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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피디, 21세기 크리에이터를 만나다③] 죽어가는 외주제작 생태계, 정상화가 시급하다

고 박환성·김광일 피디를 기억하며 최선영 이화여대 에코크리에이티브협동과정 대학원 특임교수·독립PDl승인2017.07.28 11: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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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고인들을 비롯해 유가족들, 촬영현장과 편집실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독립창작자들 모두에게 진심어린 위로가 필요한 때 같다.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행동하도록 힘을 주는 따뜻하고도 강한 위로." ⓒ 한국독립PD협회

[PD저널=최선영 이화여대 에코크리에이티브협동과정 대학원 특임교수·독립PD] <20세기 피디, 21세기 크리에이터를 만나다> 3편은 지난 6월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렸던 온라인 동영상 축제인 비드콘(VIDCON) 출장기와 DIA 페스티벌, 키즈 크리에이터에 대한 이야기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 박환성, 김광일 피디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이 이야기는 다음 회로 미루기로 했다.

21세기 피디이자 크리에이터로 뜨겁게 살아갔던 두 피디. 고 박환성 피디는 기획, 연출, 촬영, 편집, 운전까지 도맡아 해왔던 창작자였다. 실제로 뛰어난 인재였지만, 열악한 제작 환경과 불공정한 계약 관행 때문에 ‘만능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다. 고인의 자취를 기억하며 독립제작 생태계가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8년 전, 한국독립피디협회 부회장이었던 나는 부당한 계약 관행을 알리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사단법인이 되기 전이라 조직과 체계가 갖춰지기 않아 무늬 직함만 달고 맨땅에 헤딩하던 때였다. 증거자료로 방송사인 갑에 의해 일방적으로 작성된 계약서가 필요했다. 몇몇 제작사 대표들에게 요청했지만 난색을 표했다. 그 어떤 제작사나 독립피디도 공개를 꺼려했다. 방송사에 낙인찍히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방송 판은 좁디좁아서 사례를 보면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다.

고민이 깊어가던 중 박환성 피디에게 연락했다. 계약서 사본을 공개해 줄 수 있냐고. 밥줄이 끊길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에 가담을 부탁할 막역한 관계는 아니었다. 총회나 연말모임에서 인사하는 사이였을 뿐이었는데도 그는 흔쾌히 오케이 했다. 유일한 제보자였다.

부고 소식을 접하고 메일함을 열어봤다. 2010년 고인과 주고받았던 글들이 그대로 있었다. 공적 지원 체계와 공영방송의 부당한 계약 관행을 몸소 겪으면서 써내려간 장문의 메일. 그 중 “A(방송사) 편성담당자에게 보낸 메일인데 선영 씨만 함 보세요”라고 시작되는 메일의 일부 내용을 공개한다. 이제는 나만 보아서는 안 될 내용 같아서다.

“A(방송사) 윗분들 생각은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구체화 되는 것 보고 제작비를 책정해서 계약하겠다, 이런 의도이신 것 같은데...결국은 제작비를 나중에 깎겠다고 나오시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3천5백에서 4천5백 사이에서 생각하고 계시다 하셨는데 그럼 아마도 3천5백으로 제시하시지 않겠나, 예상 되는데요.

생태가 별로 포함 안 되는 것이니 많이 줄 필요 있나, 그렇게 윗분들은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생태가 별로 안 들어간다 하더라도 밀렵이라는 주제가 그리 쉽게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피디님은 바깥에서 다큐를 만드는 독립PD들 입장도 잘 이해해주시는 분이라 생각돼 그냥 편하게 솔직해 말씀드리는데요...제가 마지막으로 전해드린 예산안 액수에서 더 깎이게 되면 일본 포경선 승선해서 촬영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쪽이랑 이야기가 잘 돼 다행히 촬영료가 2만 오천불로 된다 하더라도 카마라 맨한테 그 힘든 원양 포경선 촬영 한 달 이상 걸릴 일정에 줄 페이도 감안을 해야하고요... 그냥 육지에서 촬영하는 것 최소 두 배는 줘야 되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이런 것들 다 따져보면 두 편에 제작비 일억이라 해도 승선 촬영 하나에 1/3이 훅 빠져나가게 되고요. 만일 편당 제작비가 사천, 삼천오백 이렇게 되면 거의 절반이 여기로 빠져나가는 것인데...다른 부분 촬영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진행할 수 있겠습니까?

