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이 내게로 온 날㉙] 여행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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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우여곡절 끝에 남프랑스 기차여행 일정이 정해졌다. 여름휴가기간에 자유여행으로 6~8명 정도에서 추진하던 일이 K와 그녀의 언니들 네 자매가 합류하면서 여성만 11명이 되었다. 인솔자로 동행을 부탁한 K사장은 동생처럼 지내는 L선생을 섭외해서 남자 둘이 합류하게 되었으니 우리 일행은 모두 13명이다. 65세의 최고령자를 비롯해 60세 이상이 5명이나 된다. 단체여행 인원으로는 다소 부족하고 자유여행으로는 부담스러운 인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한 사연과 인연으로 뭉치게 된 것이리라.

우리 여행의 제목을 ‘감미로운 남프랑스’라고 정했다. 해변도시 니스와 마르세이유, 고흐의 열정이 머문 아를, 고성古城이 아름다운 뚜르 등 남부 프랑스 지역을 기차로 이동하는 야심 찬 계획이다. 기차여행은 생각부터 감미롭지 않은가.

마조리 노엘(Marjorie Noel)이 부른 샹송 ‘Dans Le Meme Wagon(사랑은 기차를 타고)’는 케리부룩, 이 시스터즈, 나비소녀 등이 ‘사랑은 기차를 타고’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러 익숙한 노래다. 최근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도 삽입곡으로 소개돼 더욱 친근하다.

사랑은 둘이서 기차를 타고 속삭여요.

시원한 벌판을 달려가면서 속삭여요.

하늘에 흐르는 흰구름 처럼 포근한 마음을,

불같은 당신의 사랑에 간직해요.

사랑은 둘이서 기차를 타고 속삭여요.

시원한 벌판을 달려가면서 속삭여요.

무성한 수풀의 푸르름 처럼 싱싱한 젊음이,

달콤한 당신의 사랑에 웃음져요.

(번안곡 <사랑은 기차를 타고> 가사 일부)

아름다운 프로방스를 기차로 여행하는 ‘감미로운 남프랑스 여행’의 서막은 출발부터 아찔한 사건이 발생했다.

모든 잔소리는 진리와 진실을 동반한다. 해외여행을 시작하기 전 제일 많이 듣는 얘기가 “여권 잘 챙기라”는 말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얘기지만 그만큼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여권을 잘 챙기지 못해서 출국하지 못한 사례도 많다. 가장 빈번한 실수가 신·구 여권이 바뀐 경우다. 전주에서 인천공항으로 이동하는 중에 여권을 바뀐 것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이 자동차로 인천공항까지 다녀갔다는 얘기는 그나마 유쾌한 무용담에 해당하고, 탑승수속을 하다가 여권에 문제가 발생해서 당사자를 인천공항에 남겨두고 일행만 출국한 일도 많다고 한다.

