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규찬 in 타루트①] 수요일마다 발송될 타루트 탱자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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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개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는 현재 연구를 위해 에스토니아에 머물고 있습니다. 공영 방송의 정상화, 독립 PD의 처우 개선 등 언론계 뿌리 깊게 박힌 병폐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가운데, 전 대표가 에스토니아에서 보내온 소중한 글을 전합니다. <편집자 글>

[PD저널=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뜬금없으시죠? 낯선 낱말들의 조합입니다. 먼저 제 소개부터 하죠. 저는 '돌꿰는동네후진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빈난한 삶들로 만들어진 서울 석관동 그 아담한 동네 구석에 자리 잡은, 한때는 싸가지 없기로 유명했던 한예종을 저는 그렇게 부릅니다. 잘난 척 하지 말라는 자문, 반성의 뜻이라고나 할까요? 이러니 제 딴에는 잘나가는 그곳의 청년 예술가들이 이 선생을 존경은커녕 얼마나 밉상스럽게 여기겠습니까? 재수 없겠죠, 허허. 이미 여러분도 이 글쓴이가 황당하고 고약하며 삐딱한 심성을 지닌, 잡배의 말투로 하면 ‘또래이’인지 눈치 채셨을 겁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 천성이 그렇게 무례하고 또 무식합니다. 쓰는 어투, 하는 꼴이 촌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티를 줄이고 싶은 제 무의식 욕망의 반영일까, 그곳에 터 잡은 채 바깥으로 운동이랍시고 꽤나 들락거리던 저는 어느 무료한 날 스스로를 탱자라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순전한 객기죠. 공자, 맹자, 석가라 할 수는 없고, 에라 비슷한 계열의 가명을 만들어본 거죠. 그런데 페이스북 등에 쓰다 보니, 고놈의 이름 마음에 쏙 듭니다. 디지털 시대와 어긋나면서도 어울리는 아날로그적인 낱말. 쓰임새 많던 뾰족한 가시와 집둘레 삥 담을 이루던 진녹색 넝쿨, 그 사이 황홀하게 빛나던 노란 과실들.

조잡한 이름 바꾸기, 명백한 작란(作亂)입니다. 언뜻 어린애 짓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무슨 대수입니까? 유치하다 욕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벤야민은 이렇게 후대에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파시즘 권력과 부랑하는 산책자로서 치열하게 마주쳤던 저 위대한 역사철학자가 말이죠. 어린이가 돼라. 다시 어린이가 되어 순전한 눈길로써 주변의 비상사태를 정직히 둘러볼 때, 그때 당신은 비로소 세상을 이해하고 역사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와 공명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탱자 되기.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이런 거창한 의미가 붙일 수도 있겠군요. 어이고, 벌써부터 제가 오버하고 있습니다. 말이 큽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이 탱자라는 허접한 인간이 이번 귀한 피디저널의 글쓰기를 타루트라는 엉뚱한 데서 시작해보려 합니다. Tartu. 혹 여러분은 이 지명이 익숙합니까? 책이나 지도에서 본 적이, 아님 직접 여행이라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주 낯설기만 한가요? 하하,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한국의 지구 반대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에스토니아라는 나라조차 많이 생소할 겁니다. 러시아 그 엄청난 땅덩이를 비행기로 가로질러 나르면 만나게 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몇 시간 기차를 안 타면 닿을, 흔히 우리가 발트삼국이라 일컫는 나라들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 타루트는 이 북유럽 국가의 한 도시입니다.

인구가 10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듣보잡’ 도시입니다. 한국에서라면, 경남 밀양이나 전남 나주 정도의 사이즈나 될까요? 그래도 수도 탈린(Tallin)을 빼놓고 에스토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타루트입니다. 하하, 맞습니다. 에스토니아가 원래 엄청 작은 나라입니다. 전체 인구가 고작 130만 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면적은 4만5천 제곱킬로미터로, 10만이 넘는 남한의 절반도 안 되지요. 그런 에스토니아 인구의 약 30퍼센트인 41만 명이 탈린에 거주한답니다. 탱자가 다음 학기 자리를 옮길 곳입니다. 그때 탈린 이야기는 좀 더하기로 하고, 이번 학기 탱자는 이 타루트라는 대학도시에서 여러분과 글로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지 형식이 되겠습니다. 한국의 여러분께 가끔 먼 데서 배달되는, 어느 여행자가 편히 쓴 서신이면 좋겠습니다. 물론, 대학에 적을 둔 먹물 특유의 잰 채하거나 폼 잡는 어투가 완전히 빠질 수 없습니다. 가르치려 드는 듯한 태도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겠죠. 진보적 운동가, 미디어 활동가들 사이에 흔한 선동적 구호, 이념적 언어도 자주 글에 나타날지 모릅니다. 양해바랍니다. 어쩔 수 없는 탱자 문체의 한계입니다. 끊임없는 실험 변태도 딱딱하게 굳은 저의 글쓰기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지는 못합니다. 결국 또 한편의 어정쩡한 글을 갖고 여러분과의 대화를 신청합니다.

긴밀한 교통을 제안합니다. 대륙을 사이에 둔 한국과 에스토니아 간(間) 교통, 저와 여러분 사이 거리를 둔 커뮤니케이션의 프러포즈입니다. 물론 제가 일방적으로 떠드는 꼴이겠지만, 그래도 이곳 타지의 소식들이 부디 바쁜 생활 속 잠깐이나마 주변을 돌아보고 바깥을 상상하는 여유와 흥미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신선한 사색의 모티브,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탱자, 잠시 타자로 변신합니다. 원래의 자리에서 뚝 떨어져 나와, 만만찮은 거리를 둡니다. 그래서 가능한 거리감, 공백이 여러분들에게 과연 어떤 재미난 말 걸기의 시간이 될 수 있을까요? 탱자의 타루트 서신, 이렇게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아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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