호랑이(아이템)도 윗분들은 썩 그리 만족해 하시진 않는 것 같은데...호랑이도 처음 기획안 내용대로 제작하려면 편당 최소 7천5백은 든다,라고 했는데.. 결국은 나중에 5천으로 깎였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아예 안하는 것보단 그래도 왠만하면 호랑이는 제작해보고 싶어서 진행을 하긴 했지만...기본적으로 작품 퀄리티는 투자되는 제작비에 비례한다는 것은 ○피디님도 잘 아실 겁니다.(2010년 12월 1일 박환성 피디 메일 중)

사자와 같은 용기를 지녔던 고 박환성 피디. 이렇게까지 방송사 편성담당자에게 할 말을 하며 ‘들이받을’ 용기를 실천하는 현역 독립피디를 본 적이 없다. 제작비가 터무니없더라도 하고 싶으니까, 잘 만들고 싶으니까. ‘안하는 것보단 그래도 왠만하면 호랑이는 제작해보고 싶어서...’라는 문구가 자꾸 눈에 밟힌다. 자책이 밀려온다.

또 다른 메일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2007년 OOO에서 파일럿 프로그램 제작지원액 6900만원을 받아서 이듬해 B(방송사) <OOOOO>에 방송됨. 문제는 B(방송사) 측에서 ‘OOO에서 지원 받은 것이니 제작비는 안줘도 되겠지?’라고 하더라. ‘안됩니다’란 말을 하지 못함. 아예 계약서 작성도 하지 않음. 그런데도 첫 방송 후 B(방송사)는 각종 케이블에 프로그램을 팔아 방송이 나감.”(2010년 11월 19일 박환성 피디 메일 중)

▲ "불공정한 거래 시스템이 고착화되는 동안 침묵하고 계셨던 방송사 구성원 분들께 묻고 싶다. 지금 공영방송의 정상화에 대한 담론, 해직기자와 해직피디 복직이 연일 회자되고 있는데, 방송 정상화라는 아젠다에 독립창작자들의 불공정 거래 정상화 이슈는 포함될 수 있을까요." ⓒ한국독립PD협회

방송 나가는 걸 영광으로 알라는 전형적인 ‘갑질’이었다. 이런 관행들은 요즘은 사라졌는지 알고 싶다. 제보하지 않으면 모른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하지만 송출권과 타임슬롯이라는 독점권을 가진 방송사를 통해야 콘텐츠 유통을 할 수 있는 독립피디들은 감히 ‘개길’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십여 년 전 부당 갑의 요구와 횡포를 폭로했다가 한 달여 만에 프로그램을 회수 당한 이력이 있다.

거대하고도 해괴한 침묵의 카르텔. 외주 제작 정책이 키워온 무형의 괴물이 방송사 어딘가에서 자라나 관행으로 존재한다.

불공정한 거래 시스템이 고착화되는 동안 침묵하고 계셨던 방송사 구성원 분들께 묻고 싶다. 지금 공영방송의 정상화에 대한 담론, 해직기자와 해직피디 복직이 연일 회자되고 있는데, 방송 정상화라는 아젠다에 독립창작자들의 불공정 거래 정상화 이슈는 포함될 수 있을까요. 독립제작의 문제는 얼마나 중요한 사안일까요. 해직방송인들을 응원해왔는데 함께 저항하고 싸워줄 수 있나요. 복직한 회사의 외주제작 계약관행에 부당함이 있다면 먼저 용기 내어 알릴 수 있나요. ‘상생’을 위해 행동해줄 수 있나요...

방송계라는 빼앗긴 들에 봄이 오면 독립피디들에게도 봄은 올까. 해직 방송인들이 복귀하면 방송은 정상화되고 독립창작자들의 생태계에도 꽃은 필까.

나는 고 박환성 피디가 EBS와 맺은 계약 내용의 사실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생전에 문제제기했던 갈등에 대해 상세히 알지는 못한다. 물론 계약이란 도장을 찍는 순간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애초 불공정 계약관행의 문제라면 사안이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저작권 귀속 여부와 기존 제작비의 삭감 또는 환수의 문제는 창작자 입장에서 매우 민감하기 때문이다.

계약의 실효성을 논하기에 앞서, EBS측에 제작비 책정이 현실적이었는지 묻고 싶다. 연출자가 아프리카에서 직접 차를 몰고 이동 중에 햄버거를 먹어가면서 촬영할 수밖에 없는 빡빡한 예산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채널사업자들은 외주제작비에 대해 어떠한 현실인식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단가 기준의 현실성 말이다. 미디어 환경, 제작구조가 바뀌면서 제작비 단가도 높아지고 있는데 ‘제작비의 공정한 책정’은 과연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석연치 않다.

