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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㉖] 낭만시대 후기의 거장 : 차이코프스키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4.25 09: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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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드보르작이 차이코프스키와 의기투합한 것은 흥미롭다. 1888년 2월, 차이코프스키가 열광적인 환호 속에 프라하를 방문했다. 그는 단순히 러시아 음악가가 아니라 슬라브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영웅이었다. 두 사람은 만난 순간부터 서로 좋아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함께 지냈다. 차이코프스키는 드보르작의 피아노 오중주곡 2번 Op.81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그를 “나의 친애하는 별나고 재미있는 친구”라고 불렀다.

차이코프스키는 음악가에 대한 까칠한 평가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바흐가 위대한 천재라는 남들의 말은 믿을 수 없고”, “헨델은 완전한 3류라서 아무 흥미가 없고”, “베토벤은 중기작품은 괜찮은 편이지만 후기 현악사중주는 혐오스러우며”,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는 거대한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는 “나는 왜 이렇게 작곡을 못 할까” 탄식하며 늘 괴로워했다. 오직 모차르트만 ‘음악의 예수’라고 찬양하고 숭배했던 차이코프스키가 드보르작의 음악을 높이 평가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황실협회에서 체코 레퍼토리만으로 꾸민 음악회를 마련하고 드보르작을 초청했다. 드보르작도 1889년 프라하에서 공연된 <예프게니 오네긴> 리허설을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참관하는 등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찬탄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어릴 적 ‘유리로 만든 아이’처럼 극도로 섬세한 어린이였다. 그는 친절하고 쾌활했지만 이미 조울증과 간질 증세를 보였다. 10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에 들어갔는데, 어머니를 태운 채 멀어져 가는 열차를 절망적으로 울부짖으며 쫓아갔다. 어머니가 자기를 두고 떠난 이 순간은 그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 시절의 친구들부터 만년에 마음을 주었던 19살 조카 다비도프까지 자신의 동성애 성향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다. 현대 생물학은 동성애 유전자가 사람 뿐 아니라 대다수 동물에게 존재하며, 후천적으로 고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고 밝혀냈다. 하지만, 19세기 러시아는 동성애자를 마약사범과 같은 범죄자로 간주하여 시베리아 유형에 처했다. 차이코프스키도 자신이 못된 습관에 빠져 있다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의 모든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1870)부터 마지막 교향곡 <비창>(1893)까지, 그의 주요 작품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그는 <비창> 교향곡을 지휘하고 9일 뒤인 1893년 11월 6일 세상을 떠났는데, 이 곡을 쓸 때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 동창생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고, 격분한 동창들이 모교의 명예를 위해 차이코프스키에게 음독자살을 강요한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비창> 교향곡 4악장 (게르기에프 지휘, 마린스키 관현악단) 바로 보기

 

 

<비창> 교향곡은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자화상이다. 이 곡은 어두운 B단조로 시작하여, 햇살처럼 우아한 5박자의 왈츠와 금관과 심벌즈가 울리는 의기양양한 행진곡에서 삶의 찬란한 순간을 회상한다. 하지만, 피날레 ‘아다지오 라멘토소’(느리게, 비탄에 잠겨)는 첫 악장보다 더 어둡다. 비통한 탄식으로 시작하여 걷잡을 수 없는 통곡으로 폭발하고, 마침내 종소리가 들려오면 체념한 듯 고개 숙이고 떠나는 작곡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이 자신의 ‘가장 진실된 작품’이라고 했다.

‘멜로디의 천재’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접근할 때 발레 음악은 훌륭한 지름길이다. <백조의 호수>(1876),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호두까기인형>(1892)는 발레 음악을 교향악 수준으로 끌어올린 명작이다. <백조의 호수>는 지크프리트 왕자와 오데트 공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공주는 악마 로트바르트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가 되고 밤에만 인간으로 돌아오는데, 왕자의 참된 사랑만 이 마법을 풀 수 있다. 호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지만, 왕자가 악마의 딸인 오딜르를 오데트로 착각하여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호두까기인형>을 쓸 무렵 차이코프스키는 극심한 우울증 때문에 발레 음악을 쓸 기분이 전혀 아니었지만, 마린스키 극장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첼레스타와 피콜로 등 재미있는 악기를 동원하여 크리스마스 이브에 펼쳐지는 클라라와 호두까기인형의 사랑과 모험을 그렸다. 19세기 발레 음악은 오페라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보조 음악으로 여겨졌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작품들을 통해 어엿한 예술 음악의 지위를 갖게 됐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오네긴>도 차이코프스키 음악이지만 안무가 존 크랑코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곡 <사계> Op.37a, <녹턴> C#단조, 교향시 <리미니의 프란체스카>(1876) 등에서 선곡했을 뿐, 원래 발레 음악은 아니다.

