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이 내게로 온 날 ㉘] 그녀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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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수빅(Subic)에 거주하는 친구 Y가 한국으로 나온다고 하기에, 날을 잡아 친한 친구들이 모이기로 했다. 필리핀으로 말하자면 섬나라이고, Y가 거주하는 수빅은 자유무역항 경제특별지구이며 휴양지로 각광받는 도시인데, Y는 한국에 오면 바다를 먼저 찾는다. 3년 전에 방문했을 때에도 나를 포함해 여고 친구인 I와 M, Y 등 네 명이 강원도 속초를 여행했었다. 우리는 설악산 울산 바위가 보이는 곳에 숙소를 정하고, 곧장 바닷가로 달려갔다. 설악산과 동해바다의 기운을 동시에 받으려는 심사였던 것 같다. 초봄의 바닷가는, 살을 에이는 매서움은 가셨으나 한 번씩 휘몰아치는 파도는 여전히 날카로운 비수처럼 살갗을 할퀴었다. 태평양의 느른한 바닷바람에 길들여진 Y는, 이른 봄 바다의 앙칼진 뒤태가 맘에 들었나 보다. 전라도말로 ‘쌔코롬한’ 바람이 폐부를 들락거리는 게 좋다고, 투정하는 애인을 달래듯 바다 바람과 교감하며 연신 깔깔거렸다. Y에게 필리핀 바다와 한국의 바다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겨울 바다로 가자 메워진 가슴을 열어보자

스치는 바람 불면 너의 슬픔 같이 하자

너에게 있던 모든 괴로움들은

파도에 던져버려 잊어버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라

너무나 아름다운 곳을

겨울 바다로 그대와 달려가고파

파도가 숨쉬는 곳에 끝없이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

넘치는 기쁨을 안고

(푸른하늘 노래 / 겨울바다 가사중 일부)

 

그랬다! 한국의 바다는 가슴이 확 트이는 청량감이 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친구들이 있다. 그것이 오랜 외국 생활에서 고국에 돌아와 누리는 잠깐의 사치이자, 위안이자 기쁨이며 행복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동해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과 그 쫄깃한 식감은 분명 필리핀의 그것과 다를 것이다. 그렇게 동해바다에서 ‘바람을 맞고’, 항구에서 신선한 어패류를 잔뜩 사다가 숙소에서 배부르게 먹고 나니, 기적처럼 3월 하순인데 눈이 내렸다. 필리핀에서 볼 수 없는 ‘눈’을 보았다고 Y는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렇게 그녀와 동해에서 보낸 ‘맛있는’ 1박은 친구들 사이에서 좋은 추억이 되었다.

 

여행을 떠나 기차를 타고

들판을 넘어 산 속 계곡따라

자연을 벗 삼아 노래도 불러보고

동굴 속에서 소리도 쳐보네

잔뜩 짊어 메고서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서

동네 어귀에도 내려볼까

그렇지만 바닷간 어떨까

우리가 떠나는 여행스케치

이제는 저물어 노을은 지지만

잊지는 못할 거야

아름다운 세상 우리들의 여행스케치

(여행스케치 노래 / <그 녀석들과의 여행> 가사 일부>

 

올해 Y가 한국을 찾았을 때는 여름이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운 변산반도를 여행하기로 하고 격포항 가까이에 숙소를 예약했는데 마침 전주 덕진공원에서 워터스크린과 국악을 접목한 공연이 성황이어서 하루 일찍 Y를 초대하기로 했다. Y는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서 전주를 찾아주었다. 한국에 오면 가장 입맛이 당긴다는 음식 가운데 순대국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남부시장의 유명한 순대 국밥집으로 안내를 했더니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자리를 옮겨 덕진공원에서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엮은 3D 워터스크린 뮤지컬 <실록을 탐하다> 공연을 감상했다. 공원 분수대를 무대 삼아 워터스크린 영상을 기반으로 야외에서 펼쳐진 뮤지컬은 ‘문화광’인 Y에게 신선하고 창의적인 무대를 선물했다.

이튿날은 친구 I와 합류하여 변산반도로 떠났다. 함께하기로 한 M은 큰 오빠가 위중하셔서 부득이 불참하게 되었다. 어느새 우리들은 가족들의 변고로 인해 100퍼센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M은 당분간, 동해의 추억 속에 머물러 있도록 두고서 올해는 친구 셋이 서해를 찾았다.

 

바다다 알 수 없는 향기로

나를 부르던 저 바다야

바다다 나의 모든 슬픔을

감싸주었던 저 바다

나를 떠난 그 사랑의 아픈 추억

모두 저 바다에

나와 다른 세상 떠나고 싶던

그 마음 모두 저 바다에

너의 샤랄라 달콤한 향기와

샤랄라 시원한 파란 물결 소리

샤랄라 해 지는 붉은 노을이

너무나 너무나 아름다워

(임현정 노래 / <바다예찬 (서해에서)> 가사 일부)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일몰 장소는 많지만, 부안의 솔섬은 특히 사진작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다. 학생해양수련원 앞에 있는 작은 섬의 소나무 가운데, 제일 바깥쪽에 있는 소나무 한그루의 위용 때문이다. 마치 용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인데, 일몰의 상황에 따라 용이 여의주를 문 것처럼 보여서 사진작가들은 이 한 컷을 건지기 위해 좋은 위치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아주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린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아쉽게도 잔뜩 흐린 날씨여서 멋진 일몰을 고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서쪽 끝에서부터 붉게 물들어 오는 저녁놀을 바라보니 우리들 가슴도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며

슬픈 그대 얼굴 생각이나 고개 숙이네

눈물 흘러 아무 말할 수가 없지만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 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중략)

그 세월 속에 잊어야 할 기억들이 다시 생각나면

눈 감아요 소리없이 그 이름 불러요

아름다웠던 그대 모습 다시 볼 수 없는 것 알아요

후회없어 저 타는 노을 붉은 노을처럼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 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이문세 노래 <붉은 노을> 가사중 일부)

 

솔섬 일몰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격포항에 들러 바다여행의 백미인 싱싱한 회와 약간의 조개류를 사서 숙소로 돌아와 또 한 번의 만찬을 했다. 금방 떠온 회도 일품이지만 솜씨 좋은 친구들이 만들어 준 찌개 또한 어느 때보다 감칠맛이었다.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과 묵은 김치 그리고 분위기가 식욕을 돋운다. 깔깔대며 웃다 보면 소화도 금방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또 한 밤이 지났다.

변산 여행 이틀째는 채석강을 찾았다. Y는 30년 만의 방문이라고 했다. 30이라는 세월의 덮개가 툭 하고 어깨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가볍지만은 않다. 스무 살 무렵, 부안 채석강에 누구와 함께 왔는지 묻지 않았다. 우리 나이에는 기억하는 것보다 잊혀진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혹은 잊어야 할 것도 많을 것이다. Y는 전주와 변산에서 2박 3일 여행을 끝으로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Y와 다시 만나기까지는 어쩌면 우리가 필리핀으로 찾아가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의 재회는 기약이 없는 셈이다. Y는 한동안 친구들이 그리울 것이다. 어쩌면 바다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초봄 동해의 청량함과, 초여름 서해의 상쾌함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Y와 함께 할 다음 목적지가 정해진 것 같다. 남해는 Y를 위해 아껴두고 싶다. 다만, 그녀들과 남해를 찾는 날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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