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㉗] 낭만 교향곡의 극치, 브루크너와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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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9세기는 하나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음악이 꽃핀 ‘백화제방’의 시대였다. 새로운 장르가 우후죽순처럼 선보였고, 조성과 화음을 극한까지 실험한 음악들이 나타났다. 음악은 문학과 섞이면서 더욱 다채로운 내용을 갖게 됐다. 바그너는 1851년 <오페라와 드라마>란 글에서 “베토벤 9번으로 교향곡이란 장르는 수명을 다했다”고 선언했지만, 새로운 교향곡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베토벤의 손에서 ‘클래식의 황제’ 지위에 오른 교향곡을 다시 한 번 도약시킨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안톤 브루크너(1824~1896)와 구스타프 말러(1860~1911)였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빈 음악원 시절의 스승 브루크너를 “천성적인 진실함과 어린이처럼 순진무구한 행복감의 소유자”로 회고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잘 알려진 9곡 이외에 습작 한 곡과 <교향곡 0번>이 있다. 그는 <교향곡 0번> D단조의 표지에 “그냥 시도해 봤을 뿐 아무 가치가 없음”이라고 써 넣었다. 그의 소심한 성격은 첫 교향곡 C단조를 44살 되던 1868년에야 발표한 데서도 드러난다. 교향곡 3번 D단조를 초연할 때의 일화가 있다. 지휘대에 선 브루크너가 첫 박자를 주지 않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자 악장이 “시작하시라”고 눈짓을 보냈는데, 브루크너의 대답은 이랬다. “먼저 시작하시죠.” 그는 평론가들의 비판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늘 수정을 거듭했기 때문에 교향곡마다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브루크너는 엄청난 종교적 열정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교향곡은 중세 성당의 거대한 구조를 닮았고, 금관 파트는 성당 오르간의 육중한 음향을 내뿜는다. 11살 때부터 안스펠덴 성당의 오르간을 연주했고, 평생 플로리안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기 때문에 그의 몸에는 오르간이 배어 있었다. 그의 교향곡은 현악의 잔잔한 트레몰로로 시작하는 ‘브루크너 개시’, ‘딴~딴~딴·딴·딴(셋잇단음표)’의 독특한 ‘브루크너 리듬’, 중간에 모든 연주자가 침묵하는 ‘브루크너 휴지’가 특징이며, 포르티시모에서 환희와 법열에 도달한다. 피날레에서는 앞에 나온 주요 모티브들을 종합하여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그는 바그너를 숭배하여 3번 교향곡을 그에게 바쳤고, 7번 교향곡 작곡 도중 바그너의 사망 소식을 듣자 2악장에 4대의 바그너 튜바를 삽입하여 애도를 표했다. 그는 바그너가 지휘하는 <니벨룽의 반지> 리허설을 참관하며 공부했는데, 드라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리허설 중 악보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브륀힐데가 불길에 휩싸여 있는 무대 장면을 보고, “저 여자는 왜 저러고 있죠?”라고 물었다고 한다.

 

브루크너 교향곡 4번 <낭만적> (첼리비다케 지휘, 뮌헨 필하모닉) 바로 보기

(1악장 금관의 클라이맥스 11:15~13:09)

 

4번 Eb장조 <낭만적>은 가장 밝은 작품으로,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이 곡을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과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사랑한다. 운무를 연상케 하는 트레몰로와 알프스 호른 소리가 첫 주제를 제시하고, 중간의 금관 투티에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7번 E장조는 1884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아르투어 니키시의 지휘로 초연되어 브루크너에게 커다란 성공을 안겨준 작품이다. 첼로의 첫 주제는 브루크너가 꿈에서 듣고 깨어나자마자 적었다고 하며,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는 불타는 종교적 정열이 가득하다.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는 브루크너의 8번 C단조를 “모든 교향곡의 최고봉”이라고 했다. 연주 시간 100분의 엄청난 스케일에, 피날레는 앞의 모티브들을 종합하여 최고의 환희에 도달한다.

