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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 ㉓] 낭만시대, 제2의 베토벤을 기다리다-멘델스존과 슈만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4.14 09: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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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슈만은 <새 음악시보>에서 멘델스존의 D단조 피아노 트리오를 소개하며 그를 ‘19세기의 모차르트’라고 불렀다.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 모차르트에 못지않은 신동이었다. 그는 유태계의 명문가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모제스는 ‘독일의 소크라테스’로 관용을 설파한 철학자였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폴레옹 전쟁 때 금융업으로 큰 돈을 모은 자산가였다. 이모 할머니 사라 레비는 바흐의 장남 프리데만에게 음악을 배웠고 어머니 레아 잘로몬는 바흐를 잘 연주하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멘델스존의 집에는 헤겔, 하이네, 호프만 같은 지식인 뿐 아니라 훔멜, 베버, 슈포어, 스폰티니 같은 쟁쟁한 음악가들이 출입했다. 멘델스존의 음악교육은 집에서 자연스레 이뤄졌고, 10살 때 처음 작곡을 했고, 12살 때 괴테로부터 “모차르트보다 뛰어난 신동”이라는 평을 받았다. **

 

멘델스존을 바라보는 슈만의 속내는 다소 복잡했다. 그는 클라라 비크에게 말했다. “어찌 멘델스존과 나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난 아직 수년간 그에게 배울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나에게 배울 점이 있겠지요. 내가 멘델스존처럼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로 성장하도록 운명 지어진 환경에서 자랐다면, 어쩌면 그를 능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슈만은 원치 않는 법학 공부를 하다가 음악으로 전공을 바꿨다. 20살 때, 그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생활비도 없이 공부해야 했다. 젊은 슈만은 유복한 가문에서 자라난 멘델스존과 자기 처지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슈만은 멘델스존이 “바흐, 베토벤 등 위대한 거장들의 유산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시대를 열 작곡가”라며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멘델스존은 모차르트의 음악은 듣는 이를 괴롭히지 않으며 물 흐르듯 유려하게 흐른다는 점이 비슷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음악은 무척 대조적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장조일 때도 슬픔을 감추고 있지만 멘델스존의 음악은 단조에서도 행복감이 흐른다. 그의 이름 펠릭스(Felix)부터 ‘행복’과 어원이 같다. 멘델스존을 ‘겉과 속이 바뀐 모차르트’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멘델스존 현악 8중주곡 Eb장조 바로 보기

 

멘델스존이 16살 때 작곡한 현악 8중주곡 Eb장조는 생기 넘치는 발랄한 작품으로, 전통적인 사중주보다 훨씬 섬세하고 정교한 앙상블을 들려준다.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와 서곡 <핑갈의 동굴>은 1829년 스코틀랜드에서 구상한 작품으로, 우울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이듬해 이탈리아를 여행한 인상을 담은 교향곡 4번 <이탈리아>는 밝은 햇살과 쾌활한 사람들, 나폴리 순례자의 행렬, 떠들썩한 장터와 살타렐로 춤판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피아노 트리오 D단조는 베토벤의 <대공>, 차이코프스키의 <어느 예술가의 추억>, 드보르작의 <둠키>와 함께 널리 사랑받는 트리오로, D단조의 우울한 서정미와 특유의 온화하고 유려한 표정이 넘친다.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는 격정적이고 멜랑콜릭한 주제와 화려한 패시지가 어우러지는 걸작으로 베토벤, 브람스의 작품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꼽힌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바이올린 정경화, 게오르크 숄티 지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바로 보기

 

 

4살 연상인 누나 파니(1805~1847)는 동생 펠릭스 못지않은 천재였지만, 15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강요로 음악을 포기해야 했다. 49곡의 <무언가>는 어릴 적 누나와 함께 만들며 놀던 스타일의 가사 없는 노래다. 멘델스존은 “내가 사랑하는 음악은 가사가 없을 때 오히려 의미가 더 분명하다”고 했는데, 무언가 <봄노래> Op.62-6을 들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영국 필하모닉 협회, 버밍햄 음악제의 초청으로 열 차례나 런던을 방문, 헨델과 하이든 이래 가장 큰 환영을 받았다. 그의 <결혼 행진곡>은 1858년 영국의 빅토리아 공주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공과 결혼할 때 사용한 뒤 크게 유명해졌다.

