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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㉛] 상처입은 용, 윤이상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5.12 09: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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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존 케이지와 음악의 죽음

1952년 8월 29일 뉴욕 우드스탁 연주홀,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터가 무대로 걸어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스톱워치를 들여다 보며 4분 33초 동안 피아노 뚜껑을 세 차례 덮었다 열었을 뿐, 건반에는 손가락을 대지 않았다. 객석의 숨소리, 기침소리, 멀리 들리는 소음…. 우연히 들리는 소리가 모두 음악이라는 메시지였다.

 

존 케이지(1912~1992)는 이게 도대체 음악이냐는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음악의 본질에 대해 논란을 일으키는 게 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존 케이지는 청중들이 <4분 33초>를 체험한 뒤에는 생활 속의 소리들을 더 잘 들을 수 있게 될 거라고 주장했다. 기존 음악을 부정하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음악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따위 음악은 누구나 작곡할 수 있다”는 비난에 그는 “그렇다, 하지만 아직 누구도 이런 음악을 작곡한 적이 없다”고 응수했다. 반항적인 젊은 예술가들은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며 무작위를 추구하는 존 케이지에 열광했다.

존 케이지 <물과 걸음> (1956) 바로 보기

 

 

1956년 백남준이 다름슈타트에서 존 케이지를 만난 것은 그의 예술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 그는 이듬해 뒤셀도르프에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오마주>라는 행위음악을 선보이면서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윤이상은 달랐다. 그는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참가, 26개국에서 온 200여명의 현대음악 작곡가와 이론가들을 보았다. 음악인지 아닌지 모를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를 목격한 윤이상은 부인 이수자 여사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산더미를 준다 해도 이런 음악을 쓰기는 싫소. 아니, 그들보다 더 엉뚱한 짓으로 세인을 놀라게 할 수는 있으나, 나는 어디까지나 음악 속에 순수하게 머물고 싶으며, 신기한 것으로 앞장서는 선수가 되기는 싫소.”

 

윤이상의 ‘주요음’ 기법

현대음악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음악가들은 늘 새로운 기법을 모색했는데, 그 결과 음악은 난해해졌고 대중과 멀어졌다. 윤이상은 존 케이지처럼 음악의 죽음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펼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슈톡하우젠, 루이지 노노,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에 매료됐지만 “교묘한 형태의 현대식 고층건물 같다”며, 그런 작품을 쓰고 싶지는 않다고 밝혔다.

 

그가 추구한 음악은 노자의 철학과 같은 환상의 세계였다. 그는 동양 사상이 들어간 12음 기법을 추구한 결과 ‘주요음’ 기법에 도달했다. 서양 음악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직선으로 이뤄진 도형이지만, 동양음악은 한 획으로 이뤄져 있으며 굵기가 계속 변한다.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발표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은 ‘주요음’ 기법을 사용한 첫 작품으로, 청중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1966년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발표한 <예악>은 목관 연주자 12명, 금관 연주자 10명, 30개 이상의 타악기, 하프 두 대, 그리고 현악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무한의 시간 속에 흐르는 소리의 향연이다. 윤이상의 새로운 시도는 유럽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극도의 추상성, 소리의 계산화, 고도의 지능화로 표류하던 서양 음악은 윤이상의 손에서 새로운 피를 공급받았다.

 

윤이상이 ‘동베를린 간첩 사건’의 희생자가 된 것은 50살 때였다. 위대한 예술혼을 짓밟은 이 폭거는 중년을 넘긴 윤이상의 몸과 마음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동베를린 간첩 사건’

윤이상은 박정희는 1917년생, 동갑이었다. 두 사람은 1964년, 쿠데타로 대통령에 오른 박정희가 서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만났다. 환영행사에서 본(Bonn) 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의 <낙양>(洛陽)을 연주한 직후의 커피타임, 뤼프케 서독 대통령이 좌중에게 윤이상을 소개하자 박대통령은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손만 내밀었다. 윤이상, 박정희, 뤼프케의 순서로 자리가 배치됐는데, 음악에 식견이 있던 뤼프케 대통령은 박정희를 가운데 두고 윤이상을 향해 자꾸 <낙양> 얘기만 했다. 박정희는 윤이상과의 첫 만남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윤이상 <낙양> 바로 보기

 

 

1967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자 박정희 정권은 ‘동베를린 간첩 사건’을 조작하여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 했다. 유럽에 거주하는 예술가, 교수, 의사, 공무원, 외교관 등 무려 194명이 체포됐는데, 여기에는 작곡가 윤이상 뿐 아니라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도 포함됐다.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을 간첩 수괴로 몰기 위해 모진 고문과 구타를 가했고, 고문에 굴복할 수 없었던 윤이상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책상 위의 묵직한 유리 재떨이로 자신의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강타하여 자살하려 했다. 그는 철철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서 벽에 유언을 썼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예술가로 성공하여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고 동포들의 환영 속에서 귀국하겠다는 그의 꿈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의 폭거에 유럽의 음악가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윤이상을 석방하라는 호소문에는 스트라빈스키, 슈톡하우젠, 리게티, 클렘페러, 카라얀 등 181명의 세계적 음악가들이 서명했다. 칠레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항의 표시로 서울 연주회를 취소했다. 서독 정부는 한국 정부가 야만적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문화 교류는 물론, 예정돼 있던 차관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박정희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납치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 것,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언사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윤이상을 독일로 추방했다.

