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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㉔] 민족 음악의 물결 : 베르디, 베버, 바그너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4.18 09: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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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 청중들은 박수를 치며 오케스트라와 흥겹게 어우러진다. 이 행진곡의 주인공 라데츠키는 누구일까? 1848년 쿠스토차 전투에서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진압하여 오스트리아의 국민 영웅이 된 장군이다. 왕당파였던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그 해, 라데츠키 장군을 예찬하는 이 행진곡으로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왈츠의 왕’으로 불리는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공화파로, 음악 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아버지와 경쟁했다. 그는 1866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의 패배로 실의에 빠진 빈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했다.

 

라데츠키 행진곡 (마리스 얀손스 지휘, 2012 빈필 신년음악회) 바로 보기

 

이 무렵, 주세페 베르디(1813~1901)는 억압받는 이탈리아인의 설움을 오페라 <나부코>(1842)에 담았다. 히브리 포로들이 바빌론에 끌려가며 부르는 합창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는 이탈리아 민중의 마음을 대변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즉 통일 · 독립 운동에 활력과 영감을 주었다. 빅토르 위고 원작의 <에르나니>(1844)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시위대와 무장 독립단체는 이 오페라의 패션인 깃털 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사람들은 집회에서 “베르디 만세”를 외쳤는데, ‘베르디(Verdi)’는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Vittirio Emmanuelle, Re di Italia)’를 뜻했다. 1861년, 가리발디 장군의 주도로 이탈리아는 외세를 몰아내고 마침내 독립을 이뤘다.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중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바로 보기

 

 

평론가들이 자기 작품을 ‘통속적’이라고 비판하면 베르디는 오히려 기뻐했다. 이러한 악평이 흥행의 보증서라고 생각한 것이다. 베르디는 더 많은 대중과 희노애락을 나누는 게 제일 큰 목표였다. 꼽추 어릿광대 리골레토와 그의 딸 질다의 비극을 그린 <리골레토>(1851), 19세기 프랑스 사교계의 슬픈 사랑을 그린 <라 트라비아타>(1853)는 지금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 베르디는 1861년 이후 한때 정치에 몸담았지만 작곡을 계속했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한 장대한 스펙터클 <아이다>(1871), 이탈리아 오페라의 과거를 종합하여 미래를 제시했다고 평가되는 비극 <오텔로>(1887), 기나긴 인생행로의 종점에서 달관의 세계를 보여준 희극 <팔스타프>(1893) 등 그는 80살까지 음악혼을 불태웠다.

베르디는 1889년 밀라노에 음악가들을 위한 휴식의 집 ‘카사 베르디’를 짓고, 이를 자신의 ‘최고 오페라’*라고 불렀다. 1901년 2월 27일, ‘카사 베르디’로 향하는 그의 운구 행렬 주변에는 20만 명의 인파가 모여서 눈물을 흘렸고,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와 800명의 합창단이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를 불렀다.

 

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는 음악사에서 여러 모로 중요한 인물이다. 피아노를 위한 매력적인 왈츠 <무도회에의 초대>는 19세기 빈 왈츠의 모델이 됐고, 베를리오즈가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뒤 더욱 유명해졌다. 청중들이 피아노 협주곡 전 악장을 지루해 하자 베버는 한 악장으로 된 ‘콘체르트슈튀크(Konzsertstück)’를 개발했다. 그의 ‘콘체르트슈튀크’ F단조는 최근 점점 더 자주 연주되는 추세다. 그는 지휘봉을 처음 사용한 지휘자였고, 음악가 · 문필가 · 기획자 등 1인 3역을 해낸 최초의 예술가였다. ‘사냥꾼의 합창’으로 유명한 그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는 스폰티니의 <올림피아>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려 독일 오페라의 자존심을 살렸다. 베버는 바그너가 가장 존경한 음악가로, 호프만의 <운디네>를 비평하는 글에서 ‘총체예술’의 아이디어를 제시하여 바그너에게 영향을 주었다.

