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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어째서 지금 가면 쓴 왕의 이야기일까

[정덕현의 드라마 드라마] ‘군주’의 질문, 당신은 가면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l승인2017.06.07 09: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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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군주>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자신의 가면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당신은 감당할 수 있는가. 당신은 진정 가면의 주인인가. ⓒ MBC

사실 가면 설정의 이야기들은 동서고금에 두루 활용되었다. <쾌걸 조로> 같은 서구의 작품이나 우리네 <각시탈> 같은 작품들이 거기에 속한다. 물론 탈이라는 소재로 가면을 확대하면 전 세계의 민속놀이 어디든 우리는 이 ‘가리는 도구’를 활용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토록 가면이라는 장치를 예술의 표현 수단 속에서 즐겨 활용하는 걸까.

최근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각시탈> 같은 작품은 가면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항일운동을 하는 목적을 위해 활용한다. 정체를 숨기고 무언가 체제에 반항하기 위한 가면의 활용은 저 우리네 탈춤이나 가면극 속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건 가면이 단지 정체를 숨기기 위한 도구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시탈>의 이강토는 가면을 쓰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는 가면으로 자신의 실체를 위장하고 있다. 거꾸로 각시탈을 쓰게 되면 본래의 모습인 항일 투사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여기서 가면은 실체를 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얼굴을 가림으로써 진짜 실체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MBC 퓨전 사극 <군주>는 ‘가면 쓴 왕세자’라는 파격적인 설정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사실 사극에서 왕세자가 가면을 쓴 모습은 현실적인 느낌을 주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군주>는 왜 굳이 이런 설정을 가져온 것일까. 그 해답은 부제에서 드러난다. ‘가면의 주인’이라는 부제는 가면을 쓴 자가 과연 진짜 군주인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이 사극이 담고 있다는 뜻이다.

왕세자 이선(유승호)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것은 편수회가 장악한 왕과 조정 때문이다. 짐꽃의 독에 중독되어 편수회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편수회는 최근 세간에 그토록 화제가 되었던 ‘비선실세’이고, 이들에 의해 ‘국정농단’이 횡행한다. 왕은 이선을 보호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가면을 씌워 키우고 그 정체를 숨긴다. 하지만 이선을 보호하려는 가면은 거꾸로 편수회에 의해 이용된다. 편수회는 왕을 죽이고 궁 밖에서 왕세자 이선을 제거하는 동시에 가짜 천민 출신의 동명이인 이선(엘)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운다. 비선실세와 국정농단 사태를 겪은 우리들에게 <군주>의 이야기는 그 비선실세들과 대적해 진정한 군주의 자리를 되찾는 왕세자 이선의 이야기로 읽힌다.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이야기의 내면에는 더 흥미로운 가면 이야기의 정체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왕세자 이선이라는 인물이 궁 밖으로 내쫓겨 겪게 되는 그 모험담 속에 들어있다. 이선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보부상에 들어가 일을 하며 그걸 근거지로 삼아 거상의 두령이 된다. 물론 그 목적은 그렇게 힘을 모아 저 비선실세인 편수회와 그 잔당들을 몰아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선은 두령으로서의 면모를 갖게 된다. 왕세자의 자리에만 앉아 있었다면 절대 가질 수 없었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허수아비 왕으로 추대되어 편수회에 조종되며 살아가는 천민 출신 이선에게도 똑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이선은 천민으로서 살 때면 절대 가지지 못했을 왕으로서 백성을 긍휼히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가짜 왕으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왕의 가면을 통해 그 역시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가면은 저 <각시탈>이 보여줬던 것처럼, 가림으로써 실체를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씀으로써 또 다른 나를 만나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흔히들 가면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면은 그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얼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니체가 말하듯 존재의 실체는 단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철학적 관점이 이 가면의 설정 속에 들어가 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이제 가면과 그 가면에 가려진 얼굴 중 어떤 것이 진짜냐는 문제가 아니다. 대신 그 가면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군주>가 가면하면 떠올리게 되는 ‘비선실세’ 같은 이야기가 또한 가리고 있는 실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군주>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자신의 가면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당신은 감당할 수 있는가. 당신은 진정 가면의 주인인가.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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