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이 내게로 온 날 25] 갠지스에 남긴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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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지도자 이형록 원장이『꽃중년 인도를 날다』라는 책을 보내주셨다. 인도 사정에 밝은 이박사를 중심으로, 경남 통영의 고등학교 동기들이 인연이 되어 6명이 떠난 인도 배낭 여행기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6인 6색의 인도 이야기를 접하니 다시금 인도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이형록 원장은 인도 바나라스 힌두 대학교 요가철학자로 지리산에서 ‘Open Hand 숲 속 명상원 & 마하샨띠 아슈람’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운 분의 환한 미소가 갠지스 강 위로 떠오른다.

 

너는 장미보다 아름답진 않지만

그보다 더 진한 향기가

너는 별빛보다 환하지 않지만

그보다 더 따사로와

탁자위에 놓인 너의 사진을 보며

슬픈 목소리로 불러 보지만

아무 말도 없는 그댄

나만을 바라보며

변함없는 미소를 주네

(신승훈 노래 / ‘미소 속에 비친 그대’ 가사 중)

 

인도와 네팔에 다녀온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성지순례 다큐멘터리 취재를 위해 100여 명 속의 일원이 되어 참가했었다. 순례단은 연로하신 어르신이 상당수였다. 쉰이 넘은 사람이 젊은 편에 속했다.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내가 아니었나 싶다. 가족들은 걱정하고 염려했지만, “부처님 나라에 언제 가보겠느냐.”며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모두가 기쁘게 떠난 순례 길이었다.

버스로 하루 평균 8~9시간을 이동하는 일정이라 피곤할 텐데도 밤마다 법사님의 금강경 독해를 듣고 새벽에 좌선을 했다. 평상시에 공부하는 것처럼 여행길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일관했다. 나는 취재차 동행한 것이어서인지 어르신들의 신실한 수행자세가 더욱 경이로웠다.

 

외로움으로 나 여기 섰네

허전한 마음 나 여기에 섰네

부풀어 오르는 이 가슴의 물결과

그대 사랑은 아직도 내 것이네

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님이시여 님이시여 님이시여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한 마디만 당신곁에 남겨두고

나도 이제는 연화당 저 바다에 돌아가겠네(김연숙 노래 /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님이시여’ 가사 중)

 

며칠간의 여행이 이어지던 어느 날, 갠지스를 보기 위해 바라나시로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앉아서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망중한忙中閑의 순간이었다. 나는 직업의식을 발동해서 녹음기를 켜고 몇 사람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모두가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동생과 함께 왔다는 어르신은 “내 나이 낼 모레 팔순인데, 언제 또 부처님의 나라에 와 보겠느냐.”며 “밤마다 부처님 말씀 듣고, 낮에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다니며 하루하루 정말 행복하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취재하는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기차는 밤새 쉬지 않고 달려 새벽녘에야 바라나시에 우리 일행을 내려주었다. 갠지스 일출을 보고 기도식을 갖기로 했다. 예약된 짐꾼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각자 자기 짐을 따라서 버스로 오라는 인솔자의 안내가 있었다. 부지런히 짐꾼을 따라가는데 누군가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술렁댔다. 하지만 수습이 잘 되었는지 일행은 예정대로 갠지스에 도착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여행자와 순례자들이 가장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가는 곳, 갠지스에 해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이 갠지스에 정성스럽게 몸을 씻고 있었고 근처 화장터에서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인도인들은 어머니의 강 갠지스에서 목욕을 하면 자신이 지은 죄가 씻겨 지고, 죽은 뒤에 화장을 해서 갠지스 강에 뿌려지면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힌두교인 들은 갠지스에서 죽기 위해 평생 돈을 모아 갠지스로 온다고 한다. 그들은 갠지스에서의 죽음의례를 가장 성스럽게 여기고 있다. 부자는 충분히 많은 땔감으로 태워지고, 가난한 사람은 모아둔 돈 만큼의 땔감으로 화장을 해서 강물에 띄워지면서 내생을 준비하는 곳이다.

끝내 우리 일행 중에서 변고가 생겼다. 바라나시 기차를 기다리면서 인터뷰를 했던 어르신 한 분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이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소생이 어렵다고 했다. 마침 그의 동생이 동행을 했기에 가족의 위임을 받을 수 있어서 모든 장례 절차를 원만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수습할 몇 사람이 남고 일행은 계속 일정을 이어 가기로 했다.

인도에서 돌아온 후에 열반하신 어르신의 49재 소식을 들었다. 지인을 통해 내가 어르신을 인터뷰 한 것을 보았는데, 혹시 육성이 남아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연락이 왔다. 마침 녹음테이프를 버리지 않은 상태라, 수십 개의 테이프를 되돌려 들어보니 고인의 육성이 남아 있었다. 방송되지 않은 부분까지 편집을 다시 했다.

 

“내가 낼 모레 팔순인데, 나이가 많으니까 우리 애들이 말렸거든. 그래도 지금 아니면 언제 부처님 나라에 가보겠냐, 내가 우겨서 왔다니까. 동생도 같이 와서 더 좋고, 밤마다 금강경 들으면서 부처님 말씀 듣고, 낮에는 부처님 발자취 따라 다니고.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해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니까…….”

 

생동감이 있는 고인의 목소리에서는 진심으로 행복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특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부분에는 단호함마저 있었다. 가족들은 어머님이 타국에서 갑작스럽게 운명하셔서 모든 것을 예비하지 못한 이별 앞에 슬픔이 컸고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내가 전해준 녹음 CD를 통해 어머니의 육성을 들으면서 위안이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어머님의 여행이 참으로 행복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부분에서는 많이 울었다고 전해왔다. 슬픔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어머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곁에 없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

우리 사랑 있잖아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린 함께 숨을 셔 저 하늘이 나를 사랑해

어느 날 먼저 데려 간대도 아름다운 세상

고운 너의 두 눈으로 내 몫까지 보아줘

저 하늘이 너를 사랑해

어느 날 너를 데려간다고

가슴속에 너의 사랑을 품고서 우리 사랑 키울게

저 하늘이 나를 사랑해

어느 날 먼저 데려간대도

아름다운 세상 고운 너의 두 눈으로 내 몫까지 보아줘

(김경호 노래 / ‘나의 사랑 천상에서도’ 가사)

 

고인은 갑작스럽게 이국에서 가족의 곁을 떠났지만 크게 복을 받은 분이라고들 했다. 평소 신앙생활을 잘하시고 생사공부를 잘해서, 부처님 나라에서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고 왕족들이 사용하는 제일 좋은 화장터에서 충분히 잘 모시게 되어, 죽음의 길을 떠나는 분으로서 가장 완벽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고. 어머니를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어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유족으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그 죽음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평소 덕을 많이 쌓으면 죽음 길도 저렇게 아름답게 닦을 수 있구나. 마이크 앞에서 함박웃음을 짓던 어르신의 덕스런 표정과 넉넉한 미소를 잊지 않으려고 한다. 인터뷰를 거절하지 않고 육성을 남겨주신 덕분에 남은 가족들에게 큰 위안을 주셨다. 나 역시 고인의 가족들에게 작으나마 중요한 선물을 전해드릴 수 있어서 보람이 컸다. 법연 따라 극락왕생하셨으리라 믿는다. 참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언제 한 번 다시 갠지스에 가서 어르신의 함박웃음 뵙고 안부 여쭈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품 같은 갠지스가 그립다.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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