 

‘뚝배기 속 선혈’ 같은 음악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은 1967년 가을부터 1968년 2월까지 5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작곡했다. 그는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음표를 써내려갔다. 차가운 형무소에 앉아 있는 게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생각했다. 간첩, 국가전복, 이런 어마어마한 정치적 조작에 대해서는 “허튼 소리 말라! 모두 한 마리 나비의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다!” 외치고 싶었다. 막이 오르면 나비의 군무가 펼쳐지고 합창이 울려 퍼진다. “백년광음은 한 마리 나비의 꿈과 같고, 오늘 봄이면 내일 꽃이 시든다.” 장자는 수레에 앉아 책을 읽으며 방랑길을 떠나고 아내는 살림도구를 수레에 얹은 채 울고불고 푸념하면서 따라간다. 오페라는 삶과 죽음을 너머 너와 내가 합일하는 무위(無爲)의 경지를 노래한다.

 

윤이상은 이 오페라의 악보를 중앙정보부가 압수해서 찢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보는 당국의 검열 끝에 살아남았고, 부인 이수자 여사가 독일로 가져갔다. 1969년 2월 뉘른베르크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초연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청중들의 갈채 때문에 31차례나 막이 다시 올라갔고, 뉘른베르크는 축제의 밤이 됐다. 윤이상은 아직 서대문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에 <나비의 미망인>, 그 역사적인 초연을 볼 수 없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축전에서 윤이상의 새 오페라 <심청전>이 공연됐다. 동양적인 효(孝)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낳는 기적, 그리고 세상의 눈먼 자들이 모두 눈을 뜨는 해방의 세계…. 이 오페라는 유럽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윤이상은 1973년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지르자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윤이상의 태도는 점점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윤이상의 본령은 여전히 음악이었다. 분단의 벽에 부딪치며 몸부림치는 고통스런 마음을 첼로 협주곡에 담았고, 평화와 인권을 위한 음악회를 잇따라 열었다. 1980년 5월 18일, 베를린의 집에서 TV와 라디오를 켜 놓고 있던 그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학생들이 무참히 곤봉에 맞아 피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군인들이 노인, 부녀자 가릴 것 없이 살상하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의 예술혼과 정의감은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작품으로 쏟아내게 만들었다. “음악은 특권자들을 위한 성찬식탁 위의 금잔에 담긴 향내 나는 미주(美酒)의 역할만을 할 수가 없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야 한다.”

 

윤이상 <광주여 영원히> 바로 보기

 

 

윤이상은 광주 학살을 전세계에 알리고 역사에 남김으로써 모든 독재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광주여 영원히!>는 1981년 5월, 쾰른 WDR 오케스트라가 세계 초연했다. 1부는 궐기와 학살이다. 첫 C음은 용감한 젊은이들의 궐기를 의미한다. 2부는 기나긴 진혼으로, 묘지의 정적과 슬픔의 조사(弔詞)다. 3부는 민주와 정의를 향해 가슴 속에 고동치는 새로운 행진이다.

 

인류에게 더 많은 평화와 아름다움을…

조국의 남쪽은 그를 학대하고 추방했다. 1982년, 제7회 대한민국 음악제에서 윤이상 음악의 밤을 마련했다. 그의 음악이 남쪽에서 15년 만에 부활할 기회였다. 그러나, 윤이상은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 남에서 배척한 윤이상을 북쪽이 불러서 대접했고, 평양의 국립교향악단이 윤이상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했다. 1984년에는 평양에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그의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는 남북을 떠나 우리 민족 전체에게 바치는 절절한 호소와 충정이었다. 이 작품은 통일 조국에서 연주하는 게 이상적이었지만, 부득이 평양에서 초연됐다.

 

1994년, 남쪽의 몇몇 뜻있는 분들이 윤이상 음악제를 추진했다. 77살 노인 윤이상은 조건이 허락되면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여전히 인식 수준이 저열했다. 윤이상의 방한 청원서에 대해 총리는 “지난 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며, 앞으로 예술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힐 것”을 요구했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 윤이상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반성문을 요구하는 꼴이었다.

 

이리하여 윤이상이 고향땅을 밟을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다. 그는 이듬해, 1995년 11월 3일, 머나먼 이국 땅 베를린에서 7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39살까지 조국에서 살았고, 그 후 39년 동안 유럽에서 활동하며 더 많은 평화, 더 많은 아름다움, 더 많은 순수와 온정을 이 세상에 지어 나르는데 온 생애를 바쳤다.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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