

드보르작은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연주하고 틈틈이 피아노 레슨을 하며 아기들을 키운 가난한 음악가였다. 결혼 3년째인 1875년, 드보르작은 빈 정부가 ‘젊고, 재능 있고, 가난한’ 예술가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됐다. 비로소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됐고, 세 아이의 앞날도 남부럽지 않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이 때, 치명적인 불행이 찾아왔다. 첫 딸 요제파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한 것. 드보르작은 <슬픔의 성모>를 작곡했다. 가장 슬픈 음악으로 딸을 떠나보내고 자신을 위로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1년 반 뒤, 둘째딸 루제나와 첫아들 오타카르마저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젊은 드보르작 부부는 넋을 잃고 쓰러졌다. 세 아이가 사라진 세상을 더 살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 그 추억이었다.

 

“늙으신 어머니 내게 이 노래 가르쳐 주실 때 두 눈에 눈물이 곱게 맺혔었네.

이제 내 어린 딸에게 이 노래 들려주려니 내 그을린 두 뺨 위로 한없이 눈물 흘러내리네.”

 

드보르작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 (소프라노 안나 넵트렙코) 바로 보기

 

 

이 노래를 들어야 할 아이들은 세상에 없었다. 하지만 이 노래를 가르쳐 주며 눈물 흘리셨던 어머니는 추억 속에서 살아나, 슬픔으로 쓰러진 아들을 안고 울어 주었다. 1880년 작곡한 <집시의 노래> 중 네 번째 곡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는 드보르작이 겪은 가장 큰 슬픔을 승화시킨 노래다.

헬세트가 연주한 <나의 작은 조국>

노르웨이의 오슬로 시청 옥상에서 젊은 트럼펫 연주자 헬세트가 <나의 작은 조국>을 연주한다. 2012년 7월 22일 노르웨이 TV로 생중계된 이 연주회는, 1년 전 일어난 ‘우토야섬 총기학살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자리였다.

 

 

티네 팅 헬세트 연주 <나의 작은 조국> 바로 보기

 

 

2011년 7월 22일, 한 극우 청년이 오슬로 정부청사에 폭탄 테러를 가한 뒤 우토야섬에서 열린 노동당 청소년 캠프 참가자 69명을 총기로 살해했다. 노르웨이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시민들은 피해자들에게 차분히 말했다.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어요. 숨지 말고 함께 괴로움을 나눠요!” 유족과 생존자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하여 이들이 스스로 일어서도록 도왔다.

 

유족과 생존자들은 ‘치유여행’을 떠났다. 비가 흩뿌리는 서늘한 날씨였지만 숨진 분들의 넋을 기리는 편지와 촛불을 챙겨서 사건 현장인 우토야섬으로 추모 나들이를 간 것이다. 노르웨이 총리와 정부 관계자, 성직자, 응급의료진, 심리상담사들이 함께 했다. 총리는 말했다. “참극의 현장에 다시 선다는 것은 분명 고통스럽겠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는 게 장기적으로 상처 극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추모 나들이에 이어서 열린 추모 음악회는 노르웨이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집약한 자리였다. 슬픔의 힘이 모이고 모여 상처를 어루만질 때, 음악의 힘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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