나는 앞서 공개한 고인의 메일 내용처럼 이번에도 EBS가 적정 제작비를 책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은 아닌가 합리적 의심을 하는 중이다. RAPA 제작지원금에 응모하지 않아도 될만큼 제작비가 서로 합의되었다면 어땠을까. 문서화된 계약 증빙 자료들을 그때그때마다 남겼다면 어땠을까. 애초 계약당시 제작비를 구두 협약한 것과 달리 대폭 삭감한 일은 없었는가. 실제로 고인은 생전에 “EBS가 책정한 제작비 1억 4천만 원은 처음 EBS에 요구했던 제작비보다 적은 금액이었다”며 “프로그램 제작을 계약하던 초반에 편성기획팀 담당 PD가 '예산이 이것밖에 없으니 부족한 건 정부지원금에서 받아서 쓰라'고 말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2017년 7월 10일 피디저널 <EBS, 정부 제작지원금 간접비 요구 논란...왜?>

▲ "고인이 완성하고자했던 <야수와 방주>는 꽤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획해왔던 작품이었다. 원제는 . 2014년 ‘Sunny Side of the Doc’ 오피셜 피칭에 선정된, 해외 커미셔너들에게서 먼저 인정받은 기획이었다." ⓒ 최우영PD

창작자가 요구한 제작비가 다 수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영방송은 근본적으로 창작자의 제작조건과 창작 과정을 이해하고 살피면서 공익을 위해, 시청자를 위해, 품질 좋은 콘텐츠와 완성도를 위해 계약의 안정성을 지켜주고 유지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각 작품의 특수성과 제작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사고처럼 위험요소에 노출될 확률이 높은 해외 자연다큐멘터리 작품에는 안전가이드라인이 포함된 계약내용과 제작비, 지원이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창작자인 고인에게도 묻고 싶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단지, 그가 2010년 당시에도 공적지원금은 왜 제작비로 제대로 투입되지 못하는지 비판했던 맥락과 비슷한 심정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 아~휴 정말.....가장 이상적인 것은 지상파든 PP든 눈치 안보고 독립적으로 기획안 내용만 보고 심사해서 지원해주고 최고의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는 그 어떤 지원제도인데... 이런 이상은 다들 알고는 있겠지만 실천과정에서 지원 정부 기관간의 힘 싸움 뭐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이 안 되고 있는 것이죠. 자꾸 이야기 하려니 뭐 힘만 빠지네요”(2010년 11월 21일, 박환성 피디 메일 중)

고인이 완성하고자했던 <야수의 방주>는 꽤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획해왔던 작품이었다. 원제는 <King in a cage>. 2014년 ‘Sunny Side of the Doc’ 오피셜 피칭에 선정된, 해외 커미셔너들에게서 먼저 인정받은 기획이었다. 예정대로 금년 말 방송이 된다면 완성까지 5~6년 이상 공들인 작품인 셈이다. 해외에서도 주목받은 기획이었기에 고인은 더 잘 하고 싶었을 테고, 그러니 자발적인 자부담도 제법 컸을 것이다. 그래서 EBS 측에서 구두 협약과 달리 실망스러운 제작비를 책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력으로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했을 것이다. 피칭 당시 ‘서니 사이드 앰배서더’ 자격으로 고인과 함께 했던 최우영 피디는 “채널 또는 플랫폼 사업자가 총 제작비를 대는 ‘buy out'이 아닌데도 모든 권리를 다 가져가는 것은 불공정 거래”임을 강조했다.

최우영피디는 스스로 ‘국내에서는 지워진 피디’라고 하면서 국내 방송사의 고질적인 불공정 계약 관행을 꼬집었다. 주로 해외 방송사들과 계약을 맺으며 일하고 있는 최피디는 겨우 방영권 정도인 금액으로 저작권까지 달라고 하는 국내 채널 사업자들의 터무니없는 제안과 횡포에 계약 자체를 포기한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좋은 기획을 해도 국내 채널 사업자들의 계약 조건과 기준이 국제 규격과 상이해 국내 방영을 결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보니 해외 채널 여기저기에 방영권 선판매해서 제작비를 모으고 해외 채널에 방송하는 독립창작자들의 고달픈 현실이 마치 국위 선양이고 수출 성과인 것처럼 둔갑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되기도 한다.

▲ "계약의 실효성을 논하기에 앞서, EBS측에 제작비 책정이 현실적이었는지 묻고 싶다. 연출자가 아프리카에서 직접 차를 몰고 이동 중에 햄버거를 먹어가면서 촬영할 수밖에 없는 빡빡한 예산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 최우영PD

출발부터 비정상적이었던 외주정책과 불공정 계약 관행은 누구에게 어떻게 호소해야 정상화가 이루어질까.

방송프로그램은 상품으로서 거래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공정거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독립제작사 프로그램이건 독립피디의 창작물이건. 그런데 상품가치 인식의 정도가 채널사업자와 창작자는 서로 너무 다르다. 관행이 아직도 크게 작동한다. 물론 채널사업자 중 방영권을 구입해 프로그램 송출을 하는 거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이고 명문화된 계약 규정에 따른 것이 아닌 소수 창작자 작품에 해당되는 ‘이례적인’ 사례다.

