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㉘] 세계대전 전야, 동굴 속의 카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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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㉘] 세계대전 전야, 동굴 속의 카나리아
‘죽음의 시대’, 음악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
  •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 승인 2017.05.02 0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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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봄의 제전>, 샹젤리제의 소동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 스트라빈스키 작곡, 니진스키 안무의 <봄의 제전>이 무대에 올랐다. 파곳이 상식 밖의 고음으로 연주를 시작하자 청중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긴 머리의 안짱다리 소녀들이 껑충껑충 뛰기 시작하자 소동이 일어났다. 객석에서 고함이 이어졌다. “닥쳐”, “시끄러, 이 16열 창녀들아!” ‘16열’은 파리에서 가장 고상한 부인들이 앉는 자리였다. 우아한 전통발레와 거리가 먼 니진스키의 안무도 낯설었지만 원시적인 음향과 강렬한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도 충격이었다. 소동 때문에 음악이 잘 들리지 않자 스트라빈스키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떴다. ‘러시아 발레(Ballet Russe)’ 단장 디아길레프는 뒷풀이에서 “바로 내가 원하던 그대로 됐다”고 외쳤다.

BBC 다큐멘터리 <Riot ant the Rite> 중 <봄의 제전> 초연 장면 바로 보기

 

쇤베르크의 ‘스캔들 음악회’

약 2달 전인 1913년 3월 31일, 빈에서는 ‘스캔들 음악회(Skandalkonzert)'라 불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쇤베르크의 제자 안톤 베버른, 알반 베르크의 무조음악을 선보이자 청중들은 야유와 고함을 퍼부었고 주먹다짐이 일어나 경찰이 출동했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연주될 때마다 ‘엉터리 음악’, ‘꼴사나운 민주주의자의 소음’이란 혹평을 받았다. 단 한번 예외가 있었다. 10년 전에 작곡해 둔 <구레의 노래>가 1913년 2월 초연됐는데, 말러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만 열렬히 환영받은 것이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가 쏟아지자 쇤베르크는 오케스트라를 향해 인사했을 뿐, 청중들 쪽은 경멸한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고 퇴장해 버렸다. 괘씸하게 여긴 청중들은 이 날 ‘스캔들 음악회’에서 그를 혼내 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 두 차례의 소동이 1차 세계대전 전야인 1913년에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전투기 · 장갑차 · 잠수함 등 새로운 전쟁수단을 동원한 1차 세계대전에서 약 900만 명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다. 가장 끔찍한 살상무기인 독가스가 사용됐고, “조국은 그대를 부른다”, “영국의 여성들은 말합니다. 가세요!” 등 젊은이를 동원하는 국가의 선동이 판을 쳤다. 유럽은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풍요를 누렸지만, 바닥에는 허무와 상실감이 흐르고 있었다. 전통 음악의 규칙을 벗어난 쇤베르크의 무조음악과 스트라빈스키의 리듬 파괴는 유럽 문명의 황혼을 한발 앞서 표현하고 있었다. 민감한 예술가들은 어두운 시대를 예언한 ‘동굴 속의 카나리아’였다.

스트라빈스키(1882~1971)가 언제나 반항아였던 건 아니다. 전쟁 후 그는 페르골레지의 음악을 되살린 <풀치넬라>로 ‘신고전주의’ 경향을 띄었고, 1939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재즈, 팝 음악 등 새로운 언어를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키며 끊임없이 실험을 추구했다. 그는 “예술가들은 이미 말해진 것을 자기 방식으로 다시 말할 수 있을 뿐”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희경 <메트로폴리스의 소리들> p.55)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쇤베르크(1874~1951)는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그는 1908년 현악사중주곡 2번에서 본격적인 무조음악을 시도했다. 이 곡의 4악장에서 소프라노가 “나는 다른 혹성의 대기를 느낀다”고 노래할 때, 이미 전통 조성은 사라져 있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와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에 열광하던 빈 청중들에게 쇤베르크는 ‘혐오의 표적(Bête Noir)’이었다. 그를 옹호한 사람은 구스타프 말러뿐이었다. 그는 젊은 반항아 쇤베르크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1907년 현악사중주곡 1번이 초연될 때는 야유하는 청중을 때리려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말러마저 “쇤베르크가 말하는 ‘미래의 음악’이 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작곡가들에게 과거로 물러난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쇤베르크는 혁명적이고 과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적 소명에 충실했기 때문에 조성질서를 무너뜨리는 쪽으로 갔다. 그는 바그너, 말러에서 이미 한계에 도달한 조성 체계를 무너뜨리면 새로운 음악의 장이 펼쳐질 걸로 기대했고, “앞으로 100년 동안 독일 음악의 절대적 우월성을 보여줄 방법을 찾아냈다”고 자부했다. 이 시도가 성공이었는지 단언하기는 쉽지 않지만, 서양 음악이 필연적으로 도달한 종착점인 것은 분명하다.

낭만 어법으로 쓴 현악 6중주곡 <정화된 밤>과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상드>는 요즘도 자주 연주된다. 21편의 시를 연설처럼 노래하는 <달에 홀린 피에로>(1912)는 어두운 시대를 헤쳐 가는 천재의 영혼을 어리석은 광대에 빗대서 표현했다. 유일한 오페라 <모세와 아론>은 시대와 불화한 작곡가의 자의식을 담고 있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모세가 쇤베르크 자신이라면,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며 모세를 외면한 백성들은 빈의 청중들이었다.

그의 자화상 <붉은 절규>는 폭력과 광기의 시대를 창조적으로 살고자 한 예술가의 고뇌를 보여준다. 그는 12음 기법을 유일한 규범으로 고집할 생각은 없었고, 자신의 실험이 조성음악의 발전을 저해한 게 아닐까 자문하기도 했다. 그는 “언젠가 평범한 사람들이 내 음악을 흥얼거릴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날은 오지 않았다. 쇤베르크가 무조음악을 선보인지 1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100년 전 음악을 여전히 ‘현대음악’이라 부르는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다.

프랑스 음악의 새로운 전개

이 무렵 프랑스에서도 새로운 음악이 태동했다. 클로드 드뷔시(1862~1918)는 바그너 음악에 반발하여 프랑스 음악을 모색했다. 미술의 인상주의 화폭을 음악에 옮겨놓은 듯하여 ‘인상주의’로 불리지만, 정작 드뷔시는 자기 음악을 ‘인상주의’라 부르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기존 화성법을 무시한 그의 작품을 본 파리 음악원 교수가 “자네는 도대체 어떤 규칙을 따르는가?” 묻자 드뷔시는 대답했다. “오로지 저 자신의 즐거움을 따릅니다.” 드뷔시는 “음악은 색채와 리듬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소신을 유지하며 피아노곡 <아라베스크>, 전주곡 <목신의 오후>와 교향시 <바다>,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상드>를 남겼다.

모리스 라벨 <볼레로> (모리스 베자르 안무) 바로 보기

 

모리스 라벨(1875~1937)은 빈 왈츠와 미국 재즈까지 다양한 이국풍의 소재를 활용하여 시적이고 회화적인 작품을 썼다. 그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르그스키 원작인 피아노곡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다. 1928년 초연된 <볼레로>는 남자 무용수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추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광란의 춤판으로 변해가는 광경을 그렸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춤 리듬 위에 18마디 길이의 선율이 자꾸 나오자 객석의 한 여성이 외쳤다. “작곡가가 미쳤나봐!” 라벨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곡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군.” 라벨은 1차 세계대전 때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형)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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