 

베버 <마탄의 사수> 서곡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바로 보기

 

 

베버 <마탄의 사수> 중 ‘사냥꾼의 합창’ 바로 보기

 

베르디와 동갑내기인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어린시절 연극배우인 새아버지 루트비히 가이어를 따라 극장에 가서 하루 종일 놀며 연극의 모든 것을 익혔다. 그는 9살 때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오페라는 “환상적이고 매혹적이고, 섬뜩할 정도로 흥미로운 세계”였다. 15살 때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고 감동한 뒤에는 며칠 밤을 새우며 이 곡의 악보를 베껴 썼다. 18살에 라이프치히 음대에 진학한 바그너는 교향곡 C장조를 썼지만, “베토벤 교향곡 9번 이후 새로운 교향곡을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새로운 음악 장르인 ‘음악극(Musikdrama)’를 구상했다. 그는 20대부터 공연이 실패할 때마다 빚이 쌓여서 도피 행각을 벌였다. 1839년, 아내 민나 플라너와 함께 파리로 도망 간 바그너는 “모든 소유는 도둑질”이라는 프루동의 사상에 심취했는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훗날 <니벨룽의 반지>에서 황금 숭배에 대한 저주로 나타난다. 파리에서 작곡한 <리엔치>(1842)는 마이어베어의 그랑 오페라에 내민 도전장이었다. 로마의 마지막 호민관인 리엔치의 혁명과 좌절을 그린 이 작품은 1842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어 바그너에게 ‘첫 승리’를 안겨 주었다.

 

 

바그너는 1849년 드레스덴 봉기를 주도한 혐의로 10년 넘게 수배 생활을 했다. 시민들은 무장봉기로 메테르니히 체제를 타도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세웠지만 결국 프로이센 지원군의 개입으로 좌절됐다. 바그너는 리스트가 마련해 준 위조여권과 돈 덕분에 취리히로 도피할 수 있었다. <방황하는 유령선>(1843), <탄호이저>(1845), <로엔그린>(1850) 등 세 작품은 ‘낭만 오페라’로 분류된다. <방황하는 유령선>은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하면 영원히 항해해야 하는 선장 달란트가 젠타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탄호이저>는 13세기 초, 사랑의 여신 비너스와 기독교의 구원 사이에서 방황한 음유시인 탄호이저의 전설을 담고 있다. <로엔그린>은 1850년 바이마르의 괴테 탄생 기념 축제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지휘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은 역경에 빠진 엘자 폰 브라반트를 구한 뒤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자기 정체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그녀 곁을 떠난다. 리스트는 이 작품의 악보를 바그너로부터 받고 “로엔그린의 에테르에 흠뻑 취해 있다”며 ‘기적 같은 작품’이라고 예찬했다.

1852년 바그너는 후원자 오토 베젠동크의 아내인 마틸데 베젠동크와 사랑에 빠져, 그녀가 쓴 5편의 시로 ‘베젠동크 가곡’을 작곡했다. 바그너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 트리스탄에 대한 중세 서사시를 떠올렸다. 마르케 왕에게 충성하면서도 그의 아내가 될 이졸데를 사랑하는 트리스탄은, 오토 베젠동크의 우정에 감사하면서도 그의 아내 마틸데를 사랑하는 바그너 자신이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낭만의 테마를 극한까지 표현했다. 두 사람은 죽기 위해 독배를 비웠지만, 알고 보니 사랑의 묘약이었다. 사랑의 절정에서 영혼과 육체의 합일을 갈구한 두 사람은 결국 죽음을 택한다.

무조음악의 언저리를 표류하는 이 음악은 빈에서 1864년 77번의 리허설 끝에 “연주 불가능한 작품”으로 낙인찍혔다. 다시 빚쟁이들에게 쫓기게 된 바그너는 여장을 하고 빈에서 탈출했다. 이 때 바그너를 도와 준 사람이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였다. 그는 바그너를 뮌헨으로 초빙하여 안정된 삶을 누리게 해 주었고, 1865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하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루트비히 2세는 자기가 즐겨 타던 놀이배를 ‘트리스탄’이라 불렀고, 바그너를 기리기 위해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도록 했다.