 

브루크너 교향곡 7번 E장조 (첼리비다케 지휘, 뮌헨 필하모닉) 바로 보기

(1악장 크레센도 한 대목 19:50~20:15)

 

브루크너 교향곡은 거대한 숲과 같아서 쉽사리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음악 칼럼니스트 최은규는 “느린 악장부터 들으실 것”을 권한 바 있다. 6번 A장조의 2악장 ‘아주 느리고 경건하게’는 브루크너 교향곡 중 가장 아름다운 대목일 것이다. 7번 E장조의 2악장 ‘아주 경건하고 느리게’는 가슴을 울리는 슬픔과 열정이 선율마다 묻어나며, 현악 파트의 육중한 화음은 합창을 연상시킨다. 8번 C단조의 3악장 ‘아다지오’는 종교적 명상과 관능적 유혹의 경계를 넘나든다.

브루크너가 “사랑하는 신에게 바친” 교향곡 9번 D단조는 어두운 심연과 드높은 빛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3악장 ‘느리고 경건하게’를 “세상에 대한 작별”이라고 불렀고, 피날레를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교향곡을 쓰고 있던 브루크너를 드보르작이 방문했다. 칠순이 넘은 브루크너는 깊은 상념에 잠겨서 먼 곳을 바라볼 뿐,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구스타프 말러, “나의 시대는 올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1902년 1월 31일, 약혼자 알마 신틀러에게 “나의 시대는 올 것”이라고 썼다. 그리 멋진 예언은 아니었다. 경쟁자로 여겨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가 더 인기를 끌고 있지만, 언젠가 자기 교향곡이 인정받을 날이 올 거라는 말이었다. “왕겨가 벗겨지면 밀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말러의 시대는 왔다. 제자 브루노 발터가 그의 전도사를 자임했고, 레너드 번스타인과 게오르크 숄티가 1960년대에 그의 교향곡 전곡을 녹음했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 음악계에 ‘말러 열풍’이 번졌고, 그의 교향곡은 어느새 베토벤과 함께 가장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가 됐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작곡한다. 말로 할 수 있다면 왜 구태여 작곡을 하겠는가?” 말러는 교향곡 1번 <거인>과 2번 <부활>을 설명하는 프로그램 노트를 직접 썼지만, 곧 폐기해 버렸다. 그는 1907년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를 만난 적이 있다. 시벨리우스는 말했다. “모티브들을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교향곡의 엄격한 형식과 심오한 논리를 숭배합니다.” 말러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합니다.”

그는 교향곡에 자기의 모든 경험을 녹여 넣었다. “나는 삼중의 이방인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인이고,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며, 세계인 속에서는 유태인이다.” 어릴 때 ‘제2의 슈베르트’란 별명으로 불린 그는 슈베르트의 ‘방랑자’보다 더 치명적인 ‘디아스포라’를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열네 형제 중 둘째였던 그는 어린 동생들의 잇따른 죽음에 상처받았고, 이 경험을 자기 음악에 담았다. 교향곡 2번 <부활>은 ‘죽음의 축제’로, 5번 C#단조는 ‘장송행진곡’으로 시작한다. 그의 음악이 늘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1910년 말러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게 “깊은 비극과 가벼운 즐거움이 서로 뗄 수 없이 각인되어, 한쪽 정서가 반드시 반대쪽 정서를 동반하게 됐다”고 자기 심리 상태를 설명했다. 새 · 바람 · 시냇물 등 그가 사랑한 자연의 이미지, 4살 때 들은 군악대의 드럼과 트럼펫 소리, 유태인 사회의 노래와 여흥 등 어릴 적 체험도 그의 교향곡을 매혹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말러는 20살에 작곡한 <탄식의 노래>를 ‘나의 슬픔이 맺은 열매’라 불렀고, “이 작품으로 나는 스스로 말러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1부 ‘숲의 전설’, 2부 ‘악사’, 3부 ‘결혼 음악’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훗날 교향곡으로 발전할 요소들로 가득하다. 1889년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된 교향곡 1번 D장조는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 ‘아침 들판을 걸었지’의 선율을 사용했다. 멀리서 울리는 트럼펫이 목관의 새소리와 어우러지는 대목은 말러만의 독특한 음향이다. 4악장 피날레는 고뇌의 몸부림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첫 대목이 압권이다. 젊은 천재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이 곡을 브루노 발터는 ‘말러의 베르테르’라고 불렀다.