이렇게 얘기로만 전해 듣던 일이 우리 일행 가운데 발생했다. K가 바뀐 여권을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여행 경험이 많은 M언니가 이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K를 데리고 인천공항 여객터미널 3층에 있는 외교부 영사민원서비스에서 여권을 발급받아 겨우 시간 안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K가 이번 여행에서 낙오되었다면, 그녀의 세 언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한 대목이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파리 샤롤 드골 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했다. 해외여행이 처음이라는 K의 언니들이 걱정되어 그분들을 안내해서 출국장으로 먼저 나갔다. 외국 공항에서 가방이 바뀌었다거나 분실했다는 얘기도 더러 들은지라 ‘가방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도 났지만 평균 연령 63세의 언니들은 걸음도 느렸다. 급기야 그 가운데 한 분의 가방이 가장 늦게 나오는 기록까지 세웠다. (어쩌면 가방은 일찌감치 나왔으나, 우리가 워낙 늦게 팬벨트에 도착해서 빙글빙글 돌다가 늦게 찾은 것일 수도 있다.) 이번 여행 쉽지 않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공항 입구에서 인솔자 K사장과 L선생을 만났다. 각자 본인들의 업무로 유럽에서 체류하다가 파리에서 합류하게 된 것이다. K사장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제일 연약해 보이는 J선배의 캐리어를 들어주었다. 열흘이 넘는 여행 기간이어서 우리 일행은 각자 큰 가방을 들고 나왔는데 정이 많은 J선배는 일행을 위해 먹을 것도 넉넉히 준비해온 터라 가방의 무게도 제일 무거웠다. 제법 긴 거리의 이동 통로를 따라 파리 리옹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RER 파리 외곽선을 이용하게 되었다. 일행은 K사장이 나눠준 표를 받아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낑낑거리며 내려가서 기차를 타고 환승하고 또 몇 정거장을 더 가게 되었다. 낯선 불어는 죄다 꼬부랑글씨이고 읽는 법도 보는 법도 서툴기만 했다. 그렇게 몇 번씩 계단을 오르내리고 지하도로를 건너서 파리 리옹역에 도착했는데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가방을 내리다 보니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공항에서부터 K사장이 들고 온 J선배의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던 일행이 모여서 어디에서부터 가방이 보이지 않았는지를 유추한 결과 공항에서 열차로 갈아타는 와중에 가방을 두고 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공항이었다면 그나마 연락이라도 해 볼 텐데, 공항 밖 기차 탑승구에서 벌어진 일이라 다시 가볼 수도 없고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이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캐리어에 수화물 표라도 붙어 있었으면 혹시 누군가 항공사로 연락했을 수도 있어서 기대라도 해 볼만 한데, 깔끔한 성격의 Y국장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의 태그를 다 제거해서 아무런 표식도 남아있지 않은 터다. 최소한 최초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짐 가방에 붙은 수화물 표를 제거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만약 건강과 관련된 의약품까지 잃어버린다면 더욱 위험한 일이다. 해외여행에서 가방은 분신과 같은 것이다.

외로울 땐 언제나 내 손을 잡아 주고

괴로울 땐 언제나 내 마음 달래준 사람

당신은 오직 내 인생의 동반자

사랑의 길을 함께 가야할 사람

바람 부는 날이면 바람을 막아 주는

내 인생의 동반자 당신은 나의 동반자

(지다연 노래 <동반자> 가사 중)

모나코에서 마르세이유까지의 지중해 연안을 코트 다쥐르라고 부르는데,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니스는 코트 다쥐르의 중심도시이자 유럽 제일의 휴양지로 유명하다. 이튿날 모나코에 가야 해서 니스에서의 시간은 반나절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니스 해변으로 나갔다. 지중해는 하늘과 바다가 둘이 아니었다. 사진을 찍어 뒤집어 봐도 어디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모를 만큼 한 마음으로 푸르다. 투명하고 깨끗한 지중해는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을 품어준다.

이튿날 일찍 숙소를 출발하여 기차를 타고 모나코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지중해의 다양한 풍경이 스쳐간다. 모나코는 어떤 모습일까. 화려한 여배우에서 왕비로 등극했다가 비운이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그레이스 켈리의 영화 같은 삶, 죽음의 레이스 자동차경주, 세계적인 도박장 몬케 카를로, 그리고 장 프랑소와 모리스(Jean Francois Maurice)의 샹송 ‘MONACO’……. 모나코는 단편적인 몇 가지의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호기심과 신비로움을 주는 곳이다. 모나코 몬테카를로 역에 내려서 2층 버스를 타고 시내를 일주한 후 모나코 궁전으로 갔다. 때마침 근위병 교대식이 진행 중이었다.

어떤 이들의 일상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신선하고 새로운 문화적 자극이 된다. 골목길을 따라 지중해를 마주하며 들어앉은 모나코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가 결혼을 한 바로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한 후에도 그녀는 세계인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누워있다. 그녀의 무덤 위에 놓인 장미꽃 한 송이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모나코 해양박물관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MONACO’를 듣는다. 어쩐지 모나코에서 들어야 할 것 같아 아껴두었던 장 프랑소와 모리스(Jean Francois Maurice)의 노래다. 원곡 제목은 <Monaco 28˚ A L'ombre>, ‘모나코, 그늘 속의 28˚’ 라는 뜻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친절하게 가사를 번역한 것도 있다.

