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이 내게로 온 날 ㉗] 빠담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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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가슴 뛰는 일’이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가슴이 뛴다고 하면 심장질환이 의심되고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을 받을 때까지 안심이 되지 않는다. 흉통은 심장마비나 대동맥박리 등 치명적인 질환의 증상이 될 수 있다는 기사를 본 후에는 가슴 - 통증 - 병증으로 연결되며 불안함이 가중된다. 나이 먹어서 ‘가슴 뛰는 일’은, 그 옛날 학교에 다닐 때 시험공부를 하지 않은 채 맞이한 시험 같은 것이며, 어떤 일이 마음에 걸려 개운치 않은 상태에서 불안함과 불편함이 한 번씩 큰 파도처럼 밀려와 심장을 강타하는 것이며, 평생을 삭이고 묵혀둔 분노가 느닷없이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것, 그런 종류가 아닐까? 적어도 주위 사람들이 ‘가슴이 뛴다.’고 했을 때 좋은 일로 그러하지는 않았으므로 일단은 경계의 대상이다. 요즘은 그렇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감정의 기복이 없이 평온하고 안정적인 심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가 보다. 어느 선사는 ‘평상심이 곧 도道’라고 했고, ‘평상심 공부 잘한 이가 참 도인’이라고 설파한 분도 있다. 나이 들수록 마음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니 이제는 가슴 뛰는 일 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기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책 제목처럼, 뛰지 않는 가슴이 익숙해졌으니 굳이 가슴 뛰는 일을 찾아 나설 일이 없어졌다. 그동안…….

자 이제 안녕하며 돌아서야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 이제 안녕하며 돌아서야지  하나도 슬프지 않은것 처럼
뛰어가지만 뛴다고 잊어지나
조용히 조용히 걸어가야해
뛰어가지만 뛴다고 잊어지나
우리가 걷던 것처럼 걸어가야해
(윤형주 노래 / <사랑스런 그대> 가사)

전주 국제영화제 기간 중, 나래코리아에서 주최하는 공연에 초대를 받아 전주천 한벽루 근처에 위치한 한벽극장을 찾았다. 전주 국제영화제와 함께 하는 나래코리아 공연은 전주출신의 기업가인 김생기 나래코리아 대표가 전주 국제영화제를 축하하며 준비한 공연이다. 나래코리아의 문화예술기부 콘서트는 사실 오래전부터 명성이 높다. 벤처기업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평소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사랑과 높은 안목을 자랑하는 김생기 대표는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수준 높은 공연을 시민들에게 환원해 왔다. 전주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생기 대표는 10여 년 전부터 전주 국제영화제를 축하하며 축제의 현장에서 음악회를 열어 기쁨을 나누어왔다. 김생기 대표의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지역에 대한 사랑, 공연문화의 기부, 많은 선행에 대해 입소문을 익히 들어온 데다 《한울문학》에서 미술산책 코너를 통해 그림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곁눈질하며 부러워해온 지라, 올해는 만사 제치고 공연에 참석하기로 했다. 공연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한벽극장이 가득 차서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오감 나래를 펴다>라는 주제로 펼쳐진 올해의 공연은 다섯 마당으로 진행됐다. 프로그램도 ‘맛깔나게’ 구성되었는데, 공교롭게 첫 공연의 소 타이틀은 ‘참 맛깔나다’이다. 김민숙 명창이 멋들어진 민요로 흥을 돋우었다. 이어 조미애 시인의 시 낭송이 무대를 채웠다.

하얀 민들레

                     조 미 애

물빛에도 계절이 있었다
봄날 안개처럼 차오르는 그리움의 빛
사람들 모두가 밭으로 나가고 없는
비어있는 집 마당에 군락이 되어 핀
하얀 민들레가 가는 길을 막는다
엉겅퀴처럼 키도 크고 잎과 꽃도 자라서
푸른 하늘까지 날아오르는 나의 눈물 나의 색깔 나의 물빛
가까이 두고 보고픈 마음에 품어 안고 돌아 와 화분에 심었다
집을 떠나 온 화초들이 그러하듯이 새 자리에 적응하고자
남의 땅에서도 곧게 서 보려고 애쓰는 모양이 안쓰럽다
질긴 생명력에 기대하고 버텨낼 것이라고 생각하여
터 잡고 일어나 하얗게 꽃 피울 날을 기다렸는데
오늘 아침 꽃보다 먼저 애기 솜사탕 같은 씨를 만들었다
그래야지 그래 꽃으로 피어나진 못하였어도
바람 따라 어디로든 날아가서 흙이라면 앉을 수 있게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것이야 그렇게 기다려서
새로운 땅에 뿌리 내리고 다시 한 번 하얗게
너와 나의 슬픔을 꽃으로 피워보는 것이야

조미애 시인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시인의 목소리는 악기보다 아름다웠다. 시인의 낭송은 시어詩語 한 자 한 자가 나비되어 조명 아래 나풀거렸다. 짧지만 강렬한 연극을 본 듯, 시 낭송의 감동은 오래오래 관객들의 가슴에 하얀 민들레로 피어올랐다. 좋은 시와 낭송이 제대로 만났다. 격조 높은 한편의 영상물을 본 것 같았다.
두 번째 ‘보이는 대로’ 무대는 선이 오페라 앙상블이 친숙한 가곡과 오페라, 외국 민요 등을 들려주었다. 여섯 곡을 언제 소화했는지 모르게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세 번째 무대는 김민지 소프라노의 무대로 ‘노래에 향기를 입히다’라는 타이틀로 준비되었다. 무심히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너무 아름다운 곡이어서 리플릿을 찾아 확인해보았다. 이상규 시 정애련 곡 <진달래>라는 가곡이었다.

