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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 ㉕] 낭만시대 후기의 거장 : 브람스, 드보르작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4.21 10: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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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난 1870년은 베토벤 탄생 100주년이었다. 1850년은 바흐 서거 100년, 1856년은 모차르트 탄생 100년, 1859년은 헨델 서거 100년이었다. 음악가들은 새로 창작된 음악들 뿐 아니라 과거 음악들도 연주했고, 작곡가들은 동시대 작곡가들 뿐 아니라 옛 거장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베를리오즈 · 리스트 · 바그너 등 ‘신독일주의’ 음악가들은 ‘미래 음악’을 향해 질주했다.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으로 민족음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었다. 새 강대국으로 떠오른 프로이센에서 베토벤과 바그너는 독일 음악의 영웅이었다. 쇼팽 피아노곡은 폴란드 민족혼의 상징이었고 베르디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운동에 활력을 주었다.

 

$$ <나의 조국>과 <핀란디아>

오스트리아 통치 아래 있던 체코에서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가 민족 음악에 앞장섰다. 1848년 혁명 때 그는 <자유의 노래>, <학생부대 행진곡>, <국민군 행진곡> 등으로 독립투쟁에 참여했다.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블타바(몰다우)’는 체코 사람들의 가슴에 어머니로 살아 있는 블타바 강물 위에서 체코의 영광된 과거를 노래한다.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그리이그(1843~1907)는 “내 음악에서는 베링해의 대구 맛이 난다”고 했다.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을 토대로 한 음악극 <페르귄트> 중 ‘아침 느낌’, ‘오제의 죽음’, ‘솔베이지의 노래’는 노르웨이의 숲과 신선한 공기, 애수어린 정서를 담고 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도 ‘할링’이라는 노르웨이 춤사위를 활용했다.

 

스메타나 <나의 조국> 중 ‘블타바’ (쿠벨릭 지휘, 1989 프라하의 봄 개막연주) 바로 보기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자라스테 지휘, 헬싱키 음악홀개관 기념연주) 바로 보기

 

 

장 시벨리우스(1865~1957)의 교향시 <핀란디아>는 러시아의 핍박으로 상처입은 조국에 대한 피 끓는 사랑으로 가득하다. 이 곡은 ‘수오미(호수의 나라)’란 제목으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초연됐는데, 너무 선동적인 음악이라는 이유로 러시아 당국이 연주 금지령을 내렸지만, 1904년 대파업으로 해금된 뒤 <핀란디아>란 제목으로 널리 연주됐다. 후반부 합창 ‘핀란드 찬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핀란드여 높이 일어나라, 노예의 굴레를 벗은 그대, 압제에 굴하지 않은 그대, 오 핀란드, 나의 조국….”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또한 핀란드의 숲과 호수의 서늘한 정취, 애수와 열정으로 가득하다. 시벨리우스의 일곱 교향곡 중 2번 D장조는 그의 ‘영혼의 고백’으로, 우수와 긴장 속에서 시작하지만 피날레는 해방과 승리의 감격을 벅차게 노래한다.

$$ 요하네스 브람스 -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

독일어 가사를 사용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1868)이 그의 출세작으로 환영받은 것도 이러한 민족주의와 무관하지 않았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는 시대의 격랑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성찰로 자기 예술세계를 가꿔 낸 사람이었다. 20살 때인 1853년 9월, 브람스는 슈만 부부를 찾아가서 갓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연주했다. 슈만은 <새 음악시보>의 ‘새로운 길’이란 글에서 “크로노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한 미네르바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거장”이라고 이 젊은 음악가를 격찬했다. 이 덕분에 브람스는 단숨에 유명 음악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오히려 심각한 자기비판에 빠져 그때까지 작곡한 곡들을 대부분 파기해 버렸다.

