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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속말’, 법 정의도 인간도 무너진 세상의 지옥도

‘귓속말’, 이 곳에서 소신을 지킨다는 건 가능한가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l승인2017.04.26 09: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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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귓속말>이 심지어 전화 한 통화로 전하는 작은 귓속말로도 무고한 시민을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들이 정작 자신들은 살인을 저질러도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그 시스템의 끔찍함을 굳이 이런 지옥도를 통해 그려내려 한 건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 아닐까. ⓒ SBS

단 한 회만 봐도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다.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지고 그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인물들의 관계는 끊임없이 뒷통수를 친다. SBS <귓속말>의 세계는 공명정대한 판결로 국민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이동준(이상윤)이 그 굳건히 지켜왔던 소신을 깨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로펌 태백의 최일환(김갑수) 대표의 협박에 굴복한 그는, 태백이 공조하고 있는 보국산업의 방산비리를 캐던 기자의 살인죄로 기소된 신영주(이보영)의 아버지 신창호(강신일)에 유죄 판결을 내린다. 심지어 신영주에게 넘겨받은 증거물까지 파기해버리고.

하지만 그것은 이동준이 잘못된 길을 걷는 첫 걸음이었을 뿐, 인생의 단 한 번의 오점으로 끝나지 않았다. 보국산업 강유택(김홍파) 회장이 그 아들 강정일(권율)과 호시탐탐 노리는 태백을 지키기 위해 최일환은 이동준을 자신의 딸 최수연(박세영)과 정략결혼시킨다. 하지만 최수연과 강정일이 내연관계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상황은 복잡해진다. 강유택과 강정일을 궁지로 몰아넣자 딸 최수연이 나서서 최일환의 발목을 잡는다....

<귓속말>의 이야기 전개는 이런 식이다. 그 하나하나를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단 한 회 분량 안에서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바뀌는 것이 일상으로 벌어진다. 즉 한때는 죽고 못살 것처럼 애정관계를 드러내던 강정일과 최수연도 상황이 바뀌자 몇 년 간의 연인관계의 종지부를 찍고 적으로 돌아선다. 하긴 최일환과 최수연 같은 부모 자식 간에도 상황에 따라 대립하다 공조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니, 한 때 최일환의 충복처럼 여겨졌던 비서 송태곤(김형묵)이 금세 돌아서 그의 뒷덜미를 잡으려 하는 반전이 하나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렇게 써놓고 봐도 정신이 없을 정도로 복잡한 상황전개가 이어지고 있지만 흥미로운 건 그 복잡함이 이 드라마를 즐기는 데는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신념을 가진 존재가 없는 건 아니다. 즉 진실을 밝혀 아버지를 구해내고 그 악의 세력들을 척결하는 신영주의 신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이어진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은 신념이라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쉽게 입장을 바꾼다. 심지어 무고한 이를 유죄판결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신영주를 돕는 이동준 역시 속으로는 여전히 개인적인 이익과 타협하려는 욕망을 순간순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 복잡함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귓속말>이 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그 이합집산하는 인간군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연맹을 맺고 어떻게 그 관계를 파기하며 또 다른 욕망을 드러내는가 하는 구체적인 사안들을 일일이 꿰고 있지 않더라도 시청자들은 안다. 그 권력을 잡기 위한 무한쟁투가 바로 지옥도라는 것을.

“법대로 살 수 없어 사는 법을 배웠죠.” 이동준이 이 지옥도에 들어와 최일환 대표에게 던지는 이 말은 그래서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그가 이 말을 하는 그 곳은 바로 법을 다룬다는 로펌이다. 하지만 이 로펌은 결코 법대로 일을 처리하는 법이 없다. 대신 법을 이용한다. 그래서 법은 더 이상 피해자나 약자를 구원해주는 사회적 장치가 되지 않는다. 대신 자본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검찰 조사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에서 우리가 목도했던 ‘법꾸라지들’의 면면들이 씁쓸한 건, 대통령 탄핵 결정이 난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힘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귓속말>이 심지어 전화 한 통화로 전하는 작은 귓속말로도 무고한 시민을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들이 정작 자신들은 살인을 저질러도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그 시스템의 끔찍함을 굳이 이런 지옥도를 통해 그려내려 한 건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 아닐까. 법 정의도 인간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도 사라져 버린 그 세상의 지옥도를 보다보면 밀고 당기는 그 쫄깃한 긴장감이 주는 통쾌함과 함께 저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쩌다 소신 따위가 권력과 자본 앞에 쉽게 내팽개쳐지는 세상이 된 것일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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