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이 내게로 온 날 ㉚] TV를 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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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짝이 내게로 온 날 ㉚] TV를 끄고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 승인 2017.08.25 1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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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TV 시청이 큰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예전에는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켜둔 TV를 끄거나 볼륨을 줄이는 게 일과였는데, 요즘엔 퇴근하자마자 TV 앞으로 달려가서 채널을 선정하고 다음 일을 진행하곤 한다. 빨래를 개키거나 물걸레질을 할 때는 굳이 스토리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토크쇼나 오락프로그램을 틀어두곤 한다. 샤워를 마친 후, 잘 정돈된 거실에서 소파에 왼쪽으로 누워 오른손으로 리모컨을 쥐고는 TV를 저격하듯 한 채널 한 채널 돌리며 탐색을 하는데 이때는 집중할 수 있는 교양 프로나 영화 채널을 오르내린다. 상영 시간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앞이 잘린 채 중간부터 보게 되는 수가 많다. 운 좋게 시작 부분을 맞춘다 해도 어느 순간 소파에서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 때가 많다. 도서관에서 돌아온 큰아들이나 늦게 퇴근한 남편이 깨우기 까지, 그런 상태로 가족을 기다린다. 그렇다. 나는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여름에는 둘째 아들이 오사카로 단기 어학연수를 떠나서 한 달 내내 퇴근 후 TV를 보며 집을 지켰다. 집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TV를 보면서 눈물이 흐르네

사람들은 어디에 기대어 살까

아마도 당신을 알 것만 같았어

사랑은 또 다시 나의 편인걸

혼자뿐인 식사는 이미 식어버렸네

텅 빈 아파트 불빛 외로운 나의 마음

기대어 울 사람 여기 있었으면 좋겠네

입가에 번진 눈물 호올로 울수 밖에

(최성수 노래 <TV를 보며> 가사 일부)

노인들이 왜 TV에 집착하는지 얼핏 알 것도 같다. TV가 유일한 벗이다. 요즘 관찰 프로그램이 많아지면서 ‘혼자 말하는’ 연예인들을 유심히 본다. 혼자 기획하고 혼자 대사를 치고 카메라 동선을 따라 혼자 촬영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순간 혼자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뭐, 장점도 있는 것 같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말로 털어내고 나면 목적이 분명해지고, 실행력이 증대된다. 이를테면 마음속으로 ‘저 공간을 좀 치워야 할 텐데…….’라고 생각했다면 내가 리포터나 MC가 되어 주도하는 것이다. “자, 오늘은 여기에서 저기까지 치우는 것이 미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분리수거부터 해야겠군요. 큰 비닐을 찾아야겠어요. 어디 있나요?” 이렇게 말하고 비닐을 찾아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와, 이건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군요. 이런 건 가차 없이 쓰레기로 직행합니다. 이건 어떤가요? 000가 선물로 주신 건데 버리긴 아깝죠. 그렇다면~ (손가락으로 구석구석을 가리킨 후) 서랍장 3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네, 점점 공간이 넓어지고 있군요. 힘냅시다.” 뭐 이런 식으로 혼자 중계방송까지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특히 질문형으로 대화를 하면 어쩐지 아들이나 남편이 옆에서 반응을 할 것 같고 혼자라는 생각도 사라진다. 아들 방을 치우면서 이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어쩐지 아들의 생각도 읽히는 것 같다.

큰 아들 침대보를 교체하다가, 베개 밑에 놓인 걱정 인형을 발견했다. 아마도 친구의 선물인 듯하다. 늘 긍정적으로 밝게 사는 아들인 줄 알았는데, 24살 아들은 걱정이 많은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무엇인지 짐작되는 바가 있다. 침대보를 갈고 걱정인형을 제자리에 둔 후 베개로 살짝 가려둔다. 이제부터는 내가 걱정인형이 되어 아들의 걱정을 모두 받아줘야겠다.

귀국 날짜가 다가온 둘째 아들의 시트도 교체했다. 여름내 눅눅해진 이불을 걷고 깨끗이 빨아서 강렬한 햇살에 구석구석 일광소독까지 마친 이불을 내어놓는다. 나 어릴 적, 어머니는 풀 먹여서 두꺼운 종이처럼 ‘꾸득꾸득’해진 삼베 이불을 덮어 주셨다. 날카로운 촉감이 싫어서 투정도 부렸지만 목부터 발까지 삼베 이불로 감싸고 선선한 마루에 누워 어느새 단 잠에 빠져들곤 했다. 풀 먹인 삼베이불의 촘촘하고 강력한 표면은 모기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었다. 돌아누울 때마다 사각거리는 시원하고 정직한 홑이불의 감촉은, 어머니의 또 다른 손맛이었다. 깊은 맛이다.

그대 들려줄 한줄 시도 못쓰고

기억속으로 차가운 안개비 안개비만 내린다

홑이불처럼 사각거리며

가슴 저미는 그리움 쌓이고

세상에 온통 시들었어도

깊고 고요한

그대품에서 잠들었으면

잠시라도 잠들었으면

(박정수 노래 / <그대 품에서 잠들었으면> 가사 일부>

둘째 아들의 침대도 정리가 되었다. 빳빳하게 풀 먹인 이불은 아니지만, 습기 많은 지역에서 눅눅한 공기에 지쳤을 아들에게는 쾌적하고 청량감 있는 잠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아들도 엄마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내가 내 어머니의 빳빳하게 풀 먹인 삼베 이불을 기억하듯이.

남편의 여름 이불도 다시 손을 보았다. 일과에 지친 남편이 돌아와서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작은 꽃무늬가 프린트된 민트 색 매트로 바꾸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에 선듯하지 않도록 질감 좋은 면 이불을 내어 놓았다. 마치 꽃밭에서 잠자는 것처럼 행복한 꿈을 꾸기를 바라면서 꽃밭을 가꾸는 심정으로 잠자리를 돌본다. 우리 집이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이석노래 / <비둘기 집> 가사 일부>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가족들이 집으로 다시 모였다. 큰 아들은 2주간의 대학신문사 연수를 마치고, 작은 아들은 일본에서 돌아와 각각 2학기를 시작했다. 특히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교 규정에 의해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둘째는 2학기부터 집에서 다니게 되어서 모든 가족이 함께 지내게 되었다. 큰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해서 나가거나 작은 아들이 군에 입대하게 될 때까지, 당분간 네 명의 공존은 계속될 것이다.

여전히 남편은 바쁘고 아들 역시 귀가가 늦을 때도 있지만, 이제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 TV를 보지 않는다. 빈 집의 적막감을 메우기 위해 TV 볼륨을 높이지 않는다. 리모컨을 손에 쥐고 무차별 채널 폭격을 가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이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네 명 중 누군가는 먼저 집으로 돌아와 다음 가족을 기다리는 당연한 일이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지난여름 새삼 깨달았다. 아들 방에서 들려오는 형제의 대화도 정겹고, 아버지를 맞이하는 아들의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아들을 대하는 아빠의 목소리도 다정하다. TV를 끈 공간에 대화가 오간다. 참 행복하다. 다가오는 가을에도 다글다글 복을 끊이지 않고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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