먼  산 진달래 필때면 
텅 빈 가슴 설움만 남아 
이별의 아픔 곱게 물들어 갑니다  

악몽같은 그리움이 
삶을 할퀴고 짓밟아 오면 
우뢰쳐 불러보는 그대 이름
나는 목이 쉬었습니다 

어느 때나 어디서나 
꽃잎같이 피어나던 
당신의 모습 굳어진 입가에 비로소 
웃음이 환상처럼 번져납니다 

꿈으로 일렁이는 진달래 향기 
가슴 가득 품은 채 눈감아 봅니다 
(이상규 시 정애련 곡 진달래)

소프라노 김민지 씨의 청아한 목소리에 빠져들면서 진달래의 향기에 흠뻑 취했다.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이날 공연에 참석한 작곡가 정애련 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정애련 작곡가는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특히 한국의 정서를 잘 담아낸 곡으로 가곡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는 재원이다. 빼어난 미모에 겸손하고 따뜻한 심성이 노래에도 그대로 담겨있는 듯하다.
조미애 시인의 시낭송에서 발동이 걸린 심장은, 진달래를 들으면서 서서히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양명문 시 변훈 곡의 <명태>도 바리톤 송기창 씨의 목소리로 오랜만에 들어보며 행복했다.
그렇게 <감미로운 소리에 젖는다>에 이어 마지막 무대 <음악이 손에 만져지는 듯……>에 이르렀다. 오늘의 마지막 무대, 고한승, 이희만, <오 주부드레>의 공연이다. <오 주부드레>는 ‘나는 바란다’라는 뜻으로 고엽의 첫 소절이기도 하단다. 바리톤 고한승 씨는 <무슈 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샹송가수다. 무슈 고가 이끄는 <오 주부드레> 샹송 밴드는 이미 여러 공연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그룹이다. 이렇게 생생한 라이브로 샹송을 감상할 수 있어 신기하고 새로웠다. 무슈 고의 유려한 언변과 능란한 무대 진행은 유쾌했고 노래는 감미로웠다. 모래시계 OST로 친숙한 <백학>을 접하게 된 것도 큰 기쁨이었다. 어느덧 공연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앵콜로 준비한 <빠담 빠담>을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무슈 고는 ‘빠담 빠담은, 가슴이 뛸 때, 두근 두근이라는 뜻’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가사가 나올 때는 같이 불러달라고 무대에서 감미롭게 속삭인다. 에디트 피아프의 대표적인 노래로 알려진 <빠담 빠담>은 1951년 출반 되었는데, 이 멜로디는 이미 10년 전쯤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가사가 없는 이 곡을 우연히 들은 에디트 피아프가 곡에 맞춰 “빠담 빠담……”하고 흥얼거렸는데, 그 말을 바탕으로 가사가 써졌다. 고등학교 음악책에 실린 <사랑의 찬가>에서부터 시작된 에디트 피아프에 대한 사랑은 젊은 날, 그녀의 목소리가 담긴 LP가 닳도록 좋아했고 이후 CD 세대로 건너간 이후에도 아낌없이 투자했던 음반이기도 하다. 나래코리아 콘서트에서 무슈 고의 목소리로 추억의 블랙홀로 빠져들어 간다. 그가 이끄는 대로, 익숙한 멜로디에 유일하게 아는 단어 ‘빠담 빠담’을 따라 불렀다. 신기하게 ‘빠담~ 빠담~’ 할 때마다 심장이 펄떡펄떡 나대는 것이었다. 잠자던 심장이, 이렇게 생생하게 뛴다는 걸 느끼게 된 게 얼마만인가. 심장도 시낭송과, 아련한 가곡과, 감미로운 샹송을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 묵혀둔 심장이 그렇게, “나 살아있다!”라고 힘차게 소리를 내고 있다. 가슴이 떨렸다.

가슴이 떨려 가슴이 떨려
골목길에서 나 그녀하고
눈이 마주칠 땐
가슴이 떨려 가슴이 떨려
사랑한다고 말해 버릴까 그냥 돌아설까
보면 말을 못하고 늘 안타까웠지
내 가슴 태우는 그녀
그 환한 얼굴이 이렇게 좋아서
나의 모든 마음을 털어놓고 말하려 하는데
가슴이 떨려 가슴이 떨려
(김정수 노래 <가슴이 떨려> 가사 일부>

참으로 오랜만에 젊은 날 심장의 고동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생명의 노래를 들으면서 이 귀한 자리를 마련해준 나래코리아 김생기 대표와, 무대를 빛낸 많은 연주자들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빠땀 빠담, 이 노래가 나의 삶을 힘차게 인도할 것이다. 빠담 빠담! 가슴 떨리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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