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의 잃어버린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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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가치 외면하는 공영방송

▲ 정권이 공영방송을 장악하면서 민주주의가 훼손됐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읽힌다. 이처럼 민주주의와 공정방송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언론사는 ‘민주주의’를 예능 아이템으로 소화할 뿐 ‘민주주의의 목소리’를 전하는 데 멈칫거린다. ⓒ MBC

조기 대선을 앞둔 국면에 ‘민주주의’는 방송 프로그램 아이템으로 꽤 매력적이다. 지난해부터 불거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까지 격변기를 겪으며 대중의 관심은 ‘민주주의’에 쏠려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김구라는 심용환 역사작가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방송했다. 헌법 1조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살펴보고, 탄핵과 하야의 역사에 대한 썰을 풀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는 첫 방송에서 유시민 작가를 앞세워 ‘민주주의’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방송인 오상진의 ‘폭풍 눈물’이 화제가 됐다. MBC 퇴사 이후 출연한 데 대해 남다른 감회를 내비쳤고, 진행자는 ‘눈물’을 ‘반가움’으로 해석했다. 방송가의 핫아이템 ‘민주주의’와 ‘오상진’, 언뜻 보면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무언가가 겹쳐진다.

오상진의 눈물은 마냥 반가움이라기엔 그의 궤적을 따라가면 달리 보인다. 그는 지난 2012년 MBC노조 170일 파업 사태 이후 방송에서 얼굴이 보기 힘들어지면서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전향의 이유를 ‘파업’으로만 단정 짓기 어렵겠지만 당시 그가 거리에서 외쳤던 ‘공정방송 회복’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요원하다는 건 분명하다. 대선을 앞둔 후보들도 일제히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는 공영방송을 만들겠다”고 한 목소리로 높이고 있다. 정권이 공영방송을 장악하면서 민주주의가 훼손됐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읽힌다. 이처럼 민주주의와 공정방송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언론사는 ‘민주주의’를 예능 아이템으로 소화할 뿐 ‘민주주의의 목소리’를 전하는 데 멈칫거린다.

MBC는 지난 13일 방송 예정이었던 <MBC 스페셜> ‘탄핵’ 편을 불방 시켰다. 담당 PD는 비제작부서로 전보 배치됐다. MBC노조에 따르면 제작진은 지난해 12월부터 ‘탄핵’을 주제로 3개월 간 제작해왔으나 담당 본부장이 “보고받은 기억은 있지만 승인한 적이 없다”며 편성을 취소하고 다른 편으로 대체 방영했다. KBS 또한 <KBS 스페셜> ‘광장의 기억’ 편이 불방 사태를 맞았다. 제작진은 5개월 간 촛불집회를 기록하고 집회에 참여한 국민의 목소리를 담았지만 사측은 대통령 선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편성을 연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SBS는 지난 12일 <SBS 스페셜> ‘사건번호 2016헌나1’편을 통해 탄핵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룬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 여느 때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청자를 위해 사회적 공기로서 임무를 다하지 않고, 오히려 ‘현장의 기록과 목소리’를 배제하고 있다. ⓒ JTBC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공영방송의 불방 사태에 직면한 MBC노조는 “공영방송사로서 역사에 대한 기록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지난해 말 언론, 방송학자 484명이 “기울어진 언론 공론장을 바로 잡아야 할 시점”이라고 시국 선언을 하는 등 공정방송 회복을 촉구했으나 공영방송은 공적 책임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탄핵’과 ‘광장의 기억’의 제작진이 수개월간 ‘민주주의의 얼굴’을 숱하게 만났는데도 공영방송은 정작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시청자와 공유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평범한 카타리나 블룸은 수배 중인 남자를 재워줬다는 이유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언론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한다.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면서 블룸은 테러리스트의 공조자,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고, 결국 기자를 살해하고 자수한다. 소설이 ‘공론장의 폭력’에 대해 말한다면, 현재 공영방송은 ‘공론장의 배제’를 보여준다. 여느 때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청자를 위해 사회적 공기로서 임무를 다하지 않고, 오히려 ‘현장의 기록과 목소리’를 배제하고 있다. ‘다시 민주주의’라는 메시지가 힘을 받는 상황에서 공영방송의 잃어버린 명예의 상처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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