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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30년, 언론운동 30년③] 자본의 공격과 언론운동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6.21 10: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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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김영삼 정권 (1993~1997)

조선일보의 권력 확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겪으면서 언론자유는 점차 확대됐다. 노태우 정권과 맞설 때처럼 정부와 적대적으로 투쟁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 기간 내내 ‘세계화’의 구호를 들어야 했고, IMF 구제 금융을 겪어야 했고, 마침내 한미FTA를 목격하게 됐다. ‘언론 자유’라는 말은 점점 더 공허해져 갔다. “무한 경쟁의 탁류 속에서 누리는 언론의 자유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 라는, 더욱 근본적인 물음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본을 닮아 가며 비상식이 힘을 얻어갔다.

 

신문산업은 광고와 판매를 비롯 전체 매출액이 계속 하락세를 보였고, 전반적인 경영의 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해 허덕이고 있었다. 1993년 동아일보가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하면서 조선일보와 한판 전쟁을 치렀다. 1994년에는 신문과 방송 사이에 광고 전쟁이 벌어졌다. 신문과 방송은 서로 비방하며 광고시장 땅따먹기에 온힘을 쏟았다. 이러한 과열 경쟁은 1996년 조선일보 지국장 피살사건으로 비화했다. 무가지, 경품, 발행부수 불리기 등 신문의 변칙영업이 판을 쳤지만 전혀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는 언론과의 관계에 공을 들였고, 당근을 제시하며 언론의 우호적인 보도를 유도했다. 이 와중에 조선일보는 ‘언론에 의한 정권 통제’를 시도했다. 조선일보가 공격한 한완상 통일부장관과 이인제 노동부장관이 낙마했다. 외대 이장희 교수에 대해 사상검증을 벌이자 검찰이 적극 호응하여 수사에 나서는 촌극이 벌어졌다. 의기양양한 조선일보는 황석영, 조정래, 리영희 선생에 대해 사상검증을 이어갔다. 한윤형은 이러한 흐름의 배후에 “독재정권에 의한 언론자유 축소와 그 반대급부로 나타난 언론기업 성장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있다”고 지적했다(한윤현 <안티조선운동사> pp.30~32). 강준만 교수는 <인물과 사상>으로 독자적인 언론운동을 벌였다. 그의 저서 <김대중 죽이기>는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 문제를 본격 제기하며, 조선일보가 이러한 고정관념을 고착, 강화하는 메커니즘을 고발했다. 강교수는 “조선일보는 극우이념과 상업주의를 절묘하게 결합한 신문으로 특정 정치인에 대해 왜곡과 날조를 서슴지 않으며 이미지를 조작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통찰은 ‘안티조선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미디어오늘> 탄생, <죽은언론 살리기>

언론노조의 기관지였던 언론노보는 이 상황에서 더많은 시민들과 언론인의 인식을 공유하고 시너지를 일으키기 위해 1995년 <미디어오늘>로 거듭났다. 창간 특집 시리즈물 ‘신문자본연구’는 신문자본의 성장사를 통해 정치권력과 자본이 어떻게 한국 언론을 규정해 왔는지 밝혔다. 언론노조는 언론개혁위원회를 구성하고 1년간 활동한 연구 보고서 <죽은 언론 살리기>(1996)를 발표, “신문판매 시장의 혼탁상이 저널리즘의 질적 경쟁을 저해한다”고 문제를 제기했고(정연구), ‘죽은 언론’을 살리기 위한 일선 언론인들의 과제를 명료하게 제시했다(손석춘).

이러한 강력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거센 탁류 속에서 언론의 생명인 ‘진실’과 ‘공정’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손석춘 <민중언론학의 논리> pp.52~53, pp.60~73). 1997년 각 언론사 노동조합과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간부로 활동했던 전현직 언론인들이 새언론포럼을 결성했다. 현업으로 돌아간 선배와 그 뒤를 잇는 후배를 결합시키고, 어제의 ‘경험’과 오늘의 ‘현안’을 연결하여 언론노조 운동을 강화하자는 취지였다. 창립 10년을 맞는 2007년에는 <현장기록, 방송노조 민주화운동 20년>을 펴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전면 등장

1996년말, 정리해고 도입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됐고, 이듬해 1월 내내 민주노총의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신자유주의가 이 땅에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1997년 9월 9일, 언론노조, 기자협회, PD연합회는 <언론개혁 10대 과제>를 제시했다. △공보처 폐지 △방송위원회 및 공영방송사 사장선임방식 개선 △재벌의 언론소유 금지 및 언론기업의 소유집중 · 시장과점 해소 △언론사 편집·편성권 독립의 제도적 보장 △언론수용자 권리보장 △남북관계 및 통일문제의 자유로운 취재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과 ‘특수자료 취급지침’의 개폐 △광고공사의 영업독점 해소 △해직언론인의 명예회복 △국민주방송의 설립 및 방송보장, 이 10가지 개혁 요구는 신자유주의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한 정확한 요구를 담았지만, 김영삼 정권은 마이동풍이었다. 언론단체들은 연말이 다가오면서 대선보도 감시운동에 돌입했다. IMF 구제금융이 터졌고, 그 직후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② 김대중 정부(1998~2002)