 

말러 교향곡 1번 D장조 ‘거인’ 피날레 (두다멜 지휘, LA필하모닉) 바로 보기

 

 

2번부터 4번까지 세 교향곡은 성악이 등장하며, 독일 민요를 가사로 한 <소년의 요술 뿔피리> 주제를 활용했기 때문에 ‘뿔피리 3부작’이라 불리기도 한다. 2번 C단조 <부활>은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변증법이다. 1악장은 장대한 ‘죽음의 축제’로, 젊은 날의 자신을 응시하며 “그대는 왜 살아 왔는가” 질문을 던진다. 5악장은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는 전반부와 부활을 노래하는 후반부로 이뤄져 있다. 땅이 벌벌 떨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일어서서 행진한다. 계시의 트럼펫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저승의 꾀꼬리 소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알린다. 이 대목에서 말러는 그때까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입체 음향을 창조했다. 합창 부분은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장례식에서 들은 시인 클롭슈토크의 ‘부활 찬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3번 D단조의 첫 악장은 ‘목신이 깨어나고 여름이 행진해 온다’는 표제로, 웅장한 호른의 시그널로 시작하여 목관과 바이올린 솔로가 여름의 황홀경을 들려주지만 불안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이어지는 다섯 악장은 각각 꽃, 동물, 밤, 천사, 사랑을 주제로 자연의 경이와 실존의 의지 등 자신의 모든 체험을 담았다. 대규모 관현악과 소년합창, 여성합창, 알토 솔로를 동원한 연주 시간 100분의 이 엄청난 교향곡을 말러는 ‘하나의 우주’라고 불렀다. 4번 G장조는 ‘어린이가 본 천국’으로, 말러의 교향곡 중 가장 밝고 아름답다. 첫 부분의 방울 소리와 플루트 소리는 장난감 악기처럼 들리며, 주제는 단순하고 투명하다. 4악장 피날레에서는 소프라노가 등장, 어린이가 상상하는 천상의 행복을 노래한다.

말러는 1902년 3월, 19살 연하인 알마 신틀러(1879~1964)와 결혼했다. 알마는 빈에서 단연 돋보이는 미인으로,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화가 클림트와 작곡가 쳄린스키 등 빈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였다. 말러는 아름다운 ‘아다지에토’를 그녀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지만, 실제 결혼 생활은 ‘아다지에토’처럼 황홀하고 평화롭지 못했다. 약혼 직전, 말러는 그녀에게 작곡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였다. 알마는 고민 끝에 이 요구를 받아들였고, 결혼 후에는 말러의 아내 겸 조수 노릇을 했다.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중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바로 보기

 

 

결혼 직후 말러는 뤼케르트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에 음악을 붙였는데, 알마는 이를 매우 불길하게 여겼다. 이 노래가 예언이라도 한 듯, 1907년 큰딸 마리아가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그해 말러는 심장병이 생겼고,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치닫게 된다. 결혼 이후 음악가의 정체성을 잃고 시들어 가던 알마는 젊은 조각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사랑에 빠졌다.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말러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1910년, 말러는 네덜란드의 한 호텔에서 프로이트를 만나 4시간 동안 심리 상담을 했다. 말러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결혼 생활을 프로이트에게 털어놓았고, 프로이트는 말러에게 ‘마리아 콤플렉스’가 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말러의 무의식은 젊은 아내에게서 성모 마리아를 기대했는데 그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구라는 것이었다. 말러는 자기가 젊은 알마의 재능을 질식시켰기 때문에 그녀가 시들어가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알마에게 작품을 쓰라고 권했고 출판을 주선해 주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미완성으로 남은 교향곡 10번의 아다지오에서 그는 알마(Alma)의 이니셜인 ‘A’음을 트럼펫이 40초 가까이 연주하도록 한 뒤, 악보에 써 넣었다. “오, 안녕, 나의 리라여!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으리, 알마여!”