외주제작관행에서 공정거래는 이례적으로 발생하고, 불공정 관행이 보편적으로 작동한다면 정책 차원에서 실태조사와 관리 감독 기관의 점검이 시급히 필요해 보인다. 그냥 대충대충 하는 조사 말고, 제대로 된 실태조사를 요청드린다.

그리고 고인의 제보와 용기로 공적지원체계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그는 방통위 산하기관에서 지원하는 채널사업자제작지원금이 실제로 독립피디들에게 ‘재하청’ 주는 형태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을 총대매고 상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이 제보를 설명들은 방통위 사무관은 실제 연출하는 사람에게 인건비가 지급될 수 있도록 회계정산 룰을 바꾸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아니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채널사업자만 지원해왔던 방통위 제작지원사업에서 독립피디 인건비가 인정되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씨앗이 고인으로부터 출발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꾸준히 그 목소리가 전해지면서 RAPA의 ‘차세대 방송용 콘텐츠 지원’ 중소사업자 분야도 생겨났을 터이다. 그런데 이 지원금이 문제가 될 줄이야. 마음이 답답하다. 죽음과 부조리가 얽혀 있어서 더 그렇다.

나는 8년 전 고인에게 불공정 관행을 없앨 수 있다고 큰 소리 치곤했다. 염치없는 약속이었다. 선언과 다짐으로 글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비겁하게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은 고인들을 비롯해 유가족들, 촬영현장과 편집실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독립창작자들 모두에게 진심어린 위로가 필요한 때 같다.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행동하도록 힘을 주는 따뜻하고도 강한 위로.

수많은 추모 글 중에 이용규 작가님께서 페이스북에 올리신 글을 보고 큰 위로를 받았다. 고인들을 귀한 존재로서 끌어안고 독립피디들을 진심으로 달래주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맙다. 먼 길에서 돌아온 두 피디를 마주할 때, 부디 “일어설 수 있는 힘으로 연결되기를”...

이용규 작가 페이스북 글 2017년 7월19일 오후 6:00

“박환성 피디는 죽은 게 아니라 쓰러진 것이다.

박환성 피디의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역만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촬영 도중 교통사고로 운명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가슴 한 쪽에서 말할 수 없는 통증을 느낍니다.

그는 죽은 게 아니라 쓰러졌습니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합니다.

단지 악수를 몇 번 나눴을 뿐이고, 언젠가 프로그램 때문에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던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가슴이 저미는 것은

박환성 피디의 죽음이 단지 그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이 땅 고독한 방송쟁이들의 현실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차마 그를 죽었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죽기 살기로 애쓰다 쓰러졌다 말하겠습니다.

방송을 하겠다며 찾아온 어린 작가 후배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귀함을 잃지 마라’입니다.

물론 조연출들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솔직히 이 말 속에 방송을 먼저 시작한 선배로서의 자책이 들어있지 않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

방송일이 정말이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박환성 피디도 자신의 귀함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그 <자신의 귀함> 하나만을 담보로 코끼리와 대화를 시도하고

사자와 맞섰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당사자에겐 우주의 죽음과 갖습니다.

그는 너무도 숭고한 자신의 죽음을 들고 광야로 걸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더욱 많은 독립 피디들이 슬퍼할 것입니다.

같이 나가지 못했다는 깊은 자책과 인생의 회한이 있을 것입니다.

독립피디들은 그냥 피디가 아닌 <독립꾼 피디>입니다.

여전히 대우 받지 못한 독립꾼들입니다.

광야에서 싸워야 하는 전사들입니다.

그렇게 싸우다 사고의 순간, 죽음을 예지하는 순간,

박환성 피디의 뇌리 속에 어떤 생각들이 흘러갔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에 통증이 더욱 심해집니다.

혹시 독립피디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자신이 잘못되면 방송이 펑크날까를 걱정하진 않았을까요.

국내 공중파와 싸우는 게 초원의 호랑이와 싸우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눈물겹도록 느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너무도 짧지만 길게 느껴졌을 죽음 앞의 시간.

그 시간 마지막 부분엔

그래도 국내에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원한 맥주 한 잔 못하는 게 아쉽지는 않았을까요.

그의 쓰러짐이

수많은 독립꾼 피디들의 가슴에 전달돼

일어설 수 있는 힘으로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박환성 피디의 영전에

꽃 한 송이 감히 올립니다.

영면하소서.”

■ 덧붙이며 

두 PD의 열정이 담긴 <야수의 방주> 트레일러를 공개합니다. 이 영상은 박환성 PD가 대표로 있는 제작사 블루라이노픽처스가 RAPA(한국전파진흥협회)에 제출했던 트레일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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