 

멘델스존 가족은 1816년 기독교로 개종했다. 하이네에 따르면, 유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유럽 문화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었다. 멘델스존은 오라토리오 <성 파울로>와 <엘리아>를 비롯, 수많은 종교 작품으로 기독교 세계에 봉사했다. 20살 때인 1829년, 그는 바흐 <마태 수난곡>을 부활시켰다. 이 곡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이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은 폭발적인 관심 속에 지휘봉을 들고 침착하게 음악을 이끌었다. 이 연주회 이후 바흐는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부활했고, 어느새 ‘음악의 아버지’ 칭호를 얻게 됐다. ‘바흐 르네상스’를 이끈 장본인이 바로 멘델스존이었다.

 

멘델스존은 나이가 들수록 명성이 높아졌지만,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여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쉬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수없이 하소연했지만 쏟아지는 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1847년 5월 ‘영혼의 샴쌍동이’ 같은 누나 파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펠릭스는 삶의 의지를 잃고 무너져 내려 같은 해 11월 숨을 거둔다.

 

그가 슈만의 기대처럼 “제2의 베토벤을 예견케 한 19세기의 모차르트”였는지 결론 짓기는 어렵다. 슈만과 멘델스존은 1835년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음악감독으로 왔을 때 처음 만났고, 평생 우정을 유지했다. 슈만은 비평으로 멘델스존을 격려했고, 멘델스존은 슈만 교향곡을 지휘하여 세상에 알렸다. 슈만이 발굴한 슈베르트 교향곡 9번 C장조를 지휘해서 음악사에 복원한 것도 멘델스존이었다. 바그너 추종자 한스 폰 뷜로는 멘델스존을 “천재로 태어났으나 재주꾼으로 끝난 평범한 작곡가”로 폄하하기도 했다.

 

슈만은 <새 음악시보>에서 멘델스존을 이렇게 자리매김했다. “멘델스존은 음악사에서 마지막 작곡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차르트 이후에 베토벤이 왔듯, 이 현대의 모차르트 뒤에는 새로운 베토벤이 따라올 것입니다. 사실, 그는 이미 태어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2의 베토벤’을 기다린 슈만, 그 자신의 음악은 어떠했을까? 혹시 스스로 ‘제2의 베토벤’이 되고 싶었지만 좌절했던 걸까? 슈만은 시기별로 특정 장르에 집중하는 습성이 있었다. 1830년부터 약 10년 동안 쓴 작품은 거의 다 피아노곡으로, <카니발>, <어린이의 정경>, <크라이슬러리아나> 등 성격 소품을 주제별로 묶은 게 많다. <교향적 연습곡>은 주제와 16개의 변주로 구성된 대곡으로, 영웅적인 혁명가 플로레스탄과 고요하고 위엄있는 오이제비우스를 조화시키려 했다. <환상곡> C장조는 사랑하던 클라라에 대한 갈구를 표현한 곡으로, 1악장 마지막 부분에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인용했다.

 