말러는 교향곡 5번부터 7번까지 성악을 배제하여 오케스트라만의 엄격한 음악 세계를 추구했다. 결혼 직후 완성한 5번 C#단조는 젊은 알마가 함께 짊어질 수 없었던 말러의 거대한 내면이다. 1악장은 침착한 걸음걸이의 ‘장송행진곡’으로,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을 뒤틀어 놓은 듯한 주제를 트럼펫이 연주한다. 2악장은 폭풍처럼 격렬한 고뇌가 사납게 물결친다. 추락과 돌파를 거듭하던 삶의 몸부림은 결국 금관의 우렁찬 코랄로 폭발한다. 4악장 ‘아다지에토’는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나와서 유명해진 부분으로, 관악기들은 쉬고 현악과 하프만 연주한다. 잠시 꿈과 평화가 깃들지만, 쉽게 깨질 듯 안타까운 아름다움이다. 휴식 없이 이어지는 5악장 피날레에서 말러의 회의와 공포는 모두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당하게 승리를 구가하는 피날레가 끝나도 1, 2악장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있다.

6번 A단조는 말러 스스로 <비극적>이라고 불렀다. 영웅의 비극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알마에 대한 사랑 고백이었다. 피날레에서는 운명의 해머가 등장하는데, 말러는 “영웅은 적으로부터 세 번 공격을 받고, 마지막 가격으로 나무처럼 쓰러진다”고 설명했다. ‘세 번의 가격’을 딸 마리아의 죽음, 심장판막증 발생, 빈 오페라 감독 퇴임을 가리키는 걸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곡이 초연된 1906년까지 이 개인적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7번 E단조 <밤의 노래>는 2악장과 4악장이 세레나데 풍의 ‘밤의 노래’지만, 1악장 또한 달빛 흐르는 밤의 정취에 싸여 있다. 4번 G장조에서 하얀 햇살로 빛나던 말러의 정신은 이 곡에서 검푸른 어둠의 베일 아래 매혹적으로 속삭인다.

8번 <천인> 교향곡은 대규모 오케스트라, 파이프 오르간, 2개의 혼성합창, 어린이합창, 9명의 독창 등 천 명에 가까운 인원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이 곡에서 말러는 모든 사운드를 조화시키는 교향곡의 궁극 이념에 도전했다. 그는 지휘자 멩엘베르크에게 “지금까지의 내 교향곡은 모두 이 곡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며, “이 곡은 대우주가 울리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태양이 운행하는 소리”라고 덧붙였다. 말러는 이 곡도 알마에게 바쳤다. “오소서, 창조의 성령이여”라는 첫 대목으로 자신의 창조력을 집중시키고 <파우스트>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는 선언으로 마무리한다.

1907년 말러는 심장병 진단을 받았고, 큰 딸 마리아를 잃었고, 빈 오페라 감독에서 물러났다. 사랑하는 아내 알마와도 거리가 생겼다. 세상의 모든 것과 작별해야 하는 기막힌 실존의 허무가 그의 앞에 입을 떡 벌렸다. 그는 제자 브루노 발터에게 썼다. “지금까지 편안하고 명료한 마음으로 이뤄온 것들을 나는 단 한 번의 충격으로 모두 잃어버렸네. 나는 허무와 얼굴을 마주보고 서 있네.”