 

언개련 출범

KBS와 MBC에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이 신설됐고,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1999~2005), KBS의 <한국사회를 말한다> 등 현대사의 굴곡을 조명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은 최대의 언론자유를 누리며 사사건건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1998년, 루퍼트 머독이 한국 방송에 침투를 시도하는 등 자본의 공세가 강화되자 언론운동 진영은 전열을 추스르고 더욱 강력한 대오를 이루고자 했다. 98년 8월 27일, 현업자와 시민단체를 아우르는 연대기구인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창립됐다. 김중배 선생이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32개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현직 기자, PD 등 모두 686명이 참여, 언개련의 단일 대오 아래 언론운동의 재도약을 시도했다. 신문개혁을 위해 △재벌 및 족별 언론의 소유지분 제한 △편집권의 독립 △경영의 투명성 확보를 촉구했고, 방송개혁을 위해 △방송위원회 독립성 확보 △편성편집 규약 마련 △민방 지분소유 제한 △외국자본 위성방송 참여 배제를 주장했고, 수용자 운동과 대안매체 활성화에도 힘썼다. 다양한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고, 언론의 오보와 부끄러운 과거를 고발하는 전시회를 가졌고, 통합방송법 등 다양한 이슈를 알리는 가두집회을 벌이며 언론운동의 활성화를 모색했다.

 

안티조선 운동

TV의 영향력이 더 큰데도 ‘조중동’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국정기획자문위원에 최장집 교수를 임명하자 조선일보는 한국전쟁에 대한 그의 글 “6.25는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 6.25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북한 민중”을 문제삼아 사상검증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일보 허위왜곡반대 공대위’가 결성됐고 강준만 교수가 ‘조선일보 제몫찾아주기운동’을 이끌자 ‘안티조선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조선일보의 검증에 화답하여 검찰이 수사에 나서는 메커니즘에 맞서서 홍세화 선생은 1999년 ‘나를 고소하라’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안티조선 우리모두’ 홈페이지가 열렸고, 지식인들이 조선일보 기고 거부에 나섰고, 옥천의 독립군들이 조선일보 절독운동에서 성과를 보였다. 2000년 9월에는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가 결성됐고, 2002년 대선국면에서는 노사모 회원들이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확산시켰다.

 

조선일보의 발행부수와 영향력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안티조선운동’의 효과도 있었지만, 신문 산업 자체의 침체와도 관련 있어 보인다. 2000년 이후 조선일보는 물론 한겨레까지 영향력이 줄고, 신뢰도가 하락했다. (조선일보 발행부수 : 2,000년 243만, 2014년 175만(유료 129만), 2015년 167만, 2016년 154만, 2017년 1,254,297부로 하락 추세 뚜렷 / 한겨레 1988년 50만, 2017년 20만 / 조선 한겨레 신뢰도 동반추락)

 

1998년, 강준만 교수는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의 프레임을 따르지 말고 독자적인 스탠스를 가져야 살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귀 기울이지 않았고, ‘조중동’의 막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한윤형, 같은책 pp.81~83). ‘조중동’의 판매부수는 줄어드는 추세가 분명했지만, 이들이 선점한 이슈와 의제설정의 여파는 상당히 강력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좌우 프레임’과 ‘종북 프레임’이었다. 이 프레임을 통해 자칭 우파는 자신의 과거와 부패에 대해 셀프-면죄부를 주는 한편, 상대를 공격할 이념적 무기를 쥐게 된다. ‘좌익’은 ‘죄악’을 연상시키며, 우파는 ‘오른쪽’, 즉 ‘바른편’을 연상시킨다. 정치적으로 각성되지 않은 대중의 일부에게 이 프레임은 지속적인 이미지 각인 효과로 영향을 미쳤다.