브람스는 1876년 첫 교향곡을 발표하기까지 “베토벤이란 거인의 발자국을 등 뒤에 의식하며” 무려 20년의 산고를 겪어야 했다. 이 곡은 베토벤 5번처럼 조성이 C단조였고, 4악장의 웅대한 행진이 베토벤 9번의 피날레를 연상시켰다.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이 곡을 듣고 “드디어 베토벤 교향곡 10번을 얻었다”고 찬양했다. 브람스는 이미 빈 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인사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베토벤과 비교하는, 칭찬인지 아첨인지 모를 평론가들의 입방아는 계속됐다. 교향곡 2번 D장조는 ‘브람스의 <전원>’, 3번 F장조는 ‘브람스의 <영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스 폰 뷜로는 한술 더 떠 “브람스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위대한 3B”라고 치켜세웠다. 브람스가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필생의 꿈을 이룬 셈이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속물이 아니었다.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교향곡 중 베토벤과 비교되지 않은 건 마지막 작품인 4번 E단조, 단 하나였다. 이 작품에서 브람스는 ‘고통을 너머 환희로’ 가는 베토벤의 전형을 버리고 4악장 피날레를 바로크 풍의 파사칼리아와 변주곡으로 장식했다. 평생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 살다 간 브람스는 이 곡에서 완전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였다. 클라라 슈만이 1896년 세상을 떠났을 때 브람스는 이 곡 1악장의 자필악보에 “오, 죽음이여, 죽음이여”라고 써 넣었다. 브람스와 40년 넘게 음악적 연인으로 지낸 클라라 슈만(1819~1896)은 “브람스 음악은 투박한 껍질 안에 가장 달콤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열매”라고 했다.

브람스는 10살 때 함부르크의 선술집에서 당시 유행하던 춤곡과 대중가요를 연주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19살 되던 1852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드 레메니와 여행하며 앵콜곡으로 집시 음악을 연주했는데, 브람스는 이 선율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틈틈이 악보에 적었다.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으로 정리한 <헝가리 무곡>은 크게 히트했고, 헝가리 사람들은 이 작품에 대해 브람스에게 깊이 감사했다. <헝가리 무곡>의 악보가 잘 팔리자 레미니는 ‘표절’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브람스가 표지에 ‘피아노 편곡’이라고 분명히 써 놓았기 때문이었다. 브람스는 집시 음악 뿐 아니라 독일 민요도 가곡과 피아노곡으로 만들었다.

 

브람스 헝가리 무곡 1번 (바렌보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바로 보기

 

 

그의 피아노협주곡 1번 D단조와 2번 Bb장조의 오케스트라 파트는 교향곡처럼 웅장한 울림을 들려준다. 친구 요아힘을 위해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는 장대한 스케일과 비장미 넘치는 악상으로 베토벤, 멘델스존의 작품과 함께 ‘3대 바이올린협주곡’으로 꼽힌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협주곡 A단조는 이미 네 곡의 교향곡과 세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두 곡의 첼로 소나타를 쓴 브람스의 음악적 경륜을 집약한 걸작으로,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와 첼리스트가 우정을 표시할 때 즐겨 연주한다.

브람스의 세 바이올린 소나타와 두 첼로 소나타는 베토벤의 작품 다음으로 자주 연주된다. 그는 만년에 알게 된 클라리넷 연주자 리하르트 뮐펠트를 위해 아름다운 클라리넷 오중주곡 B단조와 두 곡의 클라리넷 소나타를 썼다.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와 클라리넷 소나타 Eb장조는 1악장이 ‘알레그로 아마빌레(빠르고 정답게)’라고 돼 있는데, 그가 얼마나 따뜻한 내면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느끼게 해 준다.

19세기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 진영과 브람스 진영으로 나뉘어 진정한 독일 음악의 본질에 대해 논쟁을 벌였는데, 정작 브람스 자신은 논쟁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악보를 검토한 뒤 “나는 열렬한 바그너주의자”라고 말했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가 대중들의 인기를 끌자 “내가 요한 슈트라우스가 아닌 게 유감”이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브람스가 음악사에 남긴 공헌 중 체코의 무명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작(1841~1904)을 찾아내어 빈 음악계에 알린 일을 빼놓을 수 없다.