모나코

너무나도 무더운 28℃의 그늘에서

세상엔 오직 우리 둘뿐이었죠

모든 것이 푸르렀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그대는 두 눈을 지긋이 감았고 태양은 드높았지요

그대를 어루만지는 내 손은 뜨거웠지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를 안아주세요

나는 행복하답니다 사랑이 우리 곁에 있으니까요

우리는 행복해요

(모나코 가사 중)

중장년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이 노래는 1978년 또는 1979년에 발표된 것으로 알려졌을 뿐, 연주가에 대한 정보는 남아있지 않다. 고등학생 때 모나코를 그리며 애틋한 마음으로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곤 했는데 이제 50대의 중반을 바라보고 있으니, 노래 속에서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가수도 이제 노년이 되었거나 혹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나 말고도 이 노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나이를 먹었을까 생각하니 세월의 무상함에 마음 한편이 아릿하다. 그레이스 켈리는 53세에 생을 마감했기에 평생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있던 모나코는 여행의 본질과 다르게 ‘세월’의 무게를 덧입으며 뭉클한 추억으로 편집된다. 시원한 파도소리, 야자수 그늘 아래서 사랑을 속삭이는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를 상상하며, 그런 사랑을 꿈꾸던 젊은 날 상상속의 모나코가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여행 4일째 참사가 발생했다. 마르세이유로 떠나는 날 아침, 체크아웃을 준비하다가 침대에 앉아있던 나는 “악!” 소리를 지르며 고꾸라지고 말았다. 왼쪽 등허리에서 오른쪽으로 30센티미터 가량 섬광같은 것이 허리를 스치더니 허리 아래로 힘을 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침대 아래로 쓰러진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다가 일행이 허리를 주무르고 근육 이완제며 우황청심환까지 먹여서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어찌어찌 걸을 수는 있었으나 이 일이 있은 후로, 혼자서 뭔가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을 정도로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민폐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행이 돌아가며 형편을 돌봐주었지만, 내 여행은 여기까지, 이미 경로는 내 의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괴로우니 여정이 힘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일행과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그 격차가 메워지지 못하는 것이 일행의 탓만 같아서 섭섭함이 무성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별일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덥고 습한 날씨는 마음의 괴로움에 활활 불을 지폈다. 기대는 원망을 낳고 섭섭함은 자동으로 생성되는 악마의 열매였다. 혼자 낳고 기른 오해의 싹이 그렇게 나 혼자 심신心身의 독이 되어 쌓여 갔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이

그렇게도 그대에겐 구속이었소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헤어지는 이유가됐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 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남이 아닌 남이 되어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구창모 노래 <희나리> 가사 중)

여행이야 말로 대본 없는 단편영화이자 다큐멘터리다. 돌이켜보면 모든 여행이 해피엔딩은 아니다. 여행에서 용기와 위안을 얻기도 하지만 마음을 다치기도 한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사람을 잃기도 하는 것이 바로 여행의 독약이다.

물론, 좋은 여행은 비교적 좋은 여건에서 출발하지만, 시작이 삐끗했다고 여행의 결말 또한 나쁘란 법은 없다. 그러나 여행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것은 누구 잘못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원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여행을 완전히 망쳤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의 여행 경험에 비추어 좀 더 준비하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한 나의 부덕함을 탓하고 반성했다.

비싼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것도 많다. 허리를 다친 덕(?)에 쇼핑을 못해서 돈도 안 쓰고 가방도 가벼워졌다. 말로만 듣던 여권 사태를 비롯해 가방 분실, 건강 이상 등 여행의 피해 사례를 한꺼번에 경험한 이번 여행을 돌아보니, ‘감미로운 남프랑스 여행’이야 말로 감미로운 다음 여행을 위한 혹독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동안 우리들 여행에 이런 불편한 사례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이 또한 추억으로 떠오를 무렵, 허리를 다친 이후의 여정이 새록새록, 감미롭게 전개될 지도 모르겠다. 허리가 나으면 감미로움만 남겠지.

희미해지는 지난 추억속의 그 길을

이젠 다시 걸어볼 수 없다 하여도

이 내 가슴에 지워버릴 수 없는

그때 그 모든 기억들

그대의 사랑이 지나가는 자리엔

홀로된 나의 슬픈 고독뿐

그대가 다시 올 순 없어도 지나간 추억만은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에

홀로 돌이켜 본 추억은 다만 아름답던 사랑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에 홀로 돌이켜 본 추억은

다만 아름답던 기억뿐

(황치훈 노래 <추억속의 그대>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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