 

‘종북 프레임’은 천안함 사건에서 가장 큰 위세를 떨쳤다. 천안함이 북측 어뢰정의 폭침이라는 정부 발표는 믿기 어려웠지만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 ‘종북’으로 매도됐다. 조용환 변호사는 천안함의 종북 프레임에 걸려서 헌법재판관 후보에서 낙마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여성가족부 장관에 지명된 정현백 교수도 천안함 종북 프레임으로 공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종북 프레임은 이성적 판단과 언론 자유를 위축시키며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언론은 종북 프레임에 순치되어, 북핵 폐기와 북미평화협정 동시타결, 전시작전권 환수와 주한미군 철수 등 한반도 평화의 해법을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인터넷 매체의 활약

최초로 대중의 인기를 모은 인터넷 신문 딴지일보(1998)는 사사건건 정부에 딴지를 거는 조선일보를 풍자한 이름이었다. 이어서 오마이뉴스(2000)는 “모든 시민이 기자”라는 참신한 슬로건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협동조합 프레시안(2001)을 비롯한 인터넷 매체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적어도 정치 · 사회적 측면에서는 종이신문과 비견할 정도에 이르렀다. 시민들은 참여 저널리즘과 퍼블릭 액세스의 흐름 속에서 전통적 전문 저널리스트와 나란히 언론의 주체로 나서기 시작했고, 기존 언론사는 더 절박한 생존경쟁으로 내몰렸다.

 

2002년, 노사모가 활약하여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일 월드컵으로 광장이 뜨겁게 달궈질 때 서해 교전이 일어나 젊은 병사들이 세상을 떠났다. 효순이 ·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치어서 숨진 사건으로 처음 촛불시위가 일어났다. MBC는 미국을 재조명하는 10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했고, 그해 12월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③ 노무현 정부 (2003~2007)

 

노무현 정부 들어서 ‘조중동’은 KBS와 MBC를 ‘참여정부의 나팔수’라고 부르고 ‘비판언론’을 자처하며 ‘언론의 자유’를 맘껏 누렸다. 참여정부는 이 ‘비판언론’과 멱살잡이를 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힘을 키워 준 측면이 없지 않았다. 2008년, ‘안티조선운동’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됐지만 광우병 촛불집회를 계기로 언론소비자주권연맹이 설립됐다. 마침 확산되던 소비자 운동의 맥락 안에 언론운동을 자리매김한 것은 참신한 시민운동이라 평가할 만 했다. 그러나 세상은 가파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단순한 ‘소비자’로 머물지 않고 능동적인 ‘유저’가 됐으며, 스스로 언론의 주체가 되어 일어서기 시작했다.

언론인과 언론학자,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2004년 언론광장을 설립, 언론운동의 기존 성과를 계승하면서 언론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했다. 김중배 대표는 "지금 언론과 관련된 수많은 물음표들이 존재한다"며 “깃발이 먼저 나가는 게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서 물음표들의 해답을 찾을 때"라고 말했다. 언론광장은 한달에 한번 언론과 사회현안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하고 계간 <열린 미디어, 열린 사회>를 발간했다.

 

삼성의 지배와 <시사저널> 파업

자본이 직접 지배하는 신문사들은 앞 다투어 ‘보수’를 참칭하는 수구 집단으로 변해 갔다. 삼성이 광고를 통해 언론을 길들인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삼성이 이 나라의 정치 · 경제와 언론을 좌우하는 거대권력이라는 점은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으로 드러났다. 삼성그룹 2인자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나눈 대화 녹음파일을 당시 MBC 이상호 기자가 입수, 폭로한 것이다. 삼성그룹이 조직적으로 검찰 정치권에 뭉텅이 돈을 뿌려 매수한 흔적이 드러났다. ‘떡검’이란 말은 이 파일이 공개되면서 생긴 말이다. 세상은 발칵 뒤집어 졌고, X파일 내용을 공개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특검 수사를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녹음파일 내용이 아니라 ‘도청녹음’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고 삼성에 우호적인 언론들도 이 프레임으로 보도했다. 그 결과 사건을 폭로한 이상호 기자는 유죄를 받았고, 노회찬 의원은 실형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반면 돈으로 검찰과 정치권을 매수한 삼성그룹 사람은 단 한명도 단죄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1997년 외환 위기, 즉 IMF 사태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기아자동차 인수와 관련한 정치권과 삼성의 뒷공작이 녹취 내용에 들어 있었다. 기아자동차는 급격한 부채상환 요구를 받고 파산, 한국 기업에 대한 신뢰 저하를 유발하여 외환위기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삼성과 정치권의 뒷공작에 관한 내용은 정치권과 주류언론의 외면 속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묻혀버렸다.

 

삼성의 언론농단은 2006년과 2007년을 달군 <시사저널> 사태로 이어졌다. 2006년 6월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이 삼성 이학수 비판 기사를 기자 몰래 삭제한 사건이 일어났다. 기자들은 노조를 결성했고 시민사회는 ‘시사저널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와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힘을 보탰다. 2017년 1월부터 7월까지 <시사저널> 기자들은 천막을 치고 파업을 벌여 ‘짝퉁 시사저널’에 맞선 힘겨운 투쟁을 벌였다. 기자들은 결국 회사를 떠나 <시사인>을 창간하여 언론활동을 이어갔다.