 

피아노협주곡 1번 Bb단조(1874)는 존경하던 스승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에게 바치려 했지만, 스승은 “솔로 파트가 좋지 않고, 전체적으로 고르지 않다”는 혹평과 함께 이 곡을 거부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한스 폰 뷜로에게 악보를 주었고, 뷜로는 이듬해 미국 보스톤에서 이 곡을 초연해서 보기 좋게 성공시켰다. 니콜라이 루빈슈타인도 이 곡을 새롭게 평가하여 1875년 모스크바 초연에서 직접 지휘했고, 그 뒤 솔로 파트를 즐겨 연주했다. 1악장은 장대한 러시아의 설원을 떠올리게 하며, 마지막 악장은 승리의 함성으로 힘차게 삶을 긍정한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억지 결혼한 안토니나 밀류코바(1848~1917)를 피해 스위스로 요양 가서 쓴 작품이다. 1881년 초연됐을 때 평론가 한슬리크는 “귓속에 악취를 뿜어대면서도 음악일 수 있는 곡”이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검푸르게 멍이 들도록 두드려 패는 곡”이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이 곡은 오늘날 가장 널리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하나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Op.35 (바이올린 정경화, 1972) 바로 보기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와 음악을 얘기할 때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1831~1894)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철도 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람의 과부로, 무려 18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녀는 1876년 차이코프스키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싶다고 밝히며, “절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두 번 마주쳤는데,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지나쳤다.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해마다 거금 6천 루블을 보내주었는데, 이는 고급 공무원 연봉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폰 메크 부인의 편지는 처음에는 사무적인 투였지만, 갈수록 속마음을 담게 된다. “당신의 음악을 들을 때면 당신에게 완전히 굴복합니다. 당신은 제겐 신 같은 존재예요.” 차이코프스키도 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제 영혼이 힘닿는 데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제 인생으로 불러온 운명을 매 순간 축복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교향곡 4번 F단조를 ‘우리들의 교향곡’이라고 부르며 기뻐했다.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한 교향곡 5번 E단조가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자 부인은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그는 <1812년 서곡>(1882)이 형편없는 작품이라며 우는 소리를 했고, 그녀는 이때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피아노곡 <사계>를 잡지 ‘누벨리스트’에 연재할 때는 “팬케이크를 굽듯 기분 좋게 작곡하고 있다”고 즐거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이 일방적으로 시작해서 일방적으로 끝난 건 비극이었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주던 연금을 1890년 갑자기 중단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편지 교환이 멈추면서 우정마저 사라졌고, 차이코프스키는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끝난 그 해부터 차이코프스키는 급속히 노화가 진행됐고, 1893년 11월, 죽기 직전까지 폰 메크의 이름을 부르며 분노하고 원망했다. 그녀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은 어릴 적 어머니를 자기를 버리고 떠났을 때의 트라우마를 건드렸기 때문에 치명적이었다. 폰 메크 부인도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뒤인 1894년 1월 사망했다. 두 사람이 교류를 중단한 1890년 무렵부터 그녀는 몹시 아팠고, 한쪽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1876년부터 1890년까지 14년 동안 주고받은 수천 통의 편지는 차이코프스키 연구의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발라키레프, 세자르 큐이,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5인조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서구적이라고 비판했는데,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서유럽에 비해 음악 발전이 늦었던 러시아는 미하일 글린카의 오페라 <차르에게 바친 삶>(1837)을 신호탄으로 민족음악의 기치를 들었다. 차르 정부는 1862년 페테르부르크에, 1866년 모스크바에 음악원을 설립하여 러시아 음악 수준을 급속히 발전시키려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두 학교의 1기 수료생으로, 안톤 루빈슈타인과 니콜라이 루빈슈타인 형제의 가르침을 받았다.

차이코프스키가 민족주의를 표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19세기에는 스스로 의식하든 않든 누구나 민족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5인조에 못지않게 러시아의 향기를 담고 있다.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와 차이코프스키의 <예프게니 오네긴>은 둘 다 푸시킨의 원작을 사용했다. 보로딘의 <이고르 공>과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이드 퀸> 중 어느 게 더 러시아적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관현악법의 대가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셰라자데>와 <스페인 광시곡> 등으로 라벨과 스트라빈스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러시아 음악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역시 차이코프스키였다.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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