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드라마 PD의 고백] 고 이한빛 PD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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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지상파 드라마 PD

tvN <혼술남녀> 조연출이었던 이한빛 PD가 열악한 드라마 제작 현장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PD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우리 드라마 현장에 만연한 노동 착취가 사회 문제로 대두됐습니다. 이 PD를 추모하며 부조리한 제작 현실을 개탄하는 PD들이 많습니다. 지상파 방송국 소속이자 드라마 PD의 글을 익명으로 전합니다.

 

채 여물지 못한 목숨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서, 콜센터에서, 게임회사에서, 그리고 여기, 방송 현장에서. 사람 목숨이 이렇게 쉽게 죽어나가는 현실이 과연 정상인가? 의문과 분노가 뒤섞여 목젖까지 끓어 넘치는 걸 누르며 매일 현장에 나간다.

 

괴물의 탄생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니까, 의미 있는 일이니까, 또래들을 제치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겨우 들어온 직장이니까, 이런 주문들은 확실히 효력이 있지만 얼마 가지 못한다. 두세 시간도 못 잔 스태프를 현장으로 끌고 나와야할 때, 소품팀 막내에게 윽박지르고 나서, “조감독님, 우리가 얼마 받고 일하는지 알아요?”라는 울음 섞인 대답이 돌아올 때, 연출이 농담이랍시고 스태프에게 성폭력적인 발언을 문제의식 없이 배설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할 때. 다시 마음이 끓어 넘친다. 하지만 침묵하는 것 외에 별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방송은 제 시간에 나가야 하니까, 촌각을 다투는 현장에선 문제제기 할 시간이 없었다. 설사 내가 파업이라도 하게 되면, 그 공백을 메우느라 애먼 스태프가 지금보다 두 세배 더 일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방송은 때맞춰 나갈 테니까. 때를 놓친 고민들이 켜켜이 쌓이기만 했다.

 

사실은 용기가 없었다. 일 못하는 조연출이 될 수는 없었다. 근태나 역량 부족의 명목으로 다른 부서로 방출되는 선후배들을 보면서 더더욱 두려워졌으므로, 나는 드라마 공장의 성실한 부품이 되어 일해야 했다. 잠을 자지 못해서 말라갈수록 선배들은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스태프에게 윽박지르는 빈도가 많아질 수록 일 잘한다는 평가가 돌아왔다.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도 점차 익숙해졌다. 마침내 나에게도 후배들이 생겼을 때, 그들이 자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을 두고 ‘불성실하다’고 지적했으며, ‘너도 다른 부서로 옮겨질지도 몰라’하고 위협했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았지만, 대신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럼 뭐 어때, 방송만 무사히 나가면 되고, 이런 죄책감쯤 이제는 가볍게 넘길 수 있다, 고 생각했었다. 네가 죽기 전 까지는.

 

지옥도

 

지상파는 케이블 채널과 달리 입봉이 보장되는 인사구조와 다른 곳보다 넉넉한 재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지상파 방송사의 처지도 더욱 나빠지고 있다. 이미 대대적인 인력감축이 단행되었고, 미술팀 노동자들은 과로와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조연출들은 그들을 채찍질해 좋은 결과물을 뽑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우리 모두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연출의 입지도 좁아지고 있다. 스타작가나 제작사 대표, CP들이 편집을 하고, 연출에게 재촬영을 명령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나날이 치솟는 배우들의 개런티를 보면 그야말로 ‘현타’의 순간이 온다. 시청률 견인에 큰 역할을 하는 이들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제작비의 40%가 웃도는 그들의 개런티가 적정한 지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많은 돈을 받으면서 스케줄로 연출부와 씨름을 한다. 방송은 당장 나가야 하는데, 광고 촬영이 있다고 하면서.

 

드라마 현장도 케이블 채널의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어느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근 한 달간 평균 3시간 정도의 수면시간. 5시간 이상 잔 날은 딱 하루. 휴게시간 평균 1시간. 오줌 누러 갈 시간도 없다.” 대본이 나오기만을 피가 마르게 기다리다가, 방송 2일 전에 완고가 나오면 스태프는 20~30개의 신을 하루 만에 기계처럼 찍어내야 한다. 며칠을 밤새도록 찍어도 남은 신은 줄지 않고, 연출들은 “내가 지금 뭘 찍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촬영을 제 시간에 끝내더라도, 후반팀에 주어지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우선 방송시간을 맞춰야 하니 과부하가 걸린다. 대본이 늦게 나오는 건 스태프가 각자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말살하는 짓이고, 그것도 하루 만에 대본에 나오는 안 되는 소품을 준비하라는 건 폭력이다. 대체 왜 대본도 다 안 나온 드라마가 편성되는 것인가. 그야말로 검증되지 않은 작품에 도박을 하느라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게 아닌가.

 

빛이 남긴 것

 

공개된 유서를 읽고 또 읽었다. 행간에 숨어있는 너의 경험들을 읽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너는 워낙 똑똑하고 고결했으니까, 어리석고 기회주의적인 나보다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적어도 여기 있었다면 네 선택은 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는 이런 고민을 나눌 동료들이 있었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함에 치를 떠는 선배와 동기들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는 ‘부당한 것에 개기면서 살겠다’고 다짐했고, 내가 정말로 존경하는 선배는 ‘이제 우리도 현장에서 벌어지는 젠더 불평등에 대해 공부를 해야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나의 멋진 선배는 인간애에 대한 드라마를 만들면서 오히려 비인간적인 드라마 현장에 대해 분노했고, 덕분에 그의 스태프는 항상 즐겁게 더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했다. 이런 선배들 덕분에 노동환경은 확실히 전보다 나아지고 있었고, 또 우리가 연출이 되었을 때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만드는 드라마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너의 추모제에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슬그머니 너의 이야기를 꺼내며 드라마 현장 제보 사이트를 알려줬을 때, 이런 게 정말로 필요했다고 말하는 스태프를 보면서 생각했다. 너는 죽었지만, 너의 죽음이 지옥 같은 여기에도 빛을 몰고 오고 있다고. 그리고 그 빛이 드라마 너머의 또 다른 어두운 곳까지 퍼져갈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괴물이 되지 않기로 다짐한다. 용기 없는 내가, 선택의 순간마다 어느 편에 설 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이 괴물이 되지 말자고 붙들어줄 동료들이 있으니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너는 여기 없지만 너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너를 기억하는 우리가 있으니.

 

-여의도에서 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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