 

재미있는 TV와 <88만원 세대>

자본이 온 사회를 지배하게 되자, 그 동안 자본의 통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방송마저 스스로 무한 경쟁의 길을 택했다. 방송사는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통찰에서 좌표를 설정한 게 아니라 정글의 법칙에 수동적으로 휩쓸려 좌충우돌했다. 2005년 MBC <PD수첩>의 황우석 논문조작 보도는 이 물신숭배의 시대에도 언론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쾌거였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프로그램은 역시 예능과 드라마였다. 예능 · 드라마의 질적 수준은 논외로 하고, 연출 테크닉만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TV의 드라마와 예능은 자극적인 내용으로 나날이 재미를 더해 갔다. 미국, 일본 방송의 영향 아래 성장한 한국 TV는 이제 미국, 일본 방송을 능가할 정도로 재미있어졌다.

 

2007년, 홍세화 선생은 경고했다. “한국의 방송은 너무 재미있다. 특히 텔레비전은 사회 구성원들을 드라마 중독에 걸리게 한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이젠 스스로 친 그물에 공공성을 가둔 지경이다.” (홍세화 <몰상식한 사회의 즐거운 TV>, PD저널 2007/2/7) K-Pop과 드라마 한류에 대해서 열광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었고, 한류는 단순한 문화 아이콘을 너머 가장 좋은 수출 상품으로 간주됐다. 국가주의 냄새가 나는 이 환호에 파묻혀서 지나친 재미 위주의 방송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 무렵, EBS에서 <톨레랑스>를 폐지했다. 우석훈 당시 성공회대 교수는 “교육 논리에서 ‘관용’이 사라지는 상징적 사건이자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한 발 더 가깝게 만드는 사건”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경쟁이 극대화된 시장에서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갖고, 그 대신 패자들에게는 내일은 없다는 메시지가 시대정신이다.”(우석훈 <승자독식 사회와 ‘톨레랑스’의 주검> 한겨레신문 2007/2/1) 공영방송의 마지막 파수꾼으로 최소한의 이성과 관용을 지켜줄 것으로 기대했던 교육방송마저 무한 시청률 경쟁의 대열, 그 마지막 자리에 합류한 바로 그 무렵,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가 나왔고 사오정, 오륙도, 삼포세대 같은 자조적인 용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부식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광기가 이성을 조롱하는 시대? 1980년대가 특수한 광기의 시대였다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시대는 보편적 야만의 시대란 말인가?” (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에서)

 

테크놀로지와 무한경쟁

지상파 방송이 ‘무한 시청률 경쟁’에 온몸을 내맡긴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무한 기술 경쟁’이 덧칠됐다. 방송의 무한경쟁은 테크놀로지 발전과 함께 엄청난 가속도가 붙었다. 시청자의 요구가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따라 테크놀로지는 급속히,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했다. 자본의 공세는 문민정부(김영삼), 국민의정부(김대중), 참여정부(노무현)도 다를 바 없었다. 노태우 정부에서 SBS가 출범했고, 김영삼 정부는 케이블TV, 김대중 정부는 위성방송, 노무현 정부는 DMB*, 이명박 정부는 IPTV*와 종편TV를 낳았다. 하드웨어를 개발하고 수출 시장을 선점하려는 대기업의 발빠른 경쟁은 시청자의 요구와 관계없이 끝없는 뉴미디어 경쟁시대를 열었다. 주권자인 시청자 국민이 원한 적이 없는데도 더 좋은 화질을 명분으로 디지털 TV, HD-TV, UHD-TV 등 나날이 새로운 송출방식을 선보였다. 하드웨어 생산 · 판매를 선점하기 위해 방송 테크놀로지를 작위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었지만, 이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걸로 간주됐다.

 

시민운동은 방송의 맹목적 질주에 숱한 경고를 보냈지만, 브레이크 없는 벤츠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언론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자사이기주의에 빠지는 양상을 보였다. 경쟁이 심화되면서 광고영업이 점점 더 중요해졌고, 미디어랩 설치를 두고 방송사 간의 진통과 갈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내내 이어졌다. 1997년 IMF 구제금융에서 2007년 이명박 정부 출범, 그리고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까지 이러한 현상은 계속됐고, 그 후 이명박 · 박근혜 정권 9년을 지나며 파국의 임계선을 넘어서게 된다.

 

* DMB :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 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 * IP-TV : Internet Protocol TV. 인터넷 초고속통신망을 통해 전송되는 TV. 실시간 방송이면서도 원하는 프로그램을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주문형 시청이 가능하며, 시청자가 방송사로 의견이나 메시지를 보내는 쌍방향 방송.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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