 

$$ 미래의 예술, <니벨룽의 반지>

필생의 역작 <니벨룽의 반지> -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 등 네 작품을 나흘 동안 공연하도록 구성한 연작 오페라 - 는 1843년 테플리츠에서 처음 구상했다. 이 때 영감을 준 것은 그림 형제의 <독일 신화>였다. 1851년, 망명지 취리히에서 냉천욕과 암벽타기를 즐긴 바그너는 알프스의 신기한 암벽들에서 <발퀴레> 무대의 암벽을 떠올렸다. 취리히의 집 건너편에 들어선 철공소의 망치소리가 괴로웠지만, 그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지크프리트> 첫머리의 대장간 장면을 작곡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소음 속에서 ‘지크프리트의 목가’를 작곡하여 아내 코지마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고, 이듬해 축제극장 후원회장인 피아니스트 타우지히가 세상을 떠나자 ‘지크프리트 장송곡’을 작곡했다. <니벨룽의 반지>는 막바지 수정을 거쳐 1874년 11월 완성됐다. 무려 30년의 대장정이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중 바그너 ‘발퀴레의 기행’ 바로 보기

 

 

바그너가 꿈꾼 ‘미래의 예술’은 무엇일까? 과거의 오페라는 ‘넘버 오페라’로, 대사나 레시타티보를 통해 드라마가 전개되고, 노래를 통해 주인공들의 심경을 표출한다. 이러한 전통 오페라는 노래가 나올 때는 드라마가 정지되며, 노래에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져 있기 때문에 ‘넘버 오페라’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바그너의 작품은 드라마와 음악이 하나로 융합돼 있고, 드라마가 전개될 때도 음악이 계속 흐른다. 이렇게 끝없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선율을 ‘무한선율’이다. 이 ‘무한선율’은 주인공의 캐릭터와 심리상태를 암시하는 ‘유도동기(Leitmotiv)’로 이뤄져 있다. <니벨룽의 반지>에는 보탄, 브륀힐데, 지크프리트, 알베리히, 로게 등 등장인물은 물론, 지크프리트의 칼인 ‘노퉁’의 유도동기까지 나온다. 바그너는 연극과 음악을 하나로 융합한 자신의 새로운 오페라를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e)’이라고 불렀다.

<니벨룽의 반지>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개막을 기념하여 1876년 8월 13일 초연됐다. 니체, 리스트, 그리이그, 브루크너, 차이코프스키가 객석에 있었다. 몇몇 장면에서 무대 장치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공연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신들의 황혼>, 마지막 구원의 모티브가 울려 퍼지고 막이 내리자 바그너는 “우리는 이제 새로운 예술을 갖게 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장터에나 어울릴 볼거리를 위해서 만든 음악”이라는 혹평도 나왔다. 사실 바그너는 첫 공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코지마에게 “모든 게 잘못 됐다”고 털어놓았고, 죽고 싶을 정도로 우울해 했다.

 

바그너 <신들의 황혼> 피날레 부분 바로 보기

 

 

그는 <니벨룽의 반지> 공연으로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았지만 이번에도 루트비히 2세가 해결해 주었다. 바그너는 중세 음유시인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시를 토대로 두 번째 축전극 <파르지팔>을 작곡했다. 이 작품에는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개막 때 만난 유디트 고티에 - 시인 테오필 고티에의 딸 - 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오페라에서 마술사 클링조르는 매력 넘치는 유혹자 쿤드리를 ‘지옥의 장미’라 부르는데, 이 쿤드리의 모델이 바로 유디트였다. 1882년, 스스로 “세상에 작별을 고한 작품”이라 부른 <파르지팔>의 초연은 놀랄만한 성공을 거뒀고 바그너에게 순이익 14만 마르크과 저작권료 10만 마르크를 안겨주었다. 바그너는 아내 코지마, 세 자녀와 함께 베네치아로 떠나 모처럼 푹 쉬던 중, 1883년 2월 13일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남의 돈을 자기 돈처럼 쓰고, 은혜를 베푼 사람의 아내와 예외 없이 불륜을 저지른 부도덕한 인물로 비난받는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성취는 도덕성을 초월하여 언제나 외경의 대상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그의 반유태주의와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때문에 2차대전 이후 기피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브루노 발터, 게오르크 숄티, 다니엘 바렌보임, 주빈 메타 등 유태계 대지휘자들은 기꺼이 그의 작품을 연주했다. 그의 오케스트라 기법은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에 자극을 주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호오는 극단적으로 엇갈리지만, 그가 낭만 음악의 가장 대담한 혁명가였다는 점에는 별 이견이 없다.

 

* 오페라(Opera)는 ‘작품’이란 뜻의 라틴어 오푸스(Opus)의 복수형이다. 베르디는 여기서 오페라를 그냥 ‘작품’이란 뜻으로 유머러스하게 사용했다.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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