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㉙] 히틀러와 스탈린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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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Joyeux Noël, 2005)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크리스마스 이브, 영국 · 프랑스 · 독일 병사들이 너나없이 전투를 멈추고 음악을 나누는 풍경을 묘사한다. 이런 자발적인 정전(停戰)은 실제로 여러 전선에서 일어났다. 이 영화는 전쟁의 야만 속에서도 평화를 갈구하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웅변한다. 하지만 격동은 계속됐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중 ‘자발적인 평화’ 장면 바로 보기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볼셰비키가 구체제를 타도하고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 볼셰비키는 3년간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혁명을 지켰다. 그러나 1924년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권력을 잡자 소련은 거대한 관료체제가 지배하는 병영국가로 변질됐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인민의 적’으로 몰려서 숙청됐다. 독일은 전쟁 직후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지만, 패전의 좌절과 혼란을 틈타 히틀러의 나치 집단이 권력을 잡았다. 나치는 1933년 베벨 광장에서 수만 권의 책을 불태운 뒤 진취적인 예술가들을 ‘퇴폐’로 낙인찍어서 박해했다.

 

‘화산 위의 춤’, 바이마르 풍경

10년 남짓 존재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베를린은 문화 예술의 중심이었다. 200여개의 출판사, 120여개의 신문사, 40여개의 극장, 37개의 영화사가 있던 이 곳에 쇤베르크 · 힌데미트 · 아이슬러 등 작곡가, 푸르트뱅글러 · 에리히 클라이버 · 브루노 발터 · 오토 클렘페러 등 지휘자가 모여들었다. 알반 베르크의 실험적인 오페라 <보체크>가 초연된 곳도 베를린이었다. 1차대전의 혼란 속에서 작곡한 이 작품은 생계에 급급한 소시민 보체크가 애인 마리의 부정을 알고 정신착란 상태에서 그녀를 죽인 뒤 자기도 호수에 빠져 죽는다는 내용으로, 베르크의 무조음악은 전후 사회의 불안한 현실과 고통 받는 영혼의 절규를 표현하는 데 제격이었다(이희경 <메트로폴리스의 소리들> pp.92~95). 알반 베르크는 나치의 야만적인 탄압이 본격화되던 1935년, ‘천사의 기억을 위하여’란 부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파울 힌데미트(1895~1963)는 청중으로부터 멀어지며 고립되고 있는 현대음악의 위기를 타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재즈와 폭스트롯을 도입, ‘저속한’ 음악과 ‘고상한’ 음악 사이의 벽을 허물고자 했다. <유희음악> 등 베를린 시절의 ‘실용음악’들은 작곡자, 연주자, 청중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게 목적이었다. 그는 전공인 비올라를 비롯, 여러 악기를 위한 실내악곡과 <베버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1943) 등 관현악 작품을 썼다. 1934년 푸르트뱅글러의 위촉으로 작곡한 교향곡 <화가 마티스>가 큰 성공을 거뒀지만,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조성 없는 소음’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작곡가들이 좀 더 쉽고 단순한 음악으로 대중에게 다가서려 한 것은 시대의 흐름이었다. 쿠르트 바일(1900~1950)과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가 1928년 무대에 올린 <서푼짜리 오페라>는 200여 극장에서 4,000회나 공연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200년 전인 1728년 런던에서 히트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권력이 강도와 다름없다는 비판적 메시지를 유쾌하게 전달하여 큰 공감을 얻었다.

 

1929년 대공황이 세계를 강타한 뒤 베를린의 실업자는 50만 명에 육박했고, 노동운동은 유례없이 활발해졌다. 1930년 9월 히틀러가 전면에 등장하자 예술가들도 투쟁에 나섰다. 한스 아이슬러(1898~1962)는 정치와 거리를 둔 스승 쇤베르크와 결별하고 <코민테른가>, <연대의 노래> 등 음악을 무기로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노래들은 1930년대 전 세계 노동운동 현장에서 울려 퍼졌고, ‘68세대’의 반전 평화 집회에서 되살아나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화려하게 꽃핀 예술은 언제 폭발해 잿더미가 될지 모르는 ‘화산 위의 춤’이었다. 나치는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무조음악이나 당시 유행하던 재즈 음악은 인간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탄압했고, 바흐 · 베토벤 · 바그너의 독일 음악이 아리안족의 순수혈통을 대변한다며 이상화했다. 히틀러는 특히 쿠르트 바일을 지목하여 “독일의 예술음악에 재즈의 흑인 리듬을 섞어서 바흐 · 베토벤 · 바그너의 혈통을 오염시켰다”고 맹비난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쿠르트 바일은 물론 쇤베르크, 힌데미트, 아이슬러 등 뛰어난 음악가들은 모두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그 결과 미국이 세계 음악의 주요 무대로 급속히 떠오르게 됐다.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프로코피에프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도 러시아의 예술가들의 앞길에 영향을 미쳤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는 4살 때 피아노를 시작한 신동으로, 1901년, ‘크레믈린의 종소리’로 시작하는 피아노협주곡 2번 C단조로 글린카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의 출세작이자 낭만 시대 피아노 협주곡의 최고봉으로 지금도 널리 사랑받는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그는 볼셰비키 혁명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선택했다. 1909년 필라델피아에서 지휘자로 데뷔하고 뉴욕 필하모닉과 피아노협주곡 3번을 초연한 뒤, 주로 연주자로 활약하며 여생을 보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C단조 (피아노 예프게니 키신) 바로 보기

 

 

