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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신들의 황혼’과 상생의 꿈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6.22 17: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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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 앞에 바그너 음악을 내밀 수는 없다. 음악이 너무 거창할 뿐 아니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그의 대표작 <니벨룽의 반지>는 하루 4시간 씩 나흘 동안 공연하는 4부작 오페라다. 연주시간 16시간, 이 엄청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는 건 클래식 매니아들에게도 버겁다. 하지만, 해묵은 적폐를 모두 일소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가는 지금,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만큼 잘 어울리는 곡도 없다.

‘니벨룽(Nibelung)’은 북유럽 신화의 난장이 족속이다. 난장이 알베리히는 라인강의 반지를 손에 넣어 세계의 부를 지배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영웅 지크프리트가 신들의 도움으로 반지를 차지하지만 인간들의 배신으로 죽게 되고, 그를 사랑한 브륀힐데가 자살하면서 반지를 라인강의 처녀들에게 돌려준다. 발할라의 불길이 탐욕의 세상을 삼키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의 4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발퀴레>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이 귀에 익을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미군 헬기가 베트남의 한 마을을 잿더미로 만드는 장면에 이 음악이 흐른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남의 돈을 자기 돈처럼 쓰고, 은혜를 베푼 사람의 아내와 예외 없이 불륜을 저지른 부도덕한 인물로 비난받는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도덕성을 초월하여 언제나 외경의 대상이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바그너를 독일 민족주의의 우상으로 옹립한 뒤 그의 음악은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기억과 연결됐다. 하지만 브루노 발터, 게오르크 숄티, 다니엘 바렌보임, 주빈 메타 등 유태계 대지휘자들은 기꺼이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했다.

 

바그너가 꿈꾼 ‘미래의 예술’은 무엇일까? 전통 오페라는 노래가 나올 때 극의 흐름이 멈추며, 노래에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져 있기 때문에 ‘넘버 오페라’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바그너의 오페라는 드라마와 음악이 하나로 융합돼 있고, 드라마가 전개될 때도 음악이 계속 흐른다. 이렇게 끝없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선율을 ‘무한선율(Unendliche Melodie)’이라 한다. 이 ‘무한선율’은 등장인물의 성격과 심리상태를 암시하는 ‘유도동기(Leitmotiv)’로 이뤄져 있다. 바그너는 연극과 음악을 하나로 융합한 자신의 새로운 오페라를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e)’이라고 불렀고, 이를 통해 19세기의 속물적 시민사회를 비판했다.

 

‘음악의 혁명가’ 바그너는 실제 혁명에도 열광했다. 그는 18살의 나이로 1830년 혁명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1849년 드레스덴 봉기를 주도한 혐의로 10년 넘게 수배 생활을 했다. 입헌군주제를 명시한 새 헌법에 프로이센 왕과 작센 왕이 조인을 거부하자 1849년 5월 1일 드레스덴 시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시민군이 세운 임시혁명정부는 프로이센 지원군의 공격으로 무너졌고 바쿠닌 등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고문 끝에 유배됐다. 바그너는 프란츠 리스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리스트는 위조여권과 돈을 줘서 바그너가 취리히로 도피하도록 했고, 그 뒤 바그너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바그너는 “모든 소유는 도둑질”이라는 프루동의 사상에 심취하여, 남의 돈을 자기 돈처럼 쓴 습성을 스스로 합리화했다. 자본의 탐욕에 대한 그의 증오는 훗날 <니벨룽의 반지>에서 황금 숭배에 대한 저주로 집약됐다. 4부작 오페라에서 <신들의 황혼> 피날레 장면이 압권이다. 브륀힐데는 지크프리트의 죽음을 애도한 뒤 저주받은 반지를 라인강의 세 처녀에게 돌려준다. 거대한 불길이 그녀를 삼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할 때 브륀힐데(=발퀴레)의 동기(1:42, 1:56), 지크프리트의 동기(7:11), 구원의 동기(2:45, 5:18, 7:26)가 이어진다.

 

<신들의 황혼> 피날레(주빈 메타 지휘, 2008년 발렌시아 공연) 바로 보기

 

 

촛불혁명은 표면적으로 보면 박근혜 ·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청산한 것이지만, ‘헬조선’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아우성이 폭발한 것이기도 했다. 자본의 무한질주에 제동을 걸고 강고한 지배세력의 카르텔을 해체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재벌개혁, 검찰개혁, 군부개혁, 언론개혁 요구로 쏟아져 나왔다. 1987년 6월항쟁부터 지금까지 30년을 10년 단위로 나눠보자. 6월항쟁 10년 뒤인 1997년에 IMF 구제금융이 타졌고, 또 10년 뒤인 2007년에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됐고(바로 이듬해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왔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6년과 2017년 사이에 촛불혁명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이 세상은 돈만 알고 사랑을 잊은,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모든 분야의 개혁과 함께 소득격차를 줄이고, 비정규직을 해소하고, 기본소득을 도입하여 다 함께 상생하는 세상을 만들 때다. MBC와 KBS를 아직도 점령하고 있는 최악의 적폐를 말끔히 씻어내야 하는 건 물론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꿈꾸며, 온갖 적폐가 불의 세례를 받는 <신들의 황혼> 마지막 장면을 다시 한 번 감상해 보자.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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