이 무렵, 한스 베트게가 독일말로 번역한 한시집 <중국의 피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생의 덧없음을 잘 알면서 술과 시를 벗삼아 넉넉하게 살다 간 동양의 지혜에서 말러는 위안을 발견했다. 이 책에 실린 이태백, 왕유, 맹호연의 시를 텍스트로 작곡한 게 <대지의 노래>다. 테너와 알토가 번갈아 부르는 6곡의 노래로 이뤄져 있는데, 첫 악장 ‘대지의 애수를 노래하는 권주가’는 아지랑이 속에 피어나는 봄꽃을 보며 눈물 흘리는 시인의 마음이다. 이어서 ‘가을에 쓸쓸한 사람’, ‘젊음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봄에 취하는 사람’ 등 덧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뒤 마지막 악장 ‘이별’로 말러는 세상에 작별을 고하려 했다. 그는 끝 부분의 노랫말을 직접 써 넣었다. “사랑하는 대지에 봄이 오면 어디서나 꽃이 피고 푸른 싹이 돋아나네. 영원히, 저 멀리 푸르게 빛나는 지평선, 영원히, 영원히….”

말러는 이 곡이 자신의 아홉 번째 교향곡이라고 생각했지만, 베토벤과 브루크너가 9번까지 교향곡을 쓰고 세상을 떠난 징크스를 두려워하여 번호를 매기지 않았다. <대지의 노래>를 쓰고 난 뒤 말러에게 지상의 삶이 조금 더 허용됐다. 그는 1908년부터 두 차례 미국을 오가며 뉴욕 필하모닉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지휘했고, 알마는 이 여행에 동행하여 배우자의 의무를 다했다. 말러는 새 교향곡 D장조를 쓰고 ‘9번’이란 번호를 붙였다. 이 곡은 그가 완성한 마지막 교향곡이 됐으니, 그토록 두려워한 ‘9번 징크스’를 결국 피해가지 못한 셈이다.

이 교향곡의 1악장은 앞서 작곡한 <대지의 노래>의 끝 부분, “영원히, 영원히…”라고 노래하는 대목의 모티브로 시작한다. 사랑하는 대지와의 이별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 4악장은 이례적인 ‘아다지오’로 돼 있으며, 주제의 하강하는 진행은 베토벤 <고별> 소나타의 첫 부분을 닮았다. 말러는 15살 때인 1875년 봄, 이글라우에서 베토벤의 이 곡을 연주한 적이 있는데, 이 연주를 들은 지인들이 그를 빈 음악원에 유학 보내라고 조언하여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세상과 작별하는 마지막 교향곡에서 베토벤의 <고별> 소나타에 오마쥬를 바친 게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말러의 교향곡은 연주 시간이 길고 강약의 폭이 크다. 그의 교향곡은 포르티시모에서 베토벤 교향곡의 세 배에 달하는 음량을 발산하지만, 솔로 악기가 실내악처럼 섬세한 앙상블을 이루기도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말러는 ‘과대망상증 환자’로 의심받기도 하지만, 바그너가 ‘종합예술작품’을 위해 무려 16시간 걸리는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작곡한 것처럼, 말러도 교향곡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추구하여 이렇게 거대한 작품을 낳은 것이다.

말러는 초인적인 카리스마의 지휘자로, 일에 대한 헌신과 집중력이 엄청났다. 그는 1897년부터 1907년까지 빈 국립오페라를 이끌며 글루크, 모차르트, 베토벤, 베버, 바그너, 베르디, 푸치니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그가 재임한 10년은 빈 국립오페라가 창의와 활력이 넘쳤던 전설적인 시기였다. 지휘에 몰두하느라 작곡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던 그는 여름휴가를 이용해서 교향곡을 써야 했다.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 D장조를 초연한 사람은 제자 브루노 발터였다. 그는 1894년 함부르크 오페라에서 말러를 처음 만났는데 “천재인 동시에 악마 같은 모습”이었고 “폭풍이 몰아치는 자신의 내면적 삶에 지나칠 정도로 열중해 있었다”고 첫 인상을 회고했다. 발터는 말러의 교향곡을 “가슴 에이는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이라고 불렀다. 그의 교향곡은 진실한 내면의 고백으로, 개인의 고뇌를 중심에 놓고 모든 경험을 용해시켜서 보편성을 획득했다. 낭만 음악의 한계를 넘나드는 그의 교향곡은 ‘궁극의 교향곡’이라 불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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