알렉산더 스크리아빈(1872~1915)은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15년, 4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 전통을 무조 음악의 경지까지 발전시켜 <하얀 미사>, <검은 미사> 등 한 악장으로 된 피아노 소나타를 10곡 남겼다. 그의 <에튀드> D#단조 Op.8-12는 우울한 러시아 정서와 뜨거운 열정을 녹여 낸 작품이다. <법열의 시>, <프로메테우스, 불의 시> 등 그의 관현악곡들은 리스트에서 시작된 교향시의 전통을 풍요롭게 했다. 내면을 향해 끝없는 여행을 떠난 그는 볼셰비키에게 동조하기 어려운 기질이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한 뒤 교향곡 1번 <고전>과 두 곡의 피아노협주곡을 발표한 촉망받는 작곡가였다. 그는 혁명 정부의 문화장관 루나차르스키의 축복을 받으며 러시아를 떠나 미국, 독일, 프랑스에서 활약했다. 1936년 소련 당국의 환영 속에 귀국한 그는 관현악 모음곡 <키제 중위>, 교육음악 <피터와 늑대>,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고, 나치의 침략에 분개하여 오페라 <전쟁과 평화>를 작곡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당국은 그에게 ‘반민주적인 형식주의’라는 낙인을 찍고 영화음악만 작곡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잣대로 간섭하는 소련 당국과 충돌을 빚은 끝에 1953년 3월 5일, 스탈린과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스탈린 vs 쇼스타코비치

소련 체제의 억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몸으로 살아 내고 음악에 담아 낸 사람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였다.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은 그의 교향곡 12번 <1917년>(1961)에 투영돼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압제에 대한 저항이 정당하다는 신념, 그리고 혁명 지도자 레닌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분명히 했다. 그의 음악 경력은 혁명 이후에 시작됐다. 레닌그라드 음악원 시절,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던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낙제였지만 졸업 작품인 교향곡 1번 F장조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교향곡 2번 <10월>, 3번 <5월 1일>로 그는 소련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로 떠올랐다.

 

1930년대 소련, 스탈린 1인 숭배 체제 하에서 3천만 명이 숙청당한 공포의 시대였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뿐 아니라 스톡홀름 · 코펜하겐 · 취리히 · 런던에서 크게 성공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36년 1월, 스탈린이 이 화제의 오페라를 관람했다. 이 독재자는 뭔가 불편한 듯, 1막이 끝나자 자리를 떴는데, 다음날 <프라우다>는 이 작품이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라고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고 실제로 체포 일보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자기를 추적하던 비밀경찰 요원이 하루 먼저 숙청당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비극적 사색으로 가득한 교향곡 4번 C단조의 연주를 포기한 채 악보를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D단조 중 피날레 (번스타인 지휘 뉴욕필하모닉) 바로 보기

 

 

1937년 11월에 발표한 교향곡 5번은 스탈린의 억압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이었다. 붉은 군대의 행진같은 1악장, 당당한 스케르초인 2악장, 러시아 설원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3악장, 그리고 강력한 팀파니가 등장하는 피날레…. 청중들은 무려 40분 동안 갈채를 보냈고, 비평가들은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는 찬사와 함께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켜 주었다. 스탈린 체제를 찬양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었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써야 환영받을 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체제와 그럭저럭 타협하며 살아간 기회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고, 반골 기질을 익살과 풍자 속에 감추고 사는 궁정 광대 ‘유로지비’로 해석되기도 했다.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가 의기투합한 것처럼 보인 적도 있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레닌그라드가 포위된 1941년, 쇼스타코비치는 나치에 대항하여 온 인민이 떨쳐 일어설 것을 촉구했고, 이듬해 포연에 휩싸인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을 연주했다. 오케스트라 단원은 절반 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질병과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 투성이였다. 단원들은 흙먼지에 싸인 악기를 닦아서 연주에 임했고, 연주장 밖에서 폭격 소리가 들리는데도 음악을 멈추지 않았다. 평화를 호소한 이 음악회는 연합국 내에 ‘쇼스타코비치 붐’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에 대한 반감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 곡을 <레닌그라드>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이 이미 철저히 파괴했고 히틀러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한 곡이다.”

 

 

이듬해,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8번 C단조를 발표했다. 전쟁과 죽음에 대한 염세적인 사색을 담고 있는 이 곡은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지만, 스탈린은 소련이 승리하고 있는데도 쇼스타코비치가 이렇게 어두운 작품을 쓴 걸 못마땅해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가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적 작품, 베토벤의 9번에 필적하는 걸작을 써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를 비웃기나 하듯 단순하고 유머러스한 C장조 교향곡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격분했고 1948년 ‘즈다노프의 비판’이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독재자를 미화하는 저열한 선전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쇼스타코비치 <제즈모음곡 2번> 중 ‘왈츠’ (앙드레 리외, 마스트리히트 연주) 바로 보기

 

 

<재즈 모음곡 2번>에 나오는 유명한 ‘왈츠’는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6년 작품으로, 흥겨운 3박자의 리듬 속에 지난 세월의 아픔을 떠내려 보내는 느낌이다. 그는 훗날 제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강조했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지휘자 게르기에프는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음악을 요약했다. “스탈린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요, 폭군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억누를수록 쇼스타코비치는 더욱 강해졌다. 스탈린의 압제는 이런 의미에서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음악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뒤늦게 빛난 소련의 예술가들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이 작곡한 발레 <스파르타쿠스>(1954)는 BC 73년, 70여명의 노예들과 함께 카푸아 근교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사랑과 죽음을 그린 걸작으로, 역동적인 남성군무가 일품이다. 이 작품으로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하차투리안마저 스탈린 시대에 ‘형식주의자’로 비난받은 바 있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무용가 누레예프와 바리시니코프 등 탁월한 예술가들이 소련을 탈출하여 서방 세계로 망명했다. 아르보 패르트, 알프레트 슈니트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등 소련 태생의 작곡가들은 은밀히 작곡한 소중한 작품들을 서랍 속에 넣어 둔 채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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