 

$$ 안토닌 드보르작, “신세계 교향곡은 체코 음악”

드보르작은 34살이 되도록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해서 푼돈을 버는 한편 틈틈이 피아노 레슨까지 하며 아기들을 키운 가난한 음악가였다. 결혼 3년째인 1875년, 드보르작은 빈 정부가 ‘젊고, 재능 있고, 가난한’ 예술가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되어 비로소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이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드보르작의 천재성을 예찬한 사람이 바로 브람스였다. 브람스는 자신의 <헝가리 무곡>을 펴낸 짐로크 출판사에 드보르작을 소개했는데, 여기서 출판한 <슬라브 무곡>이 크게 히트했다.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은 짐로크 출판사가 자기 이름을 독일식으로 ‘안톤 드보르작’(Anton Dvorak)이라고 표기하자 크게 항의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한 젊은이였다. 그는 체코의 시골 넬라호제베스에서 14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교회 마당에서 바이올린으로 폴카나 왈츠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귀엽다고 동전을 주면 부모에게 조르르 달려와서 웃어 보이는 꼬마였다. 정육점을 하던 아버지는 가업을 맏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고, 덕분에 그는 정육점 면허를 가진 유일한 대작곡가가 됐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토닌이 16살 때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외삼촌의 끈질긴 설득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달구지에 안토닌의 짐을 싣고 터벅터벅 걸어서 아들을 프라하까지 바래다주었다.

1875년 브람스에게 인정받은 곡은 교향곡 3번과 4번, 그리고 현악사중주곡을 비롯한 몇 편의 실내악곡이었다. 드보르작에겐 작곡가로 활짝 피어날 길이 열렸고, 세 아이의 앞날도 남부럽지 않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행운이 미소 짓던 바로 그 때, 치명적인 불행이 그를 찾아온다. 그의 세 아이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첫 딸 요제파가 죽었을 때 드보르작은 <슬픔의 성모>를 작곡하여 스스로 위로하고자 했다. 십자가에 못 막힌 예수를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큰 아이를 먼저 보낸 드보르작 부부의 마음과 같았다. 그러나 1년 반 뒤, 둘째딸 루제나와 첫아들 오타카르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젊은 부부는 넋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 그 추억이었다. “늙으신 어머니 내게 이 노래 가르쳐 주실 때 두 눈에 눈물이 곱게 맺혔었네. 이제 내 어린 딸에게 이 노래 들려주려니 내 그을린 두 뺨 위로 한없이 눈물 흘러내리네.” 1880년 작곡한 <집시의 노래> Op.55 중 네 번째 곡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는 드보르작이 겪은 슬픔을 승화시킨 노래였다.

 

드보르작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 (소프라노 안나 넵트렙코) 바로 보기

 

 

 

드보르작은 프라하 음대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교향곡 6번 D장조, 현악사중주곡 9번 D단조, 오페라 <후스교도> 등 체코의 민족 정서를 담은 걸작들을 썼다. 그의 이름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고, 1884년부터 1891년까지 여덟 차례 영국을 방문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그는 헨델, 하이든, 멘델스존 이후 영국인이 가장 사랑한 작곡가였다. 그의 교향곡 7번 D단조와 8번 G장조는 런던 필하모닉 협회의 요청으로 작곡했다.

1892년, 미국의 자네트 서버 여사가 그를 뉴욕 국립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했다. 18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지 400년 되는 해로, 드보르작 환영행사는 ‘두 개의 신세계 - 콜럼버스의 신세계가 음악의 신세계를 만나다’란 제목으로 성대하게 열렸다. 아직 이렇다 할 클래식 음악의 전통이 없었던 미국 사람들은 드보르작의 도움으로 미국 클래식 음악의 새 장이 열릴 것을 기대했고, 드보르작도 이러한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2년 반 동안 미국에 머물며 그는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 현악사중주곡 F장조 <아메리카>, 첼로협주곡 B단조 등 최고 걸작을 쓰게 된다.

자네트 여사는 음악원에 흑인 학생도 받아들인 진취적인 인물로, 드보르작이 미국 음악을 폭넓게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교향곡 <신세계에서>의 2악장 ‘라르고’는 흑인영가를, 3악장 ‘스케르초’는 인디언 춤곡을 사용하여 고향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교향곡 <신세계에서>가 초연되자 뉴욕 타임스는 “이 새로운 교향곡은 미국에도 예술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크게 반겼다. 그러나 이 떠들썩한 반응에 드보르작은 담담히 대답했다. “이것은 체코 음악이고,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드보르작은 뉴욕에서 첫 해 15,000달러의 엄청난 보수를 받았지만, 증권시장이 붕괴하고 자네트 여사가 파산하면서 수입이 5,000달러로 줄었다. 이미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드보르작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기 어려웠던 그는 1895년 프라하로 돌아왔고, 오페라 <루살카> 등 최후의 걸작을 쓴 뒤 1904년 5월 1일 체코인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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