클라라 비크(1819~1896)와 결혼한 1840년은 ‘가곡의 해’였다. 슈만은 한 해 동안 연가곡 <시인의 사랑>, <여인의 생애와 사랑> 등 무려 138곡의 가곡을 썼다. 클라라와의 사랑에 자극받았고, 살림을 꾸리려면 악보를 쉽게 팔 수 있는 가곡이 유리했다. 그는 하이네의 시를 즐겨 사용했으며, ‘피아노와 성악의 이중주’라 할 정도로 피아노의 역할을 강조했다. 결혼을 기념하여 클라라에게 바친 가곡집 <미르테의 꽃> 중 첫 곡 ‘헌정(Widmung)’은 아름다운 사랑 고백이다.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클라라와의 사랑의 결실이다. 피아노 스승 프리드리히 비크의 큰 딸 클라라는 10대에 이미 유능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슈만이 연습 중 손을 다쳐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되자 클라라는 슈만의 곡을 연주해서 널리 알렸다.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됐고, 슈만은 클라라에게 “너는 나의 오른손”이라고 말했다. 프리드리히 비크의 반대에 맞서 두 사람은 법정투쟁까지 벌인 끝에 간신히 결혼했다. 클라라를 위해 작곡한 A단조 협주환상곡은, 첫 투티에 이어서 오보에가 ‘클라라의 모토’를 달콤하게 노래하고, 행동하는 인간 플로레스탄과 꿈꾸는 인간 오이제비우스가 대화하며 이 모토를 발전시킨다. 그녀는 1841년 8월 라이프치히에서 이 곡을 초연한 뒤, 세 악장으로 된 협주곡으로 개작해 달라고 남편에게 요구했다. 1845년 완성된 이 A단조 협주곡을 클라라는 평생 연주하며 다녔다.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피아노 마르타 아르헤리치, 리카르도 샤이 지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바로 보기

 

 

결혼 이후 슈만은 작곡 영역을 확대, 3번 <라인> 등 4곡의 교향곡, 피아노 오중주곡 Eb장조 등 실내악곡, 그리고 첼로 협주곡 A단조를 썼다. 문학을 사랑했고 글솜씨가 뛰어났던 그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내면의 ‘분열과 파편, 그리고 매혹’을 음악에 담았다. 20살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가 슈만과 클라라의 집을 방문한 건 1853년 가을이었다. 그는 갓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연주했고, 슈만은 <음악신보>에 실린 ‘새로운 길’이란 글에서 “크로노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한 미네르바처럼 갑자기 나타난 거장”이라고 브람스를 격찬했다. 이 글로 브람스는 단숨에 유명해졌지만, 극도로 긴장했고 자기비판적인 성격이 더 강해졌다. 슈만은 ‘제2의 베토벤’을 갈망했지만, 그 자신이든 브람스든 누구도 ‘제2의 베토벤’이 될 수 없는 시대였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우울증이 악화된 슈만은 1854년 2월 라인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한 뒤 자기 발로 정신병원을 찾아갔고, 2년 뒤인 1856년 7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 어린 시절의 멘델스존이 모차르트에 못지않은 천재였다는 점은,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을 목격한 괴테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멘델스존이 어린 나이에 이룬 성취를 같은 나이의 모차르트와 비교하면, 다 자란 어른의 교양 있는 대화를 어린이의 혀짤배기 소리에 비교하는 것과 같네.” 괴테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더라도, 두 천재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50년 넘는 시차가 있기 때문에 듣고 자란 음악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나중에 태어난 멘델스존의 음악이 더 ‘교양 있는 대화’로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모차르트는 35살 내내 성장한 천재였지만, 멘델스존은 평생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멘델스존은 34살 때 <한여름밤의 꿈>을 작곡하며 17살 때 작곡해 둔 서곡을 사용했는데, 이 서곡은 다른 어떤 부분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17살 때와 34살 때의 작곡 실력이 비슷했다는 뜻이다. 반면 모차르트가 17살 때 작곡한 ‘작은 G단조’와 32살에 작곡한 ‘큰 G단조’, 두 교향곡 사이에는 커다란 발전이 있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차이는 뭘까? 모차르트는 뭘 실험해도 새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통관습시대’의 정점에 살았지만, 멘델스존은 자기만의 새로운 음악어법을 만드는 게 지극히 어려운 낭만시대에 살았다. 모차르트처럼 해마다 발전하는 천재가 되는 건 멘델스존에겐 허용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멘델스존의 시대는 ‘제2의 모차르트’는 나올 수 없고, 그냥 천재로서 소모될 수밖에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멘델스존이 모차르트와 대등한 신동이었는데도 음악사에서 모차르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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